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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10시간전

슬기로운 이웃생활

부동산 방문기

 막바지 가을 햇살이 뜨겁다. 옷을 껴입을 필요 없이 가볍게 집을 나서기로 한다. 지구가 시름시름 앓고 있는 증거일 텐데 참 태평하다. 봄, 가을용 옷은 이제 일회성이라 사기가 아깝다. 이러다가 하루 만에 기온이 뚝 떨어지겠지. 춥고 건조한 겨울이 오면 수족냉증 때문에 양말을 신어도 소용이 없다. 은행나무를 덮은 황노랑나비는 절반 이상이 바람에 날아갔다. 낭만의 계절이 서서히 지고 있다.


 배드민턴 채와 공을 챙기고 가방에 물통을 집어넣는다. 남편과 나의 도장은 혹시 물에 젖을까 주머니에 넣었다. 문 앞에 세워둔 형광색 자전거에 아이가 올라탄다. 부쩍 키가 커서 그런지 자세가 엉거주춤하다. 슬슬 새 걸로 바꿔줄 때가 됐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줘도 지. 아들은 2학년이 되더니 산타 할아버지의 존재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학교 친구들이 그러는데 실은 엄마, 아빠가 사주는 거래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아이의 표정이 귀여웠다.   


 잭 프로스트 영화 기억 안 나?
어린이들이 안 믿어주니까
이빨요정도 부활절 토끼도 다 없어졌잖아.
니가 안 믿으면
산타할아버지도 사라지실 텐데.
아이구, 그럼 이번 성탄절은
선물 못 받는 거야?


 아들은 선물을 못 받는다는 말에 깜짝 놀라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맑은 순진함에 피식 웃음이 다. 늦게 알수록 좋은 진실도 있는 법. 이도 어른처럼 바쁜 요즘, 동심이라도 지켜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선물을 담보로 한 협박이라니. 삼보투지 뒤에 람보르기니로 귀가하는 수행자의 뒷모습을 본 것 같 씁쓸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외제차는 무리지만 자전거는 사 줄 수 있으니 그걸로 퉁치도록 하자.


 사흘 전, 아랫집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정말지 오랜만의 등장이었다. 새벽 늦게까지 글자를 두드렸더니 정신이 멍했다. 잠깐 눈 좀 붙이고 일어나야지 싶어 침대에 누운 지 삼십 분쯤 지났을. 익숙한 차임벨 소리는 유체이탈에서 돌아온 영혼처럼 나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천근 같은 피곤함에 짜증이 섞였지만 아주머니의 등장은 실로 반가웠다. 글감이 제 발로 걸어오다니 이런 행운이 있나. 인터폰에 비친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 맞다. 이런 얼굴이었지.


 남편은 때마침 회사에 볼일이 있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예전과 토시  톨 다를  없는 얘기를 주고은 후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여전한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하긴,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는다지 않는가. 저분은 오래오래 사실 것 같다. 한결같은 아주머니의 모습만큼 변한 내 모습에도 적잖이 놀랐다. 여유라는 이름의 보호막 덕분에 방어력이  아졌다. 내 수명도 덩달아 늘어다.  



 남편이 먼저 나와 잡아 준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 같이 일 층으로 내려갔다. 그 짧은 새를 못 참고  사람 투닥거리기 시작다. 그이가 돌아오고 나서 내 양쪽 귀에서는 자주 피가 날 것 같다. 아이랑 놀아달라고 부탁하면 10분도 안 돼서 둘 중 하나는 나를 부른다. 아들들아, 적당히 하자. 오늘은 중요한 날이다. 


 상가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로 한 번 갈아타고 나면 우리의 목적지에 도착한다. 짙은 녹색 간판이 잘 어울리는 여기는 부동산이다. 드디어 집주인과 재계약을 하러 왔다. 우리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주인 부부는 우리 아들보다 어린 딸을 뒀다. 처음 계약할 때는 옆에서 쌀과자를 먹고 있더니 지금은 휴대폰을 뒤적이는 손놀림이 어른 못지않다. 한 차례 인사가 오가고 중개사 아주머니가 필요한 서류를 챙기러 자리를 비웠다. 입이 몹시 근질근질하다. 물어볼까, 말까.


혹시.. 예전에 물이 새서 공사했을 때요.
아랫집에서 무슨 말 없었나요?



 인상 좋은 주인아저씨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뇨, 없었어요.' 의외의 대답에 아차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쏟은 물이 많으면 수건으로 덮어도 한 번에 닦이지 않는다. 그저 옆으로 번져나갈 뿐. 알고 보니 전화통화는 그 집 남편이랑만 했단다. 그래도 나는 그간의 투쟁기록을 알리기로 결심했다. 지금 재계약하면 총 6년을 살게 된다. 부동산 아주머니는 '그 정도 살고 나면 이제 사야지'라고 대놓고 매매를 권유했다. 이 집을 사라고. 허허허. 마른 웃음만 나왔다. 페르시아 왕에게 밤마다 이야기를 들려준 셰에라자드에 빙의해서 층간소음 모험기를 시작했다.


 의문의 쿵 소리와 경찰의 방문, 현재까지 이어지는 오해에 대해서 떠들다 보니 어느새 신이 난 자신을 발견했다. 남편이 진정하라고 슬쩍 내 옆구리를 찔렀다가 나중에는 같이 동참해서 이야기를 덧붙였다. 주인집 부부는 아연질색하며 중간중간 세상에, 어머나, 왜 그래요, 정말요 등의 추임새를 넣어주며 흥을 돋았다. 글로 쏟아낼 때의 쾌감도 좋지만 대나무 숲은 어디까지나 대나무 숲. 사람은 즉각적인 반응이 있어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어느새 부동산 아주머니도 옆에서 내 이야기를 귀를 기울인다. 나, 이야기꾼의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OOO호실 사모님 말씀하시는 거죠.
직접 만나도 보고 전화통화도 해봤는데
저도 연락 오면 안 받고 싶어요.
이야기에 두서가 없어.



  중개 아주머니가 찌푸린 얼굴로 맞장구를 치셨다. 속이 뻥 뚫렸다. 세상이 급속도록 발전하게 된 데에는 험담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신 신고 전해진 이야기가 자동차를 거쳐 메일, 휴대폰으로 진화했지만 역시 얼굴 보고 얘기하는 것만큼 생생한 게 없다. 경박하다 욕해도 할 수 없다. 층간소음 때문에 곤란해하고 있다는 걸 내 주위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른다. 답답한 얘기에 걱정할게 뻔하고 해결책도 없기 때문이다. 은퇴를 앞둔 마술사가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금단의 트릭을 공개해 버린 것처럼 유쾌했다.   

 

 그 사모님, 탑층 알아보고 다닌다고
 여기 주위 부동산 전부 돌아다녔어요.
금방 숨 넘어갈 사람처럼
다급하게 집을 구하더라니까요.
매매 가격 다 거기서 거긴데
꼭 끝까지 확인한다면서.
결국은 가격이 안 맞아서 못 샀지만.
암튼, 사람이 좀 이상했어요.


 주인부부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다음 세입자나 매매자에 직결되는 사안이니 이해한다. 그 아주머니는 경비실뿐만 아니라 부동산에서도 유명인이었구나. 탑층은 층간소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점이 안쓰럽다. 내가 골똘히 생각에 빠진 사이에도 다들 입을 모아 추측을 이어갔다.


갱년기 때문에 그럴지도 몰라요.
신경이 날카로워지니까.


그 정도면 약을 먹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우울증 약 먹고 계신데요.


아, 그러면 그것 때문일 수도 있겠네요.
자기한테 맞는 약이나 용량 찾아갈 때까지는
기분이 업치락 뒤치락한다고 들었어요.



 생각지 못한 추리에 그동안의 의문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어떤 게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텅 빈 밥그릇을 휘젓는 것보다야 뭐라도 붙어있는 주걱이 낫다. 이대로는 밤까지 모임이 이어질 것 같아 이야기를 수습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때는 한순간 멈칫했지만 더 이상의 지체는 없었다. 미 아랫집 아주머니와 이 년을 더 함께하기로 결심했으니까. 류에 찍힌 붉은 인주가 선명했다. 번질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말라버렸다.

 

 집으로 올라가기 전, 아이와 배드민턴을 쳤다. 양방향으로 오락가락하는 공을 보며 우리네 삶을 떠올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공이 날아올 때,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일부러 놓칠 수도 있고, 세게 쳐서 매트 뒤로 넘겨버릴 수도 있다. 혹은 주운 공을 꽉 쥔 채 게임을 시작하지 않거나, 줄 듯 말 듯 애를 태울 수도 있다.


  잠매트를 떠나 심판석에서 경기를 지켜보 있는 중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주도권을 잃지 않는 선수의 자세다. 내가 나로 온전히 서 있을 수 있다, 언젠가 경기로 돌아가 새로운 사람과 게임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상대방의 반칙에 대한 신고는 새 게임의 상큼한 애피타이저가 되어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계약서를 쥔 손이 다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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