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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Nov 23. 2024

남편이 돌아왔다.

여행과 일상의 경계에서

 투명한 물속에 파란색 바닥 타일이 햇빛에 반짝인다. 잔잔했던 수면은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파문이 일고 지기를 반복한다. 비치볼이 골대를 통과할 때마다 출렁이는 물보라가 시원했다. 수영장 가장자리에는 이국의 나무가 빼곡하게 서 있다. 여러 개의 머리빗을 모아놓은 나무 중심에는 덜 익은 초록열매가 방울방울 달렸다. 혹시 머리 위로 떨어지지는 않겠지. 잠시 딴생각을 해 본다.


 썬베드에 누워있는 사람들 끄트머리로 한 동양인 여성이 노트북 작업에 취해있다. 여기는 다낭, 해변과 여유의 도시. 그런데, 내가 어쩌다가 여기 왔더라. 어제까지의 일상이 마치 다른 나라 일처럼 멀게 느껴졌다. 외국인의 피부가 구릿빛이 되는 동안 키보드를 두드리는 건 나였다.


 남편이 돌아왔다. 근 10개월 만이다. 돌아온다고 약속한 날짜가 계속 미뤄지는 바람에 애가 탔다. 중국과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배가 들어왔는데 날씨가 말썽이었다. 바다가 요동을 치면 항구에 배를 댈 수 없다. 이러다가는 귀국하자마자 비행기를 타야 할 판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베트남으로 가야 하니까. 


 일을 벌인 건 남편이었다. 모임을 좋아하는 그는 간혹 상의 없이 약속을 만들어서 나를 곤란하게 했다. 아이가 어렸을 때 만들어진 엄마들 모임이 하나 있다. 다들 교육에 관심이 많다. 도서관에서 자주 마주치다 보니 자연스레 친해졌다. 가끔 온 가족이 함께 모여 회포를 풀었다. 작년에는 처음으로 경주에 펜션을 빌려서 하룻밤을 보냈다. 한 엄마가 그때 너무 좋았다고, 다시 한번 놀러 가고 싶다고 이야기를 꺼낸 게 발단이었다.


그럼, 우리 이번에는 해외여행 어때요?    



 저기, 나랑 먼저 상의 좀 해줄래요. 당혹감을 감추고 일단 웃었다. 옆구리를 찔러주고 싶었지만 하필 건너편에 앉아있었다. 해실해실 사람 좋게 웃는 얼굴이 그때는 밉상이었다. 친구들과의 여행이 싫은 게 아니다. 다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뿐이다. 그때가 남편이 배를 타고 나가기 한 달 전이었다.


 네 가족이 여행에 찬성했다. 우리는 어른 한 명당 십만 원씩 돈을 모으기로 했다. 계좌를 트고 자동이체 신청을 했다. 여행계획은 전적으로 남편이 짠다고 했다. 그걸로 승선생활의 외로움을 달랠 심산일 테지. 그러니 어찌 그를 탓하리오. 그저 다음에는 나랑 먼저 의논하고 말해달라 부탁했다. 순한 양처럼 고개를 끄덕였지만 뒤돌아서면 까먹을게 분명하다.



나 다녀왔어.



 마침내, 출국일을 이틀 앞두고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만나는 얼굴몹시 반갑고 또 괜히 어색했다. 오랫동안 텅 비어 있던 현관이 꽉 차는 느낌이었다. 두 팔을 벌려 있는 힘껏 그를 안았다. 희미한 담배냄새가 코를 스쳤다. 고새를 못 참고 한 대 피고 왔구나. 너른 가슴에 안긴 채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 잔소리는 넣어두기로 한다. 어서 와라고 속삭여본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싱긋 웃었다.  


 거실 불빛 아래에서 본 남편은 살이 통통하게 올라있다. 항해하는 동안 마음이 편했구나 싶어 안심했다. 심적으로 불안하면 살이 쏙 빠지는 사람이다. 메신저에서도 대화를 나눴지만 기관장님도 후배들도 다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얼굴도 모르는 그분들께 잠시 감사인사를 드렸다. 단골 국밥집에 가서 따끈한 국물을 함께 들이켰다. 살 것 같다고 기분 좋게 웃는 걸 보니 나도 행복했다.


자, 다 먹었지? 그럼 얼른 집에 가서 짐 싸자.



 나는 현실주의자다. 행복은 행복이고 여행은 여행. 출발일이 멀지 않았다.


 내 인생은 어딘가 블랙코미디 같은 구석이 있다. 때아닌 태풍에 비행기가 결항되고 말았다. 속상할 법도 하건만 우리 가족은 오히려 좋아했다. 아이는 좋아하는 보드게임 수업에 가고 남편은 마음을 제정비할 시간이 생겼다.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렸다. 해외여행이고 뭐고 마음속 응어리를 뱉어내는데 여념이 없던 시기였다. 남편은 오랜만에 돌아온 자신을 거들떠도 안 본다며 심통이 났다. 잘 달래서 일찍 재웠다. 돌아왔다는 남편은 없고 아들만 하나 늘었다.    


 다음날은 다행히 날이 화창하게 개었다. 비행기는 무사히 출발해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처음 가본 베트남은 따뜻한 여름 날씨에 화사하고 평화로웠다. 간혹 스콜이 찾아왔지만 여행지에서는 젖어도 웃음이 났다. 불친절한 사람은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무엇보다 친구들과 신나게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게 가장 만족스러웠다. 아빠의 존재가 아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는 게 멀리서도 한눈에 보였다.


 나는 여기서도 가져간 노트북으로 글을 썼다. 깨끗하게 정돈된 리조트는 앉아만 있어도 기분이 좋았다. 동그란 라탄의자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원래 여유를 즐기는 타입이 아니다. 카페에 가서 음료를 주문하면 순식간에 컵을 비우고 할 거 없나 두리번거리는 유형이다. 사색에 잠긴 듯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동경하곤 했지만 절대 저렇게는 못하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변한 내 모습에 스스로가 가장 많이 놀랐다. 휴양지의 느긋함이 내게도 스며든 걸까. 아니면 내 마음이 변해서 그런 걸까.   


 적당히 흐린 날씨에 모자가 필요 없었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잔잔한 파도를 바라보았다. 떠오르는 대로 글을 쓰고 피곤하면 의자에 기대 누웠다. 암울했던 지난 시간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남편은 그가 없는 동안 일어난 아랫집과의 사정을 알지 못한다. 걱정할 게 뻔하니 말할 수가 없었다. 층간소음 전쟁은 현재진행 중이다. 돌아가면 다시 속상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제 내 글 속에서 살아 숨 쉬는 훌륭한 소재가 되었으니까. 제 발로 걸어와준다면 양팔 벌려 환영해 줄 테다. 짭짤한 바다 냄새와 열대 나무의 향기가 어우러져 코끝을 스쳤다. 노을빛이 점점 더 붉게 타오르며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의 평온함을 가슴 속 깊은 곳에 저장했다. 언젠가 용서가 필요할 때 꺼내 볼 수 있도록. 잘 익은 코코넛처럼 단단한 마음이다. 열매 안을 가득 채운 시원한 물처럼 내일은 그보다 더 유연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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