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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티지가 아닌 빈티지 옷가게(14)

by 김독순

모두가 일 초 뒤를 위해 살아가고 그 일 초가 쌓여 일 분이 되고 일 분이 쌓여 한 시간이 되고 한 시간이 쌓여 하루가 되고 하루가 쌓여 일 년이 된다는 연속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이야기. 햄버거게임처럼 겹겹이 쌓아가는 놀이가 시간이라면 가장 아래에 깔린 건 언젠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말끔히 사라지겠지. 매주 압축되어 검은 바다를 건너 날아오는 짝들처럼. 옷의 생명이 소멸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거치야 할 종착지가 이곳, 빈티지 옷가게일까.


빈티지≠오래되어 가치 있는 것.

빈티지=가치 있어 오래된 것.


한가한 오후. 손님이 올 확률이 가장 낮은 낮 네 시. 어렴풋이 재희가 알려준 칸트처럼 그 시각에 맞춰 나는 산책하고 목소리가 없는 음악을 들어본다. 예전의 나라면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해 재이를 괴롭혔겠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물론 재이의 업무가 불규칙한 탓도 있지만. 라오스. 도쿄. 삿포로. 괌. 호치민. 다낭. 하노이. 방콕. 치앙마이. 푸켓. 부정기선으로 하와이까지 날아가는 재이. 짧게는 수백 킬로미터에서 길게는 수천 킬로미터까지 멀어져 있는 재이가 처음에는 신기했고 그토록 먼 거리에서도 우리의 연락이 끊기지 않고 사소한 안부까지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이제 해치 닫힌다.

응.

여덟 시간 뒤에 보자.

안녕.


대화를 주고받다가도 호노롤루에서 코나커피를 마실 재이를 상상하면 무심결에 평행우주이론을 믿고 싶어졌다. 하와이에 머무는 재이의 몸과 달리 지금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재이의 목소리가 어쩌면 바로 내 옆에 있는 실재 같아서. 무엇이 주체일까. 몸, 목소리. 나는 철학을 모르고, 아니 철학을 모른다고 믿지만 내가 절대 다가갈 수 없을 거리에 모든 감정을 내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상기될 때면 데카르트가 되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 대로 카페 루프탑에서, 시끄러운 도롯가에서, 페인트가 닳아 갈라진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집으로 돌아와 침구 속에 누워서 재이의 목소리를 내 귀에다 꽂아본다. 멀리 떨어져 있어 가까웠고 가까워 멀리 둘 수밖에 없었다. 등잔 밑이나 놓치는 머저리라며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가까운 만큼 딱 그 정도로 멀어지는 것 같다. 우리 엄마 이름은 뭘까. 양희숙. 우리 아빠 이름은 김태원. 티브이에 나오는 기타리스트 김태원은 깔깔대며 많이도 불러봤는데 정작 아빠의 이름은 불러본 기억이 없다.


김태원. 태원 씨. 양희숙. 희숙아, 라고 불렸겠지, 아마 누군가에겐 여전히 불리고 있겠지. 누구에게도 자신의 이름이 불리지 않는 순간 죽어버리겠지. 그래서 재이가 지어준 이 옷가게의 이름이 ‘이름’으로 된 거라 명령 내려 본다. 재희는 칸트의 묘비명을 따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면, 너에 대해 자주 그리고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더 큰 신뢰와 믿음을 채우는 두 가지가 있어. 그건 내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과 그 아래 너를 향한 사랑”이라며 한 여자에게 고백한 자신의 기억을 데려왔다. 입대를 한 달 앞둔 재희는 고수분지에 갔고 바람이 살랑이던 밤하늘 아래에서 고백했다. 나는 물어보았다.


“그래서 성공했나요?”


재희는 아무런 기색 없이 별이 되었다고 대답했다. 처음에는 예술병에 걸린 환자인 줄 알았는데 죽음에 대한 은유란 사실을 깨닫자 부끄러움과 동시에 난처함이 밀려왔다. 매일 산책길에 들러 비엔나커피를 주문했고 재희와 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금세 시간이 쌓여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 내 기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숙고하면 할수록, 점점 더 큰 경탄과 외경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 법칙. 칸트의 묘비에 새겨져 있어요.”


그 묘비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았고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다며 재희가 알려주었다. 언젠가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는 빈티지 의류를 짝으로 받아와야지, 하고 공상했다, 나는. 그리고 이 순간이 행복하다 여겼고 이 행복이 어디에서부터 발화하는지 머그잔에 대고 물어보았고, 일본에서, 동남아시아에서 비행기 화물칸에 실려 여기까지 날아온 짝을 분해했을 때 건질 만한 물건들이 나온 순간이라는 대답을 얻었다. 처음에는 짝에 봉인된 상품을 풀어헤쳐 모두 진열하기 바빴는데, 이제는 나머지 절반 정도는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그러니까 정말이지 의류의 종착지가 빈티지 옷가게고, 내가 장의사와 같은 역할이라 느꼈다. 그 순간이 가장 숭고했다. 앞으로 몇 년 더 살려둘지, 아니면 그만 보내줄지. 내가 그만 보낸다면 지구란 행성을 거쳐 간 수천억 명의 영혼이 다시금 그 헌옷들을 꿰고 얽고 지어 입게 되는 걸까.


“재희 씨는 어떤 옷을 좋아해요?”

“라프 시몬스요.”


라프 시몬스는 몰라도 시몬스 침대는 잘 알아서 아주 비싼 브랜드일 거라 유추했다.


“2RP 정도 하나요?”

“네?”

“그런 게 있어요.”


짧게 웃자 재희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재희는 디올옴므의 에디 슬리먼이나 라프 시몬스의 라프 시몬스나 이젠 사라진 버버리 프로섬의 크리스찬 베일리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한때 칼 라거펠트가 에디 슬리먼의 감각적인 옷을 입기 위해 무려 사십 킬로그램이나 감량했대요.”


칼 라거펠트란 이름은 안다. 그가 죽자 품속에 있던 고양이 슈페트가 2억 달러를 상속받을지 모른다던 가십 기사를 본 적이 있으니까. 2억 달러가 아니라 2억원만 있어도 재이와 아무런 고민 없이 결혼할 텐데. 그러고 보니 재이는 매번 나를 앞지르면서도 칼 라거펠트의 고양이 슈페트처럼 우아하게 걸음을 옮겼고 매번 나는 생쥐 같이 뒤따라가기 바빴다.


“저 쥐 같나요?”

“무슨 소리예요. 진짜 엉뚱하다니까.”


엉덩이 뚱뚱하지 않아요, 하고 농담하려다가 말았다. 재희와 그 정도로 가깝진 않지, 하고 우리 둘 사이를 갈라놓자 앞으로도 영원히 가까운 사이로 발전할 수 없을 것 같아


“엉덩이 뚱뚱하지 않아요.”


하고 기어코 말해버렸고 재희가 여름날의 메마른 분수대 같이 풉, 하고 터졌다. 바 테이블에 놓인 은빛의 드립포트가 반짝였다. 테이블에 두 팔꿈치를 기댄 나는 커피 향을 맡으며 재희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듣기로 했다. 그중 나름 흥미로웠던 건 에디 슬리먼이란 디자이너는 토러즘을 지향한 게 아니라 남자 또한 여자만큼 아름다워질 수 있으리라 믿었다는 것. 백스테이지에 줄지어 선 빼빼 마른 남자 모델들은 은은한 광채를 내뿜는 실크 위로 스왈로브스키가 촘촘히 박힌 채 광란의 불꽃을 터트리는 블루종 재킷이나 붉은 와인 빛깔이 도는 묵직한 모직 코트를 입고서 런웨이를 걸었다. 나는 마이클 코어스나 도나카란 같은 여성 브랜드도 잘 아느냐고 물었다가 이 모든 건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도 함께 입었다는 재희의 우문현답을 들었다.


“이상하죠. 여자는 남자 옷을 입는데 남자는 여자 옷을 입을 수 없잖아요.”


정말 이상해서 나는 짐짓 고개를 가로젓다가 이내 끄덕였다. 재희가 치마를 입고 트위드 재킷을 입고 레깅스를 입고 블라우스를 입고 펌프스를 신고 리본을 묶고 다니는 건 정말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서 웃음이 터졌다가 이내 머쓱해져 그만 가보겠다며 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자 우리 매장 앞에서 우두커니 선 한 남자가 보였다. 잰걸음으로 다가가 인사를 하고 올려다보니 희긋한 머리칼이 눈에 띄었다.


“할아버지, 옷 보시려고요?”


잠긴 도어락을 얼른 풀어 가게 문을 열어젖혔다. 나는 한 걸음 물러나 주름이 들어간 검정 기지바지에 칼라가 양털로 덮인 카키색 항공점퍼를 입은 채 꼿꼿이 선 할아버지의 늠름한 자태를 응시했다. 재이가 늙으면 꼭 저 할아버지와 닮을 거 같았다. 할아버지는 언제 개업했는지 물었고 나는 아직 얼마 되지 않았다며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이 동네에 이런 옷가게가 있다는 걸 신기해했고 나는 대학가에 할아버지가, 심지어 우리 가게로 들어와 나와 함께 있다는 걸 신기해했다. 그런데 내가 가진 의문은 오래지 않아 풀렸다. 이십 년 동안 동묘에서 구제 가게를 운영했다고. 오랫동안 봐오던 게 보여 걸음을 멈췄다고.


동묘에 가본 적 없지만 전해 들은 게 있어 익히 알고는 있다. 이젠 더 이상 나이 든 사람이 찾는 곳도, 파는 곳도 아닌 시장. 그런 곳은 동묘 말고도 여럿 있다. 익선, 북촌. 망원. 해방. 어른들이 만든 공간, 아니 기억을 내준 공간. 아니 뺏긴 공간. 아니 함몰된 공간. 아니 잘 모르지만 모두 다 잘 알게 되어버린 공간. 하지만 그곳에서 일터를 잃은 어른을 직접 만난 건 처음이었다. 낙원상가나 오래된 공방들이 발길이 끊겨 그대로 사장되었다는 뉴스는 보았어도 구제, 빈티지를 팔아오다가 자신까지 그대로 팔려버렸다는 이야기는 곁에서 가만히 듣고 있어도 거리감이 느껴졌다.


나는 쇼윈도 밖에 놓인 빈 철제의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한날 구급차가 왔다 간 후로 할머니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 소식을 어떤 주민은 다급하게, 다른 어떤 주민은 평안하게 전했다. 그 높낮이가 너무 달라 어느 말도 온전히 믿기지 않았다. 얼마 후 공무원들이 찾아와 골판지 박스 속에 여러 생활 물건들을 담아 챙겨 갔다. 그걸 가지고 어디로 가나요, 하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곧 빈집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간 뒤 소나기가 내렸고 뒤뜰에 내놓은 재고품들을 황급히 안으로 피신시켰다. 재고품들로 매장이 발 디딜 틈 없이 비좁아졌다. 하루빨리 뒤뜰에 차양을 설치해야겠다며 중얼거리는 도중 일곱 번째 인플루언스가 방문했다. 슈프림의 로고 티셔츠 위로 플리스 재킷을 입은 다부진 체격의 남자였다. 남자는 능숙하게 이리저리 위치를 옮겨가며 매장을 촬영했고 자기 역시 빈티지를 좋아하는데 여기엔 자기가 입을 만한 사이즈가 없어 보인다는 아쉬움도 덧붙였다.


“잘 어울리세요.”


촬영을 마친 남자가 매장을 나서며 말했다. 아디다스 슈퍼스타를 신고 아가일 카디건을 걸친 내 모습을 스스로 내려다보다 남자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아직 한 명의 인플루언스가 더 방문할 예정인데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감감했다. 그사이 매장에 바퀴벌레 한 마리가 침입해 재이, 재희 모두 출동했고 나는 발을 구르며 울었고 행거에서 3단 진열장으로, 3단 진열장에서 전신거울로 도망치는 바퀴벌레를 종이컵에 가둬 간신히 잡았다. 그리고 매장 밖으로 방생해준 뒤 혹여나 다시 여기로 돌아올까 전전긍긍하며 가게 문이 여닫힐 때마다 문턱만 응시했다. 바퀴벌레의 진원지는 골목에 있는 배수구였고, 누가 밤마다 그곳에 몰래 음식물쓰레기를 버리고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구청 직원이 출동해 문제의 배수구 주변에 주차된 차량 블랙박스 영상을 확보한 뒤 범인을 검거했는데 우리 점포 건물의 3층에 거주하는 여자였다.


사건을 마무리 짓고 돌아가는 구청직원에게 앞으로 저 여자가 어떤 처벌을 받게 되는지 물었더니 고작 벌금 이십만원이라는 대답으로 돌아왔다. 며칠 뒤 1톤 트럭을 몰고 온 하청직원들이 배수로마다 하얀 연기를 살포한 후로 더 이상 바퀴벌레는 나타나지 않았다. 잠잠한 날들이 이어졌고 개업 후 처음으로 재이와 여행을 떠났다. 경주로 갔고 황리단길에 있는 소품점에서 데이비드 보위의 얼굴이 흐릿하게 그려진 머그컵을 하나 샀다. 그리고 대릉원 쪽을 지나던 재이가 사색이 된 얼굴로 나를 깨워 갓길에 죽은 초록 사체를 봤냐며 물었고, 황급히 차창 밖을 훔쳐본 나는 거북이, 하고 추측했다가 이내 아닌 거 같아 개구리, 하고 정정했다가 또 아닌 거 같아 두꺼비, 하고 말을 돌리자 뭔데 자꾸 바뀌느냐며 핀잔을 줬다. “꼬리가 길었는데 도마뱀 아니야?” 하고 조심스레 말했더니 재이가 깔깔 웃으며 초록 공룡 인형이었다고 놀려 기운이 빠졌고 졸음이 몰려왔다. 숙소로 정한 포항까지 가는 동안 매트리스에 누운 고양이처럼 나는 조수석 시트에 배를 내민 채 잠만 잤다. 십 년 된 소나타였고 크리스마스가 지나가면 십일 년 차가 될 빈티지 소나타였다. 기내 승무원에 합격한 재이가 부천 중고차시장에서 계약한 첫 차였다. 나는 재이의 소나타가 포근했고, 아니 중고차 딜러가 새 인조가죽으로 교체해놓은 조수석 시트가 포근했고 고장만 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영원히 재이가 이 차를 몰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가 비전도 없는 여자란 핀잔을 들었다. 해가 지고서야 우리는 바다 앞에 자리한 숙소에 도착했고 조개구이집에서 모듬조개구이를 시켜 먹었다. 다음 날 한적한 영일대의 편평한 모래사장을 따라 걸었고 출렁이는 수평선을 바라다봤다. 공장 굴뚝들이 수평선 위에 앉아 하얀 연기를 내뿜었다.


“잘한 일일까?”


우리 결혼해야 되는데, 라는 말의 앞머리는 모두 빼먹은 채 재이에게 물어보았다. 파도소리가 모래알에 파묻힌 뒤 산발적으로 튀어 올라 내 귀를 덮쳤다.


“기껏해야 백 년 사는데 하고 싶은 일 해 봐야지.”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걸 낭비하며 산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 기껏해야 백 년인데, 끼껏해야. 하지만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의심과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잘 안다는 욕망 중 어느 하나라도 명확하지 집히는 게 없어 결국 아무런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은 생각을 멈추게 하고, 나는 연역할 수 없고, 무엇이 좋은지 몰라, 좋아, 하고 말하는 순간 무엇이 좋은지 몰라 좋지 않아, 하고 번복하게 되고, 결국 좋고 좋지 않은 건 언어의 간극이 아니라 상황의 온도 같아 이제는 조금 따스해졌다고 말할 여유가 생겼다. 그러자 겨울바람이 파도와 함께 밀려와 매장에 방문했던 할아버지를 데려왔다. 할아버지는 그 일이 좋아서 평생 해왔을까. 좋아한다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좋아한다는 말속에는 사람밖에 들어 있지 않아서 내가 좋아한다고 말할 때면 불쑥 어느 시기 내 마음에 들어왔던 사람들이 두서없이 나타났고 이제는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심지어 싫어진 사람들도 더러 있어 좋아한다는 말을 아끼게 되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할 시간은?”


재이의 물음에 바보 같이 머리로 계산해보았다. 내가 정말 백 년이나 살 수 있다면 앞으로 칠십 년은 재이와 사랑할 수 있겠구나, 하고.


“우주 시간으로 보자면 너무 짧아.”


이 말은 다 이해할 수 없어 나는 파도가 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늘과 닿아 흐릿해진 수평선이 눈에 걸렸다. 바다에는 수평선이 있고 땅에는 지평선이 있는데, 아마 이건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지구본을 교탁에 올려두고 가르쳐준 대로 지구가 둥글기 때문이고, ‘아마’라는 의문을 재기하는 건 실제로 내가 지구 밖을 나가 둥근 지구를 본 적은 없기 때문이다. 내 시선이 닿을 수 있는 끝에 있는 곡선. 수평선, 지평선을 가만히 바라다보면 이 경계를 나누는 게 무의미해졌다. 다가갈수록 딱 그만치 멀어지기에 결코 수평선과 지평선의 끝에 가닿을 수 없고, 이 역시 지구에 속할 따름이다. 어느 경계까지가 지구일까. 중력이 닿는 곳까지 지구라면 달 또한 지구인 걸까.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인력이면 우리는 결국 하나의 덩어리인 걸까. 이경이 그랬다.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 결혼이 잘한 선택이었다며 회상하는 사람은 열 명 중 단 한 명 정도라고. 내가 그 한 명이 되겠다고 단언하자 그 한 명은 배우자와 일찍 사별해서라며 이죽댔다.


마지막 인플루언스는 정연 선배였다. 햄버거게임처럼 겹겹이 쌓아가는 놀이가 시간이라면 가장 아래에 깔려있던 정연 선배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사라졌어야 마땅한데, 내 앞에 멀쩡히 살아서 나타났고 나는 단번에 알아봤다. 무의식적으로 선배, 하고 뱉을 뻔했다가 기애 씨가 시선에 걸려 안녕하세요, 한 뒤 물끄러미 선배를 응시했다. 기애 씨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곧 제대할 아들의 선물을 고르고 있었고 선배는 조용히 혼자 매장을 둘러보았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선배는 나를 앞에 두고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 매장을 둘러보는 선배를 뒤로하고 기애 씨의 옷들을 골라 주었다.


“빈티지라 좋아하겠어요?”


걱정스레 물었더니 기애 씨는 아들이 입는 군복이 빈티지가 아니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훈련받다 보면 사회에서 십 년 입은 거랑 같지, 뭐.”


기애 씨, 휴가 나갈 때 입는 A급 군복은 따로 있어요, 하고 알려주려다가 말았다. 예전에 선배는 이 모든 일급 보안을 내게 알려줬다. 막 제대 후 복학한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선배 역시 자신이 생활한 부대가 비밀공작단인 듯 무용담을 늘어놓길 좋아했다. 한반도의 운명이 자신의 비밀 부대로 시작해 결국 자신의 용단으로 결정 났다는 그런 구원 없는 구원자적인 이야기. 하지만 당시엔 이 무용담이 내겐 영웅담으로 다가와 하늘에서 내려온 슈퍼맨이나 어둠 속에 탄생한 베트맨보단 현실적이라 여겨졌다. 실제로 선배가 묘사한 각개전투에 대해 듣다 보면 내 팔, 다리가 쓰라렸고 혹한기 훈련에 대해 듣다 보면 내 코가 베인 듯 괴로웠다. 그 사이 기애 씨는 몰래 숨겨둔 90년 대 일본 우라하라 신을 휩쓴 베이프의 카모플라쥬 코치 재킷을 찾아 꺼내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들이 머리를 깎으니 꼭 영화 속 원빈과 닮았다며 미소 지었다. 나는 그 옷이 바로 원빈의 원조인 키무라 타쿠야가 입던 거라며 당장이라도 영업하려다가 간신히 참아 넘겼다. 기애 씨가 고른 옷들을 결제하는 동안 선배는 촬영을 끝내곤 SNS 아이디가 새겨진 명함을 데스크에 올려둔 채 가게를 떠났다.


지구를 담다.


SNS에 접속하자 선배의 소개말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깔끔한 정장 차림새였다. 선배가 어느 회사를 다니는지 궁금해 업로드된 게시물들을 훑어 봤지만 사견이 담긴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선배가 인플루언스가 되었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았다. 충분히 그럴 만한 재능이 있고, 그럴 만한 일을 할 거라 상상했으니까. 하지만 나하고 이런 방식으로 마주치게 될 걸 상상하진 못했다. 그럼에도 내가 놀라지 않은 건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찾아온 범인처럼 평온한 얼굴로 무심히 내 인사를 받아준 덕분이었고 오래전 학과 회식자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선배는 한 번 비끗대지 않고 돌아갔다.


선배가 남긴 광고 후기는 단출했다. 빈티지 옷가게 ‘이름’. 미국 빈티지가 유행하는 요즘 흔하지 않은 일본 빈티지를 판매하는 옷가게. 언더커버(UNDERCOVER). 텐더로인(Tenderloin), 네이버후드(NEIGHBORHOOD), 웨어하우스(Warehouse), 요지 야마모토(Yohji Yamamoto), 미하라 야스히로(Mihara Yasuhiro) 등이 있다. 매장을 대표할 만한 옷 여러 벌과 브랜드에 대해 차근차근 소개했다. 어느 문장에도 개인적인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고 오탈자조차 찾기 힘들었다. 이 글을 쓴 선배의 목소리를 상상해 보았다. 나이가 들어도 목소리는 바뀌지 않는다고. 선배는 노화가 제일 느린 부위가 성대라며 일러주었다. 그때의 나는 참 다행이라 여겼다. 시간이 지나 선배의 얼굴이 변하더라도 알아차릴 수 있을 유일한 단서니까. 선배의 목소리는 여전할까. 여전히 온전히 알아듣지 못할까.


선배가 놓고 간 명함 속 연락처는 내게 저장된 번호하곤 달랐다. 그래서 자연히 우리의 연락이 끊겼지만 나는 암호를 해독하듯 레이저 각인된 숫자를 뚫어지게 바라다봤다. 연락해볼까 고심하던 사이 주문한 짝이 하나 왔고 선배도 왔다. 해외 배송으로 날아온 짝을 뒤뜰로 옮겨 분해하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뜰에서 가게 문까지는 멀지 않았지만 나는 그 거리가 허들이 한 백 개쯤 놓여있는 것처럼 아득히 멀어 보였다. 이 모든 걸 하나 빠트리지 않고 뛰어넘어야 과거의 선배와 온전히 만날 수 있을 것 같았고, 허들 하나하나를 뛰어넘으며 올라오는 날숨과 뛰는 가슴으로 인해 이제야 내가 놀라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선배.”


날숨과 함께 힘없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을 뱉어냈다. 선배는 포마드를 바른 말쑥한 스타일로 가게 문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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