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한문 선생과는 달리 학교는 내치지 않았다. 대신, 학교 안에는 폭력이 난무했다. 당연하게도 해미고를 졸업할 때쯤에는 웬만한 폭력에는 무감각해지기 마련이었다. 이는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가는 데 제법 큰 자산이 되었다. 세계적 명문 해미고에서만 특별히 배우고 익힐 수 있는, 폭력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이었던 셈이다. 폭력 대응 현장 수업의 중심에는 늘 교련 선생 미호씨가 있었다.
처음에는 교련 선생의 별명이 ‘미호씨’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행실에 걸맞은 본래 별명은 ‘미친개’였다. 어느 날, 미어캣이 창문에 고개를 내밀고 망을 보다가 ‘미친개 떴다.’라고 크게 외치는 것을 듣고고, ‘정말 미친개가 뭔지 보여주마!’ 하며 미어캣을 죽도록 두들겨 팬 것도 모자라 무기정학 처분까지 내렸다.
“미친 호랑이면 몰라도, 미친개는 용서할 수 없다.”
그 사건 이후로 우리는 교련 선생을 미호씨라고 불렀다. 우리가 미호씨라고 외쳐도 그는 못 들은 척했다. 비록 미쳤다는 의미는 여전했지만, 어쨌든 강하고 용감한 호랑이라는 뜻도 담겨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그를 미호씨라고 부르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저런 개망나니를 아무리 미쳤기로서니 영물인 호랑이에 비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호는 ‘미친 호랑이’가 아니라, ‘’미친 호래자식‘의 줄임말이었다. 버릇없이 자라 교양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데다 힘없는 학생들에게 함부로 폭력을 휘두르는 그에게 ‘미친 호래자식’만큼 잘 어울리는 별명도 없었다.
해미고의 월요일 아침 교문 풍경은 살벌했다. 월요일에는 모든 학생이 얼룩덜룩한 무늬의 교련복을 착용하고 등교해야 했다.수백 마리 검은 누에가 꿈틀거리는 듯한 기괴한 무늬의 교련복이었다. 교련 선생 미호씨는 매주 월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풀색 군복에 낡은 검정 군화를 신고 교문 앞에서 복장 검사를 했다. 월요일 아침만큼은 평소에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던 학교 개구멍까지 남자 선생들이 철저하게 통제했다.
미호씨는 등교하는 학생들의 요대, 각반, 명찰, 단추는 물론 교련복의 청결 상태까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폈다. 조금이라도 그의 심기를 거스르면 교문 한쪽에서 혹독한 얼차려를 받아야 했다. 주로 엎드려뻗쳐와 토끼 뜀뛰기였다. 혹여 엄살을 부리는 학생이 있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손에 든 지휘봉으로 인정사정없이 후려갈겼다.
“그따위 나약한 정신 상태로 어떻게 빨갱이를 물리칠 수 있겠어! 정신 똑바로 안 차려!”
미호씨는 입만 열면 ‘빨갱이’라는 단어를 주문처럼 내뱉었다. 툭하면 금방이라도 빨갱이가 쳐들어와 우리를 잡아먹을 것처럼 겁을 주었다. 당시 내 또래 대부분 그렇듯이, 나 역시 뼛속까지 반공주의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빨갱이는 무조건 나쁜 놈들이라고 배우고 익혔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도 북한에는 머리에 흉측한 뿔이 달린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굳게 믿었으며, 혹시라도 그들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으리라 몇 번이고 다짐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엉엉 소리 내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미호씨는 육군 장교 출신이었다. 누구는 대령으로 예편이라고도 했고, 누구는 소령이라고 했다가 심지어 중위 출신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어쨌든 그가 군 장교 출신이라는 점만은 확실했다. 그 시절 고등학교 교련 선생은 예외없이 군 장교 출신이 맡았으니까. 미호씨는 서울 강북의 한 고등학교에서 오래 근무하다가 3년 전 돌연 해미고로 전근을 왔다고 했다.
미호씨의 취미는 학교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며 배회하는 것이었고, 특기는 손에 든 묵직한 지휘봉으로 학생들을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후려치는 것이었다. 그가 늘 들고 다니는 지휘봉은 손잡이는 낫자루처럼 굵은 나무였지만, 점차 가늘어지는 몸통 부분은 금속으로 되어 있어 묵직했다.
그는 뼈가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교묘하게 힘을 조절하여 지휘봉을 휘둘렀다. 고통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했다. 조금이라도 반항적인 기색을 내비치는 학생이 있으면, 가차 없이 군홧발로 짓밟았다. 복도를 지나가는 학생의 뺨을 느닷없이 후려갈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유는 나중에 천천히 만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걷는다는 둥, 팔자걸음으로 걷는다는 둥, 시끄럽게 떠든다는 둥, 실내화가 더럽다는 둥, 그 이유를 대자면 끝도 없었다.
이런 부당한 폭력에 순순히 참고만 있을 해미고 학생들이 아니었다. 정의감 빼면 시체라는 해미고 선배 셋이 그에게 대든 적이 있었다. 하지만, 힘으로 제압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미호씨는 즉시 경찰에 신고하여 그 세 명에게 쇠고랑을 채웠다. 그 이후로 미호씨에게 대들었던 학생들은 학교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물론, 해미 읍내에서도, 심지어 집에서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끝내는 서해 바다에 돌덩이를 매달아 수장시켰다거나, 어느 이름 모를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는 섬뜩한 소문만이 흉흉하게 떠돌았다. 미호씨의 맥락 없는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학생들은 그저 그를 피해 다니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미호씨는 폭력이 곧 정의라고 굳게 믿는 듯했다. 그는 학생들의 공동의 적이자, 공포의 대상, 그야말로 악마였다. 어른들은 흔히 말했다. 아무리 흉악한 인간이라도, 알고 보면 본래는 착했는데 모진 세상을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악행을 저지르게 된 것이지 처음부터 악한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내가 2년 넘게 미호씨를 지켜본 바로는 그의 심성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선한 구석이라곤 티끌만큼도 발견할 수 없었다.
미호씨는 그야말로 절대 악이었다. 잔인한 폭력은 두려움에서 비롯된다는 백설공주의 말처럼, 어쩌면 미호씨의 그 잔인한 폭력은 아마도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자리 한‘빨갱이’에 대한 극심한 공포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몰랐다.
대나무처럼 키만 크고 몸은 삐쩍 마른 나에게 월요일 아침마다 열리는 교련 조회 시간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피가 중력에 이끌려 머리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발바닥으로 쏠리는 탓에, 오래 서 있으면 어질어질했다. 학기 초에는 그럭저럭 견딜 만했지만, 햇살이 뜨거워지는 늦봄이 되자 조금만 오래 서 있어도 눈앞이 아찔해지곤 했다. 교련 조회는 키 큰 순서대로 앞에서부터 줄을 섰기에, 당연히 키가 큰 나는 늘 맨 앞줄 신세였다.
운동장 사열대를 정면으로 오른쪽부터 1학년, 2학년, 3학년 학생들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석상처럼 서 있었다. 교련 조회 시간 만 되면 그 흔한 참새 한 마리 날아들지 않아 운동장은 숨 막히게 조용했다. 연대장은 학생회장이 맡았고, 각 학년 대표가 대대장, 각 반의 반장이 소대장이었다.
사열대 맨 앞에 위풍당당한 풍채의 연대장이 버티고 섰고, 그의 바로 뒤에는 키가 훤칠한 기수 다섯 명이 커다란 깃대를 굳건히 부여잡고 있었다. 기수들은 하나같이 장대처럼 키가 컸다. 그들은 교련복 바지의 날을 칼날처럼 날카롭게 세웠고, 각반을 단단히 두른 바짓단에는 금속 링을 넣어 잔주름 하나 허용하지 않았다. 1학년은 약 360명, 2학년은 약 290명, 3학년은 약 200명으로, 총 85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넓은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내가 해미고에 입학하던 그해 가을에는, 격년으로 실시하는 교련 검열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조회 시간 때마다 우리는 교련 검열 연습에 매달렸다. 교련 검열의 백미는 단연 열병식이었다. 850명 학생 전원이 흐트러짐 없이 오와 열을 유지하며 운동장을 한 바퀴 행진하여 출발 지점으로 정확하게 돌아오는 것이었다. 행진 중에는 사열대에 있는 미호씨를 향해 절도 있는 경례도 해야 했다. 하지만 번번이 우리는 사열대에 제대로 도착하기도 전에 대열이 흐트러지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선글라스를 낀 미호씨는 사열대 위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시간이 흐를수록 교련 조회 시간은 점점 길어졌고, 날씨 또한 견디기 힘들 만큼 뜨거워졌다. 그러다가 5월 중순경, 결국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날도 우리는 열병식을 다섯 번이나 반복했지만, 삐뚤어진 대열은 도무지 바로잡히지 않았다. 그러자 미호씨는 전교생의 정신력을 강화한다고 하면서 모두를 뜨거운 땡볕 아래 세워두었다. 앞에 서 있던 선생님들은 어느새 모두 교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40분쯤 지났을까. 하늘이 노래지는가 싶더니 자꾸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뒤쪽에서는 간간이 쿵,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뜨거운 햇볕을 이기지 못한 일부 나약한 학생들이 통나무처럼 쓰러지는 소리였다.
“애이 씨발! 정말 미쳐 버리겠네.”
적막을 깬 고함 소리에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3학년 학생 중 하나가 요대로 옆 친구에게 마구 휘두르고 있었다. 요대의 금속 버클 부분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은 학생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비명을 질렀다.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넓은 운동장은 난장판으로 변했다. 미호씨는 사열대에서 쏜살같이 뛰어 내려왔다. 그는 학생들을 밀치며 얼굴에 피범벅인 학생 곁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 학교 건물 뒤편에서 흰색 봉고차 한 대가 급히 달려오더니 피를 흘리는 학생과 미호씨를 태우고 학교 정문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베어가 사열대에 올라가서 모두 교실로 들어가라고 지시했다.
멍하니 운동장에 서 있던 학생들은 교실을 향해 천천히 흩어졌다. 모두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좀처럼 놀라는 법이 없는 쿤타마져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첫 시간은 베어가 담당인 윤리 시간이었다. 날은 따뜻하고 배는 불렀으며, 베어가 들어온다니 잠자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평소 수업 시간 내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대호조차 오전부터 내내 조용했다.
“교련 선생님을 너무 욕하지 마라. 욕을 하려면 차라리 나라를 욕해. 교련 선생님도 나라에서 시키니깐 저러고 있는 거야.”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나라를 욕하라니, 그게 과연 학교 선생으로서, 그것도 윤리를 가르치는 선생이 할 말인가. 하지만 베어는 나의 의구심을 곧바로 풀어주었다. 그날 베어는 대한민국 학생들이 군복과 다름없는 교련복을 입고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던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1968년 북한 무장 공비들이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했던 충격적인 사건으로 대한민국은 발칵 뒤집혔다.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군사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고등학생들에게까지 군사훈련을 시켰던 것이었다. 그 당시 이미 교복 자율화를 시행된 지 몇 해나 흘렀음에도, 군복과 흡사한 교련복만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베어는 교련 교육이 시작된 역사적 배경을 상세히 설명해 주더니, 마지막으로 한창 꿈을 꾸며 미래를 준비해야 할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강요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며, 조만간 교련 과목은 폐지될 거라고 힘주어 말했다.
교련 조회 시간에 요대를 휘둘러 친구의 얼굴에 상처를 낸 3학년 선배는 퇴학당했다. 그리고, 그의 희생으로 나는 지긋지긋한 교련 조회에서 제외되었다. 요대 사건이 있고 일주일 후에 교련 검열에서 빠질 학생들을 선별했다. 몸이 허약하거나 본인이 자신은 죽어도 하기 싫다는 학생은 열외시키기로 학교 차원에서 결정한 것이었다.
나도 교련 검열 열외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운동신경이 젬병이라 열병식 때마다 팔다리가 따로 놀았고, 무엇보다 맨 앞줄에서 얼굴이 노랗게 질린 채 위태롭게 서 있던 내 모습을 베어가 보았던 까닭이다. 우리 반에서는 총 다섯 명이 열외 되었다. 쓰러졌던 세 명과 나 그리고 미어캣이었다. 미어캣은 담임에게 자신은 군사훈련을 도저히 받고 싶지 않다고 눈물로 호소 했다고 한다.
3학년은 1/3가량 열외 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교련 검열 때 3학년만 적은 인원으로 참여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원래도 3학년은 다른 학년에 비해 인원수가 적었다. 졸업정원제로 운영했으니 이는 당연했다. 하는 수 없이 1, 2학년 중에서 덩치 큰 학생을 뽑아 3학년 자리로 배치했다. 대호도 졸지에 3학년이 되었다.
그리고 교련 검열 열외자는 월요일 아침이면 본관 뒤편 낡은 건물 빈 교실에 모여 있어야 했다. 좁은 교실 안에서 월요일마다 한 시간 반 동안 죽은 듯이 박혀있는 것은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 더욱이 2, 3학년 선배들과 좁은 공간에 함께 있어야 하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선배들도 비좁은 공간에 오래 갇혀 있다보니 부쩍 짜증이 늘었고, 그 짜증은 고스란히 1학년들에게 향했다. 그래서 나는 월요일 아침만 되면 일부러 지각했다. 내가 등교하는 완행버스의 종착지는 수덕사였다. 그러니까 학교 정문에 정차하는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앉아있으면 수덕사까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