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출근
백수 2일 차, 나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출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온다. 회사는 사라지고 갈 곳이 없지만 그래도 출근을 한다며 집을 나온다. 마치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시나리오 학원은 보름 뒤 개강이고 서울에 얻은 집도 그때쯤 들어가기로 계약했던 터라 보름 동안 나는 퇴근시간까지 밖에서 시간을 비비다가 들어가야 했다. 예전에 실직 가장들이 가짜 출근을 한다며 집을 나와 거리를 방황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근데 그게 내 일이 되다니. 그나마 미혼에 가장이 아니라 다행이다.
점심시간, 맥도널드에서 파는 2500원짜리 치킨 스낵랩을 먹으며 생각했다. ‘이제 어디로 가지.’ 제일 만만한 건 역시 카페였다. 나는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들고 간 아이패드에 혼자 글을 쓰거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카페에 머무를 수는 없는 일. 커피 한 잔 시키고 하루종일 죽치고 있는 진상 손님은 되기 싫었다. 그때 번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돈을 들이지 않고도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
백수의 우아한 라이프 스타일
카페에서 2시간 정도 머무른 나는 주섬주섬 아이패드를 챙겨서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마침 얼마 전에 새로 인테리어를 끝내서 아주 깔끔하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좌석도 많이 마련되어 있었다. 정말 얼마 만에 오는 도서관인지. 하지만 막상 도서관에 오니 무슨 책을 봐야 할지 몰랐다. 일단 책 진열장으로 가 무작정 제목을 훑어보다가 눈에 들어오는 제목의 책을 아무거나 골라 뽑았다. 이래서 뭐든 제목이 중요한 거다. 스쳐보아도 눈에 들어와야 하는, 그래야 멋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게라도 선택받는 거다. 그렇게 별것 아닌 사소한 나의 행동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가만, 그렇다면 지금 내 글의 제목은 사람들이 스쳐보았을 때 눈에 들어오는 제목인가? 음... 대체 누가 이 글을 선택하고 읽을지 알 수 없지만, 수많은 글의 홍수 속에서 나의 글을 클릭해 준 그 선택에 감사하다. 내가 글을 썼다고 누가 당연하게 읽어주는 것은 아니다. 그 누군가가 짧은 순간에 이 글을 읽을지 말지 고민하고 선택해 준 것이다.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써 가며 나의 글을 읽어주는 것이다. 감사한 것이 마땅하다.
아무튼 도서관에 왔으니 책 하나를 뽑아 들고 본격적으로 독서 모드에 들어갔다. 그동안 웹소설이나 전자책에 익숙해서 그런지 종이책이 낯설었다. 그래서일까 책만 폈을 뿐인데 잠이 미친 듯이 몰려온다. 오늘 너무 여기저기 방황하며 돌아다녀서 피곤했던 탓일까. 아님 단순히 책이 재미없어서일까. 책의 내용이 도무지 눈에 들어오질 않고 눈꺼풀만 점점 내려갔다.
아... 사람들이 내가 쓴 글을 읽고도 이러겠지. 내 글이 여러분의 불면증 해결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도 그거 나름대로 좋은 일이다. 책으로의 기능은 못 했지만, 수면 보충이라는 삶의 질 향상에는 분명 도움을 준 거니까. 내 글이 그렇게라도 유용한 기능을 한다면 아무도 읽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다가오는 D-DAY
어찌 됐건 나는 이렇게 서울로 가기 전까지 보름여 간의 맥도널드-스타벅스-도서관으로의 가짜 출근을 이어갔다. 사람이라는 게 참 이상하다. 어딘가에 메여 있을 때는 자유시간이 주어지면 하고 싶은 게 참 많을 것 같았는데 막상 시간이 남아도는 상황이 오니 딱히 할 게 없는 거다. 게다가 앞으로 수입은 없고 지출만 많을 테니 엄한 데 돈을 펑펑 쓰며 놀 수도 없었다. 매일매일을 여기저기 방황하느라 피곤하기도 하고 시간도 안 가서 지루했지만 그래도 버틸만했다. 약속한 디데이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곧 새로운 상황 속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에 잠깐의 지루함은 견딜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디데이가 찾아왔다. 나의 새로운 히스토리가 시작될 디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