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독순 Oct 26. 2024

빈티지가 아닌 빈티지 옷가게(15)

정연

  선배가 자리를 비우면 강의실은 가라앉아 있던 가민이에 관한 이야기로 다시 가득 부유했다. 누구도 가민이와 친분이 없는데 의자가 바닥을 끌며 일으킨 마찰음이나 전공 서적과 필기구가 책상에 닿아 일으킨 충격음처럼 무성하게 튀어 올랐다가 선배가 강의실로 복귀하면 일제히 낙하했다. 그 부유하던 이야기는 결국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라 좋은 말로 시작해 종국에는 선배가 아깝다는 말로 귀결됐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 일면식도 없는 가민이 편에 서서 변호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가해자가 피해자를 동정하는 일 같아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의 삼각관계가 들통난다면 돌팔매를 맞을 대상은 나밖에 없었다. 강의실에 있는 동기들은 둘의 연애 전선에 끼어든 나를 적군 취급할 테니까. 나는 평화군은 아니라도 다른 나라의 영토를 침범한 전범자로 찍힐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엠티 이후로 모든 게 어그러졌다.


  학과생들 모두 가평에 있는 펜션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추진한 엠티에 모두가 달떠 있었고, 선배는 보는 눈이 많아 그런지 나와는 멀찍이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아 갔다. 이경과 붙어 앉아 가는 동안 버스 안에선 다 같이 유행하던 크레용팝의 「빠빠빠」나 산이의 「아는사람 얘기」을 따라 불렀고 음정에 맞춰 어깨를 살랑이다가 설핏 나는 고개를 틀어 선배의 모습을 훔쳐보곤 했다. 선배는 맨 뒤쪽 끄트머리 창가 좌석에 앉았고 그 옆자리로 누구도 앉지 못하게 큰 배낭으로 벽을 쳐두었다. 선배의 저런 자발적인 고립이 멋있다고 생각했고 나와 동기들이 흔한 물이라면 선배는 기름 같았다. 기름은 공룡이 죽어 만들어진다는데 선배 또한 죽었다가 되살아난 기름 인간이 아닐까 상상했고 그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가 재미있다고 느낀 건 항상 피라미드 꼭대기에다 선배를 두어서였다. 내가 좋아하는 감정을 선배는 부정하지 않았고 나의 사과를 받아주었고 서로의 손끝을 잡아보는 감촉 외엔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 아껴주는 선배의 인내에 감동했다가 이내 침전된 의심들이 떠올라 모두 걸러내 보니 가민이의 형상이 어렴풋이 나타났다. 모든 엠티가 그렇듯 술에 술을 타 마셨고 또 술에, 술에, 술을 타 마셨고, 또다시 술에, 술에, 술에, 술을 타 마셔 남녀 할 것 없이 한 방에 같이 드러누워 도마 위에 누운 생선처럼 눈만 끔벅댔다. 우리가 세 번을 건배할 동안 선배는 한 잔만 마셨고 옆자리에 있던 휴지통에다가 몰래 버리기까지 해서 우리 둘은 또다시 제일 취하지 않은 상태로 남게 되었다.


  “평화가 뭐라 생각하니?”


  펜션의 누런 벽지에 기대앉은 선배가 정적을 깨우며 말했고 나는 백열등 안에 죽은 날벌레들을 세어 보며 이렇게 답했다.


  “비둘기요?”

  “그거 알아? 비둘기가 서울올림픽 이후로 번식한 거. 여기가 평화로운 이유야.”


  언젠가 서울올림픽과 비둘기에 관한 가십이 모두 공상허언증 환자가 꾸며낸 가짜 뉴스란 진짜 뉴스를 본 적이 있지만, 선배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모두 사실이고 그럴 수밖에 없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나는 동기들과 캠퍼스를 거닐 때면 내 앞으로 푸덕대며 날아온 비둘기를 가리켜 선배가 알려준 거짓을 여기저기 퍼트렸다. 어느새 이 소문이 다 퍼져 캠퍼스는 비둘기의 성지가 되었고 제발 먹이를 주지 말라는 대자보가 붙었다.


  “아, 평화의 상징이죠.”

  “평화의 상징은 비둘기가 아니라 바로 인간이지.”


  그러면 내가 말한 비둘기에 왜 반응했나 싶었다가 그래도 이게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선배에게 사람 냄새가 느껴져서인데 바로 다음 말로 내 흥을 깨버렸다.


  “그러니까 인간이 없어야 평화로워. 비트겐슈타인의 말장난 같은 거지.”


  아인슈타인은 알아도 비트겐슈타인이란 이름은 들어본 적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웅얼대는 선배의 말을 온전히 알아듣기 힘든 와중에 외국인의 이름까지 난입하자 모든 이야기가 외래어와 뒤섞여 더욱 해석하기가 난해해졌다. 그럴 때면 나는 아, 네, 로 일관했고 선배는 대개 만족해했다.


  “아, 네.”

  “인간은 위험하거든. 태초에 악을 품고 태어난 거지.”


  성악설을 믿진 않았지만 선배만큼은 믿었기에 내가 정말 악인지 의심했고 그러다 보면 이 이야기의 피라미드 제일 아래에 가민이가 깔려있었다. 하나의 피라미드를 완성하기까지 수백 년은 걸린다는데 나와 선배가 쌓아 올린 피라미드는 고작 몇 개월 만에 완공된 터라 이따금 은연중 부실공사가 아닌지 염려되었다. 그럴 때면 선배는 이 순간처럼


  바닥을 짚고 일어나 내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큼지막한 손을 잡고 일어선 나는 산책하자는 선배의 재촉에 응했다. 가을밤은 구름 한 점 없이 캄캄했고 시골 소리가 어둠 뒤에서 났다. 희미하던 어둠은 우리가 발을 내딛는 쪽으로 차츰 선명하게 드러나 돌아갈 길을 잊히게 했다. 빛 공해가 없어 평소 보지 못한 별들이 또렷이 아래로 비췄고 괜스레 나를 감시하는 것 같아 쭈뼛거렸다. 바람은 시원하고 선배의 손은 따뜻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그 이상의 욕심은 부리고 싶지 않았는데 내 손을 잡고 있던 선배의 큼지막한 손이 찰나에 내 골반 쪽으로 옮겨갔다. 순간 선배와 더욱 밀착되었고 내가 여우 짓을 벌인 것도 아닌데 멀리서 여우가 울음소리를 냈다.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렀고 선배는 괜찮다며 내 골반에 작은 버튼이 달린 건지 툭툭 건드렸다. 빛 하나 없이 어두컴컴해서 선배의 외형 대신 낯선 감촉만이 뚜렷이 내 피부결에 닿아 흑마법에 걸린 괴물한테 붙잡힌 게 아닐까 하는 공포가 몸을 휘감아 닭살로 피어났다. 선배는 허락도 없이 계속해서 내 골반을 건드렸고 나는 수치심을 느낄 새 없이 튀어나온 옆구리 살이 선배의 손끝에 집힐까 숨을 꾹 참았다.


  “이언 매큐언이라고 아니?”


  선배의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내 피부에 가닿았다. 외국현대문학사 때 들어본 소설가였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곤 꾹 참던 숨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네.”


  선배의 몸이 이따금 떨렸다. 웃고 있는 걸까, 이언 매큐언을 안다고 대답한 내가 사실 모를 게 분명해서. 아니면 내 옆구리에 삐져나온 군살이 집힌 걸까. 이런 걱정만 하는 내가 한심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선배의 손이 골반 언저리에 걸쳐 있다는 사실보다 내 약점이 발각될까 전전긍긍했다.


  “체실 비치에서는?”

  “잘 몰라요.”


  선배의 화법은 싫다기보다 신기했다. 모든 걸 한 번에 발설하지 않고 스무고개하듯 띄엄띄엄 얹어 물어보는 것. 되물어볼 수밖에 없는 말. 되물어볼 수밖에 없는 말은 말로 역할을 다할 수 없고, 결국 말이 말로 역할을 완수하지 못해 상대가 다시금 다른 말을 얹게끔 하는 일이라 언제나 잘 조탁한 질문이 되어 돌아왔다. 그 질문에는 모서리가 있고 정면이 아닌 사선으로 날아왔고 매번 막을 수 없게끔 내 두 손을 철저히 묶어 두었다. 아니 내 두 손이 묶여 있을 때만 사선으로 날아왔고 그게 나를 맥 빠지게 했는데 이미 선배로부터 완전히 포위당한 상태라 내가 질 수밖에 없는 대답을 스스로 자백하듯 뱉어냈다. 내가 진 걸까. 선배는 이겼다고 포효하거나 내게 연민 어린 시선을 보낸 적이 없다. 그러니까 나는 지지 않았고, 설사 우리의 대화에 있어 내가 패했더라도 항상 이겼음을 공표하지 않던 선배 덕분에 우리의 관계는 공평해 보였다. 교수는 공평하게 입학해 공평하게 등록금을 내고 공평하게 강의실에 앉은 우리를 내려다보며 공평하지 않아 문학이 된 작품들을 나열했다. “앞으로 너희가 배워야 할 것은 공평하지 않은 것들이다.” 교수의 이름은 김주관이었다. 교수가 자리에 없을 때면 우리는 성을 뺀 채 주관이라고 불렀고, 나중에는 이름 따라 주관적으로 산다며 놀렸다. 주관적으로 살아온 사람이 공평하지 않은 것들을 공평하도록 열거하다니. 반대로 선배는 아주 공평했다. 가민이와 나를 두고 공평하게 대해줘서 법원 앞에 선 디케의 저울 같았다. 우리가 저울이라면 선배는 디케랄까. 공평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선 반드시 비교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우리는 저울 위에 놓인 추가 되었다. 한쪽은 나, 다른 한쪽은 가민이. 저울을 든 디케는 어느 쪽으로도 쏠리지 않게 균형을 잘 유지한다. 가민이란 추가 없다면 공평함도 몰랐겠지. 선배는 흑백의 풀밭으로 한 발 내디디며 내 골반을 더욱 꽉 움켜잡았다. 선배 손끝이 살이 아니라 뼈에 닿은 것처럼 딱딱했다. 「체실 비치에서」에 대해 선배가 알려주었다. 첫날밤을 어려워하는 부부의 이야기라고. 담담하게 줄거리를 나열하며 마치 자신도 첫날밤의 경험이 없는 주인공처럼 말의 뒤편에 말을 실어 숨겼다. 실제로 나는 한 침대에 남자와 누워 본 기억이 없고, 그래서 말의 뒤편에 숨겨둔 말을 풀어헤치곤 선배 또한 나와 같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가민이와 나는 아주 공평해 보였다. 나는 이 공평한 저울을 실수로라도 깨고 싶어 가민이하고 잔 게 아니었나요, 하고 추를 하나 더 놓으려다 말았다.


  “아, 네.”


  선배는 크게 숨을 삼키며 말했다.


  “가민이는 좋은 아이야.”


  좋은 아이. 좋은 아이라서 아직 잔 게 아니란 말인 건지, 그래서 내 골반에 손을 댈 수 있다는 건지, 무엇보다 저 아이라는 표현이 무척이나 도드라져 거슬렸지만 내가 어떤 반응할 틈을 주지 않고 선배가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이어나갔다.


  “이제부터 오빠라고 불러.”


  나는 숨을 조금 참았다가 뱉어냈다.


  “네, 선배. 아, 오빠.”

  “둘이 있을 때만.”

  “아.”


  골반에 머물던 선배의 손끝이 우리의 대화와 함께 느릿느릿하지만 분명하게 아래로 조금씩 내려갔다. 골반과 엉덩이가 맞닿는 지점까지 내려왔고 거기엔 커다란 점이 있어 괜스레 들킨 것 같은 창피함에 두 다리가 꼬였다. 어둠은 계속해서 어둡다고 말했고, 그 말들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작은 생명체들의 소리를 빌려 들려왔다. 선배는 차분한 어투로 괜찮은지 물으며 왼편으로 기운 내 몸의 균형을 끌어당겨 붙잡았고 이제는 골반이 아니라 완전히 엉덩이로 손이 향해 있었다.


  “서로가 좋은데 방법을 모른다는 게 엉뚱하지 않니?”


  볼기에 다다른 선배의 손가락이 무른 지점토를 누르듯 내 살 안으로 하나씩 밀어 들어왔다. 아, 선배, 하고 화라도 냈어야 했지만 나는 간지럽다는 구실로 가슴을 뒤로 빼고 허리를 기역자로 굽히며 숙이기 바빴다. 선배는 무슨 아이 달래듯 구부정한 나를 다시 끌어 일으켜 세운 뒤 계속해서 괜찮다며 다독였다. 선배의 뭉툭한 목소리와 날카로운 감촉에 질린 나는 서둘러 빛이 가득한 장소로 피신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밝은 곳으로 자리를 옮겨 선배의 다정한 얼굴을 보아야 진정될 것 같았고, 내 마음속에 스멀스멀 피어나는 알 수 없는 의구심도 거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여전히 선배의 손끝에 베일까 전전긍긍하며 나는 조금도 물러서질 못했다. 선배가 나를 붙잡은 건지 어둠이 나를 붙잡은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결국에 나를 붙잡은 건 나 자신이라 선배 곁을 벗어나질 못하는 일이라 간주했다. 더는 이언 매큐언도, 그가 쓴 소설도 궁금하지 않았고 들이마신 암흑물질이 좁은 식도를 따라 역류해 어지러움이 정수리에 다다라서 빙글 맴돌았다. 머리끝에 닿은 감촉이 머리 안으로 전해졌고 두 팔과 두 다리가 꼬였고 꼬인 틈으로 선배의 손이 마구 비집어 들어와 다시 나를 풀어헤쳐 두 허벅지가 힘없이 벌어졌다. 내가 얼마나 어지럽고 메스꺼운지 선배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였고 오히려 더 집요하게 내 몸속 깊은 곳을 찾아 파고들었다.


  “저, 저 씻지 않았어요.”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왔다. 정말이지 씻기지 않은 말. 어디선가 뚝 떨어져 나온 말. 떠올린 적도 머릿속에서 굴린 적도 없는 말인데 분명 내 입을 거처 나온 거라 의아했다. 꽉 쥔 두 주먹은 어둠에 묶여 있었다. 차라리 선배를 때리거나 스스로 나를 방어했다면 나았을 텐데 내가 쥔 두 주먹은 아무런 대항을 포기한 굴복의 표식에 불과했다.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나를 농락할 수 있고, 나는 순응할 수밖에 없고, 선배는 이 모든 걸 꿰뚫어 본 어둠의 신이 되어 내 몸을 마음대로 주물러 유린하며 완력을 조절했다. 선배의 힘이 내 몸 안으로 깊숙이 전달되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자기장이 뿜어져 나온 듯이 나를 구성하는 모든 세포가 일정하게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했고 결국 두 주먹 안으로 모조리 흘러 들어가 압축되었다.


  “괜찮아.”


  선배의 손놀림은 더욱 바빠졌다.


  나는 심장이 아팠던 적이 없다, 기억이 없으니. 하지만 엄마는 매해 운동회를 앞둘 때면 담임교사에게 당부해 나를 열외시켰다. 나는 파란 슬레이트로 된 차양 아래 깔린 석조 계단에 앉아 흙먼지가 날리는 운동장에서 뙤약볕을 맞으며 행사를 준비하던 또래들의 율동이나 대열을 구경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아픈 것도 아닌 데다 왜소하기는커녕 살이 찔 대로 쪄서 가슴보다 배가 봉긋했고 반 아이들은 운동하기 싫어 별 꾀병을 다 부린다며 내 등 뒤에다 대고 속닥거렸다. “그러니까 살이 찌지.” “혼자 쉬니까 좋은가 봐.” “공부도 못하잖아.” 도대체 살이 찐 게 공부와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모르지만 따돌림을 당하던 친구들은 대개 공부도 못한 게 사실이라 공부를 못해서 살이 쪘고 남들 다 하는 운동조차 못 하는 못난 인간이 되었다며 자책하고 원망했다.


  외롭진 않았다. 공룡 알 모양으로 된 다마고치와 그 시절을 함께 보냈으니까. 내가 키운 아기 공룡의 이름은 양양인데 하트 모양의 심박이 빠르게 올라가면 닭고기를 주거나 산책을 보냈고 그러면 어느새 정상범주로 돌아와 흑백 픽셀로 껑충 뛰며 나를 반겼다. 중학생이 되던 때 양양은 죽었고 뒷산에 묻어주며 나중에 부화해 내 곁으로 돌아오길 바랐다. 중학생 내내 나는 교복이 맞지 않아 체육복 바지를 입거나 남자 교복 바지로 대체해 입고 다녔다. 교장이 살찐 내 몸을 위아래로 훑고는 치마가 아닌 바지를 입도록 허락해 주었는데 이걸 허락까지 받으며 입어야 하는 일인지 이해되질 않았다. 교무실을 나와 복도를 걷자 이 커다란 학교 안에 나 혼자 놓인 것 같았고, 나를 스쳐 가는 아이 중에 단 한 명도 내 편은 없는 것 같았다. 유일한 내 편이었던 양양은 이미 죽어 뒷산에 묻혔기에 대신 심실중격결손증을 판별한 일면식도 없던 의사와 걱정을 전염시킨 엄마를 탓하기로 작심했다. 엄마의 과도한 염려가 내 몸을 지방 덩어리로 만든 거라고. 엄마가 출근하고 나면 티브이 서랍장 속 빨간 장지갑을 꺼내 돈을 훔쳐 곧 사라질 것들을 사곤 했다. 나중엔 간이 커져 보석함에 든 예물까지 손을 댔다. 그걸로 반 아이들에게 햄버거와 콜라를 사 주고 돈이 남으면 하교 때 우연히 마주친 아이들에게 분식까지 쏘며 환심을 샀지만 돈이 다 떨어지고 나면 금방 소원해졌다. 그런데 기적인지 아니면 신진대사가 늘어서인지 고등학생 때부터 체중이 줄기 시작했다. 그 후로 명절이 돌아올 때마다 친척들은 매번 몰라보게 살이 빠졌다며 자지러졌고, 수학능력평가 시험 전날 일찌감치 이불속에 들어가 누운 나는 내 인생이 마츠코―「혐오스런 마치코의 일생」―처럼 마냥 불행한 결말로 치달을 것 같진 않음을 직감했고, 동시에 내가 영화 속 비련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자각했다. 정말이지 극적으로 불행하지도, 극적으로 행복하지도 않아 위로를 받거나 시샘 또한 살 수 없어 내 인생이 아주 평범해졌다는 사실이 그때는 괜스레 서글펐다.


  살이 빠진 나는 극적이지 않게 2지망에 지원한 대학교에 입학했다. 교내 강당에서 진행된 입학식에서 이경은 내 앞자리에 서 있었다. 초록의 단발머리라니. 나는 보자마자 「판타스틱 소녀 백서」의 이니드가 떠올랐다. 이경은 내가 사랑하는 이 영화를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염색까지 한 거라며 고백해 우리는 친해졌다. 오티에 함께 참석했고 술을 마셨고 서로에게 기댄 채로 잠이 들었다가 다음 날 이른 아침 허옇게 뜬 서로의 입술을 마주 보며 깔깔댔고 조금 더 친해졌고 우리는 B동 B층 기숙사로 배정받아 함께 생활했고 첫 학기 학점도 똑같이 B를 맞아 좌절하며 두 손을 서로 맞잡은 채 위로했다. 학기 내내 붙어 다녔는데 이경과 함께 있을 때면 내가 펑크족이나 ‘빌리진’이 되어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며 해명해야 할 일들이 산발적으로 벌어졌고 그게 마냥 싫지 않았다. 흰 피부의 이경은 더욱 희다는 착각에 빠지게 했는데 그건 생기 가득한 미소 덕분이었고 나는 토마토 젤리가 떠올랐다. 이경은 눈, 코, 입 가릴 거 없이 모두 자그마한데 반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때만큼은 풍선처럼 한껏 부풀어 올랐다가 일순 뻥, 하고 폭소가 되어 터졌고 따라 웃음 짓게 했고 결국 모두의 호감을 샀다. 덕분에 나의 학과 생활은 수월했고 인생이 이렇게나 잘 풀려도 되나 염려돼 이따금 이경을 멀리 두려고 의식했는데 둔한 이경은 하나 몰랐다.


  선배의 존재를 알게 건 학기가 시작된 지 꽤 지나서였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아빠가 철근에 정수리가 찧어 한동안 집에서 요양하는 바람에 개학을 앞둔 나도 거의 밖을 나서질 못하고 병간호만 했다. 엄마는 집 앞 프리마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했고 한 번씩 나를 업장으로 불러내 유통기한이 다한 인스턴트 죽이나 팩 두부를 챙겨주었다. 그걸 레인지로 데운 뒤 플라스틱 쟁반에 담아 아빠에게 가져다줬다. 아빠는 늘 끝이 닳은 사각팬티와 목이 늘어진 누런 러닝셔츠를 입고서 스프링이 왼쪽으로 내려앉은 침대 위에 비스듬한 자세로 누워 내가 건넨 쟁반을 침구 오른편에 둔 채로 티브이만 봤다. 티브이에는 검찰 포토라인 앞에 선 대통령이나 청문회에 출석한 예비 장관들이 멀끔한 차림새로 아직 죄인도 아닌데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낙담하고 있었다. 고개를 빳빳이 든 아빠는 그들을 심판할 자격을 갖춘 능력자라도 된 듯이 노려보며 가늠했고 내 눈에는 그게 이상하리만치 우스꽝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이경은 우리 집 앞까지 나타났다. 나는 추레한 우리 집 안으로, 그러니까 벽지 위로 벽지를 덮어 벽지가 된 너저분하고, 깨진 창틀 위로 박스테이프 질을 해둔, 엄마와 아빠는 각방을 쓰고, 그래서 안방이 사라진 엄마가 거실 가장자리에 화장대를 차린, 가족이란 정의에 묶여 살아가는 누추한 이 공간을 보여주기가 창피해 병문안을 온 이경에게 아빠는 진작 다 나았는데 농땡이를 피우고 싶어 아직 학교에 가지 않는 거란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걸쇠가 걸린 현관문 앞에 선 이경은 둔했고 자유로운 내가 부럽다며 문틈 사이로 웃어 보인 뒤 꽃다발을 안으로 우겨 넣곤 무심히 돌아갔다. 병문안에 꽃다발이라니. 물병에 넣어둔 꽃이 시드는 만큼 아빠가 조금씩 나아 나중엔 한 다발이 다 시들자 건설 현장에 복귀했고 나도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선배, 이거 드세요.”


  과대표는 자판기에서 꺼낸 음료를 선배에게 건넸다. 막 복학한 선배의 얼굴이 흐릿하다가 점점 선명하게 내 눈에 들어왔다. 날렵한 눈매인데 얼마 도망 못 가 포획된 어린 사슴같이 눈가가 촉촉했고 부드러운 얼굴선과 어울리지 않게 마초적인 국방색 방한 내피와 군화를 신고 있었다. 따로 떼어두면 촌스러운 게 분명한데 동기들과 섞여 있을 때면 누구보다 근사해 보였다. 단순히 선배의 외향만이 아니라 강의실에 앉아 빈 곳을 응시하거나 프랑스문학사를 다룬 교양수업 시간엔 교수가 읊던 랭보의 시성보다 맨머리―감각, 랭보―를 잘 씻겨주었다. 나는 노트에다 선배의 이름 대신 니나―니나의 재치 있는 대꾸, 랭보―라고 써 보았다.


  니나는 잘 웃지 않는다.

  니나는 잘 걷지 않는다.

  니나는 잘 먹지 않는다.


  그래서 니나가 좋다는 말도 안 되는, 일말의 문학적인 감성이나 타성조차 젖지 않는 말들을 적어두었다. 한날 이경이 그랬다.


  “와, 정연 선배가 입으니까 빈티도 빈티지가 되네?”


  그제야 나는 선배가 입은 모든 옷이 빈티지란 사실을 알았고 그 이질적인 단어를 검색해 보았다. ‘물질적 풍요와 달리 정신적 황폐함을 느끼는 현대인의 소외감을 표현한 것’이라는 문구가 가슴에 가닿았고 그게 곧 정연 선배, 아니 니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학과 건물은 우리의 입학 시기와 맞춰 개관해 집기와 시설 들이 신식이었다. 다른 학과의 학생들은 유압식 소형 장애인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우리 본관 건물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정작 장애인이 없는 우리 본관에 설치된 무용한 엘리베이터는 교수와 외부에서 초빙된 강사만이 이용 가능한 전유물이 됐다. 그래서 전공 수업이 4층이나 5층에 있을 때면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올 교수를 애자새끼라며 비하했다. 모두 뒤에서 욕지거리를 할 때 그 엘리베이터를 유일이 이용한 학생이 선배였다. 우리가 전공 서적을 팔에 끼고 힘겹게 로비 계단을 따라 걸어 올라가는 동안 선배는 도도하게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상승 버튼을 누르곤 뒷짐을 진 채로 서 있었다. 한 번은 올려다보던 선배와 내려다보던 내 눈이 마주쳐서 민망했고 황급히 나는 한 손으로 벌어진 테니스 스커트 밑단을 끌어모았다.


  “괜찮아.”


  선배의 목소리는 내 귀에 닿자마자 중력에 순응하며 미끄러져 내렸다. 선배는 묻지도 않았는데 괜찮다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고 나는 계속해서 미끄러져 내렸다. 마치 똑같은 한마디만 무한 재생되는 인형처럼 아무런 영혼이 깃들어있지 않았다. 테니스 스커트의 밑단이 위로 말려 올라가 꼬리뼈에 닿아 있었다. 밝은색의 속옷을 입었는데 다행히 빛이 없어 눈에 드러나 보이진 않았다. 풀이 밟히는 소리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올 때마다 선배의 손이 내 몸속 깊숙한 곳을 훑고 지나갔다. 가민이가 떠올랐고 멈춰야 하는데 여전히 두 주먹을 꾹 쥔 채로 선배가 멍청하지 않을 거라며 과부하에 걸린 컴퓨터처럼 잔뜩 열만 토해냈다. 내가 아는 선배는 행동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인데, 아니 한 번도 선배가 책임질 만한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가민이는 알아요? 가민이에게도 이래요? 이랬어요? 아니죠? 이 말들은 선배에게도 가민이에게도 가닿진 않았다.


  “선배, 저 취했어요.”


  머릿속을 스쳐 가는 물음들을 연발한 뒤 또다시 머리를 거치지 않은 한마디가 튀어나와 정말이지 내가 취한 듯 느껴졌다. 나는 엉거주춤 몸을 뒤로 빼면서도 선배한테 미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해 죄인처럼 납작 엎드렸다. 미안하다가 미안하다를 덮고 또다시 미안하다가 미안하다를 덮고를 반복해서 더는 미안하다란 말이 주는 의미가 또렷이 드러나지 않았다. 선배는 그 순간에도 괜찮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괜찮아, 미안해요, 괜찮아, 미안해요, 괜찮아, 미안해요, 괜찮아, 미안해요, 괜찮아, 미안해요, 괜찮아, 미안해요, 괜찮아, 미안해요, 괜찮아, 미안해요, 괜찮아, 미안해요, 괜찮아, 미안해요, 괜찮아, 미안해요, 괜찮아, 미안해요, 괜찮아, 미안해요……. 멀리서 보면 우리 둘의 대화는 무척 예의 발랐다.


  선배의 손길이 멈춘 건 내일 밝은 곳에서 따로 하자는 나의 애원에서였다. 만약 선배와 첫날밤을 갖게 되더라도 풀숲은 싫었고, 무엇보다 어지럽고 메스꺼운 이 상태를 당장 벗어나고 싶었다. 어서 밝은 장소로 이동해서 선배의 다정한 얼굴을 봐야 내가 원하지 않던 일을 원하게 되었다며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허벅지까지 말려 내려간 팬티를 끌어 올린 뒤 스커트 밑단을 정리했다. 선배는 한 발 뒤로 물러나 내가 매무새를 고칠 동안 입안 가득 밤공기를 삼켰는데 그 숨소리가 짐승의 포효같이 무섭게 퍼져 나갔다.


  “좋아해.”

  “네.”

  “좋아해서 그런 거야.”

  “알아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는 대뜸 안다고 대답했다.


  “그만 돌아가자.”


  돌아갈 땐 선배가 나보다 한 걸음 앞장섰다. 펜션과 가까워질수록 선배의 형체가 조금씩 선명해졌고 어느새 내가 알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게 이질적이었다. 유압식 소형 장애인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선배처럼. 펜션 현관 앞에 서자 센서등이 노랗게 켜졌다. “선배.” 나지막이 불러보았다. 현관문 손잡이를 잡은 선배가 내게로 몸을 틀었다. 겁박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거듭 미안하다며 눈시울 붉혔고 선배는 괜찮아, 하고 내 머리끝을 꾹 눌러 쓰다듬었다. 이 모든 순간이 무척 가볍고 빠르게 흘러갔다.


  다음날 우리는 펜션 근처 식당에서 해장국을 먹고 자라섬으로 갔다. 자라섬에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지난밤 풀숲에서 선배와 나눈 행위를 곱씹어 보았다. 현실의 선배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고 무리와는 떨어진 채로 공전하며 걸었다. 이경은 눈치 없이 고독한 남자가 좋다며 무리의 끝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선배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재잘댔다. 진열장 속 장신구를 탐내며 뱉어낼 만한 감탄사가 이경의 입에서 아무런 의욕 없이 흘러나왔다. 빈 감탄사. 가진 게 없는 내가 받던 감탄사는 매번 김이 빠져 있고 조금도 나를 앞서 있지 않아 미래 역시 없었다. 탐내지 않았다면 미래의 나는 지금보다 나았을까. 선배는 여전히 무리의 뒤편에 머물며 과거에 함몰되어 있었다. 과거의 선배를 훔쳐보며 쇄골 아래 빛날 장신구를 목에 찬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과연 목에 찬 채로 도망치진 않을까. 미래의 나는 도둑일 게 분명한데 지금 나와 같은 공모 의식을 선배도 느끼고 있을지 궁금했다.


  엠티의 끝이 가까워질수록 나의 죄의식은 짙어져 갔다. 그만큼 선배의 죄의식은 옅어져 가는 모양새였다. 약속을 한 건 나 혼자라서 지키거나 지키지 않거나 결국 도덕적인 책임은 나만 짊어져야 했다. 선배는 사과 대신 괜찮다는 포용을 베풀었고 다시 한번 내가 약속을 어긴다면 이젠 관용을 잊은 폭군이 되어 나를 배격하게 될까 겁이 났다. 모두 크레용팝의 「빠빠빠」나 산이의 「아는사람 얘기」를 버스 안에서 따라 부를 동안 나는 괴로운 마음에 잠든 척 눈을 감았다. 이 모든 게 꿈이라면 좋을 텐데 눈을 뜨자 나만 빼고 모두 꿈속으로 간 듯 적막했다. 운전기사는 천천히 가도 될 길을 두 번이나 신호를 위반하며 예정보다 이른 시간에 우리를 학교 본관 앞에다 내려놓았다. 버스에서 내리자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았고 자라섬에서 눈길도 주지 않던 선배가 빤히 나를 응시해 뒤통수가 따가웠다. 조교는 남은 식료품은 학과사무실에 둘 테니 알아서 이용하란 공언만 남기고 멀어졌는데, 순간 아무 수업이나 개설해 동기들과 나를 붙잡아뒀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다들 뿔뿔이 흩어졌고 나도 이경과 기숙사로 향했다. 나는 짐을 풀고 누워 침구를 껴안았다. 잠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모랫구멍에 빠진 듯이 침대 위에서 허우적댔다. 얼마간 지났을까, 선배로부터 메시지가 한 통 날아왔다. 중앙 도서관 계단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어디 가냐는 이경을 뒤로 한 채 겉옷을 챙겨 입고 기숙사를 나와 중앙 계단에 도착하자 선배가 한 칸씩 계단을 사뿐히 내려와 대출한 책이라며 건넸다. 지난밤 알려준 이언 매큐언의 「체실 비치에서」에서였다. 이후로 선배의 뒤를 따라 걸었다. 지하철에서 내린 뒤 버스를 두 번 환승하며 나는 선배의 자취방을 상상했다. 작지만 모든 게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을 방.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 몸을 눕히자 피로가 몰려왔고 가만히 쉬고 싶은데 선배는 쉬지 않고 말을 걸어왔다. “백 년 뒤 여기가 얼마나 바뀔까?” “과연 존재하긴 하는 걸까?” “존재하지 않는 우리가 존재에 대해 말할 자격이나 있는 걸까?” “사랑이란 게 존재할까?” 같은 오래가지 않아 휘발될 말들. 어느새 우리는 백 년 뒤에도 가지 않을 것 같은, 우리의 존재를 물을 수밖에 없는, 사랑만큼은 없을 게 당연해 보이는,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허름하고 좁고 네온사인 불빛으로 점철된 모텔 방 안에 있었다.


  고작 여길 오기 위해 지하철과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탄 게 이해되질 않았는데 왠지 이 공간만큼은 선배와 제법 어울려 보였다. 눅눅한 침구 위에 걸터앉은 선배가 가만히 나를 쳐다봤다. 실온에 맞춰 돌아가는 난방기 소음이 내 귓속을 채웠다. 침구 위에 걸터앉은 선배가 갑자기 야수가 돼서 내게로 돌진하거나 나를 유린하며 위압감을 주진 않아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가 이내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 이상한 기분은 해결될 틈도 없이 내가 입고 온 옷들을 자의적으로 하나둘 벗겨 내렸고 그건 전적으로 피라미드 꼭대기에 선배를 올려둔 내 잘못이었다. 나머지 시간은 아주 짧고 빠르게 흘러가 우리는 없고 공간만 존재했다. 그리고 다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지하철에서 내린 뒤에야 선배와 무사히 헤어질 수 있었다.


  중앙 도서관 계단을 지나쳐가는데 눈물이 났다. 한 손에는 내가 원한 적 없던 책을 쥐어져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러 걷기 어려웠다. 이경이 봤다면 왜 이리 어정쩡히 걷느냐며 나를 놀릴 게 분명했다. 가민이가 떠올랐고, 아니 피라미드의 바닥에 깔린 가민이를 어정쩡히 밟고 올라선 내가 상상되었고 그러자 눈물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올라왔다. 눈물이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치고받아 시야가 수평을 그리며 흐릿해졌다. 이후 선배와 나는 자주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그 허름한 모텔을 찾았다. 선배가 준 책의 반납 예정일은 한참 지나버렸다. 모텔에 가는 빈도가 잦을수록 선배에게 요구할 권리는 흐릿해졌다. 그러나 하나는 선명해졌다. 용기가 없다, 선배는. 용기가 없어 모든 말에 힘이 없다. 힘이 없으니 끝맺을 수도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품은 이 용기에 관한 확신이 뚜렷해졌고 그만큼 익숙해져 갔다.


  “선배.”


  그 미래의 끝에 서서 선배는 과거의 형상 그대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모든 게 부스러지듯 추운 날이었다.

이전 14화 빈티지가 아닌 빈티지 옷가게(1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