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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독순 Oct 26. 2024

빈티지가 아닌 빈티지 옷가게(14)

  모두가 일 초 뒤를 위해 살아가고 그 일 초가 쌓여 일 분이 되고 일 분이 쌓여 한 시간이 되고 한 시간이 쌓여 하루가 되고 하루가 쌓여 일 년이 된다는 연속적이고 불가항력적 이야기. 햄버거 게임처럼 겹겹이 쌓아가는 놀이가 시간의 축척이라면 가장 아래에 깔린 건 언젠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끔 말끔히 사라져야겠지. 매주 직사각형 모양으로 압축되어 검은 바다를 건너 날아오는 짝들처럼. 옷의 생명이 소멸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거치야 할 종착지가 이곳, 빈티지 옷가게.


  빈티지≠오래되어 가치 있는 것.

  빈티지=가치 있어 오래된 것.


  한가한 오후. 손님이 올 확률이 가장 희박한 낮 네 시. 어렴풋이 재희가 알려준 칸트처럼 그 시각에 맞춰 나는 호기롭게 발을 떼며 산책하고 목소리 없는 음악을 들어본다. 예전의 나라면 시도 때도 없이 재이에게 연락해 붙잡아뒀을 텐데 이제는 일정량 내 시간을 분배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재이의 업무가 불규칙한 탓도 있었다. 라오스. 도쿄. 삿포로. 괌. 호치민. 다낭. 하노이. 방콕. 치앙마이. 푸켓. 부정기선으로 하와이까지 날아가는 재이. 짧게는 수백 킬로미터에서 길게는 수천 킬로미터까지 떨어져 있는 재이가 처음에는 신기했고 저토록 먼 거리에서도 우리의 연락이 닿아 사소한 메시지까지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이제 해치 닫힌다.

  응.

  여덟 시간 뒤에 보자.

  안녕.


  대화를 주고받다가도 호노롤루에서 코나커피를 마실 재이를 상상하면 무심결에 평행우주이론을 믿고 싶어졌다. 하와이에 머무는 재이의 몸과 달리 지금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재이의 목소리가 어쩌면 바로 내 옆에 있는 실재 같아서. 무엇이 주체일까. 몸, 목소리. 나는 철학을 모르고, 아니 철학을 모른다고 믿지만 내가 절대 다가갈 수 없을 거리에 모든 감정을 내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상기될 때면 데카르트가 되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 대로 카페 루프탑에서, 시끄러운 도로 옆 인도에서, 페인트가 닳아 갈라진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집으로 돌아와 침구 속에 누워 재이의 목소리를 내 귀에다 꽂아본다. 멀리 떨어져 있어 가까웠고 가까워 멀리 둘 수밖에 없었다. 등잔 밑이나 놓치는 머저리라며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살다 보니 가까운 만큼 딱 그 정도로 멀어진다. 우리 엄마 이름은 뭘까. 양희숙. 우리 아빠 이름은 김태원. 티브이에 나오는 기타리스트 김태원은 깔깔대며 많이도 불러봤는데 정작 아빠의 이름은 불러본 기억이 없다.


  김태원. 태원 씨. 양희숙. 희숙아, 라고 불렸겠지, 아마 누군가에겐 여전히 불리고 있겠지. 누구에게도 자신의 이름이 불리지 않는 순간 죽어버리겠지. 그래서 재이가 지어준 이 옷가게의 이름이 ‘이름’으로 결정된 거라며 스스로 명령 내려 본다. 재희는 칸트의 묘비명을 따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면, 너에 대해 자주 그리고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더 큰 신뢰와 믿음을 채우는 두 가지가 있어. 그건 내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과 그 아래 너를 향한 사랑”이라고 고백한 자신의 기억을 여기로 데려왔다. 입대를 한 달 앞둔 재희는 한 여자와 고수분지로 갔고 바람이 살랑이던 밤하늘 아래에서 고백했다. 나는 물어보았다.


  “그래서 성공했나요?”


  재희는 아무런 기색 없이 별이 되었다고 대답했다. 처음에는 예술병에 빠진 환자인 줄 알았는데 죽음에 대한 은유란 사실을 깨닫자 부끄러움과 동시에 재희에게 순간 빨려들 것 같은 강한 매혹을 느꼈다. 매번 산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들러 비엔나커피를 주문했고 디귿 자 모양의 바 테이블을 경계 삼아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금세 시간이 쌓여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 내 기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숙고하면 할수록, 점점 더 큰 경탄과 외경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 법칙. 이 말은 칸트의 묘비에 새겨져 있어요.”


  그 묘비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았고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다며 재희가 알려주었다. 언젠가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는 빈티지를 짝으로 받아와야지, 하고 생각했다, 나는. 그리고 이 순간이 행복하다 여겼고 이 행복이 어디서부터 발화하는지 머그잔에 대고 물어보았고, 일본에서, 동남아시아에서 비행기 화물칸에 실려 여기까지 날아온 짝을 분해했을 때 건질 만한 옷들이 나온 순간이라는 대답을 얻었다. 처음에는 뭣도 몰라 짝에 봉인된 의류를 모조리 풀어헤쳐 세탁한 후 진열하기 바빴는데, 이제는 나머지 절반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그러니까 정말이지 의류의 종착지가 빈티지 옷가게고, 내가 장의사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그 순간이 가장 숭고했다. 앞으로 몇 년은 더 살려줄지, 아니면 그만 보내줄지. 내가 그만 보내준다면 그 옷들을 입고 지구란 행성을 왔다 간 수천억 명의 영혼이 다시금 그것들을 꿰고 얽고 지어서 입게 되는 걸까.


  “재희 씨는 어떤 옷을 좋아해요?”

  “라프 시몬스요.”


  라프 시몬스는 몰라도 시몬스 침대는 잘 알아서 아주 비싼 브랜드일 거라 추측했다.


  “2RP 정도 하나요?”

  “네?”

  “그런 게 있어요.”


  나만의 단위를 숨긴 채 짧게 웃자 재희는 따라 웃고는 디올옴므의 에디 슬리먼이나 라프 시몬스의 라프 시몬스나 오래전 끝난 버버리 프로섬의 크리스찬 베일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칼 라거펠트가 에디 슬리먼이 만든 감각적인 재킷을 입기 위해 무려 사십 킬로그램이나 감량했다는 사실 알아요?”


  칼 라거펠트란 이름은 안다. 그가 죽자 품속에 있던 고양이 슈페트가 2억 달러를 상속받을지 모른다던 가십을 본 적 있으니까. 2억 달러가 아니라 2억원만 있어도 재이와 아무런 고민 없이 결혼할 텐데. 그러고 보니 재이는 매번 나를 앞지르는데도 고양이 슈페트처럼 우아하게 걸음을 옮겼고 매번 나는 짧은 다리를 휘저으며 보폭을 맞추기 위해 생쥐같이 요란하게 쫓아갔다. 그런데 톰과 제리라고 불리기엔 재이의 생김새가 오히려 순한 제리를 닮아 나는 조금 억울했다.


  “저 쥐 같나요?”

  “무슨 소리예요. 진짜 엉뚱하다니까.”


  엉덩이 뚱뚱하지 않아요, 하고 농담하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재희와 아직 그만큼 가깝진 않지, 하고 우리 둘 사이를 갈라놓자 앞으로도 영원히 가까운 관계로 발전할 수 없을 거란 불안감에


  “엉덩이 뚱뚱하지 않아요.”


  하고 기어코 뱉어버렸고 재희가 커피를 내리다 말고 메마른 여름날에 분수대가 터지듯 풉, 하고 터졌다. 바 테이블에 놓인 은빛의 드립포트가 반짝였다. 어깨를 목 힘으로 당겨 테이블에 두 팔꿈치를 기댄 나는 커피 향을 맡으며 재희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듣기로 했다. 그중 나름 흥미로웠던 건 에디 슬리먼이란 디자이너는 페미니즘을 지향한 게 아니라 남자도 여자만큼 아름다워질 수 있으리라 믿었다는 것. 근육을 만들지 않아 빼빼 마른 채로 런웨이 백스테이지에 줄줄이 서 있던 어린 남자 모델들은 은은한 광채를 내뿜는 실크 블루종 위로 스왈로브스키가 촘촘히 박혀 광란의 불꽃을 터트리는 재킷이나 적포도주 빛깔을 머금은 무거운 모직 코트를 입고 있었다고 묘사했다. 재희는 그런 묘사를 실감나게 잘했고, 나는 마이클 코어스나 도나카란 같은 우먼 브랜드도 잘 아느냐고 물었다가 이 모든 건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함께 입었다는 우문현답을 받았다.


  “이상하죠. 여자는 남자 옷도 입는데 남자는 여자 옷을 입진 않잖아요.”


  정말 이상해서 나는 짐짓 고개를 가로젓다가 이내 끄덕였다. 재희가 치마를 입고 트위드 재킷을 입고 레깅스를 입고 블라우스를 입고 펌프스를 신고 리본을 묶고 분홍을 곁들여 다니는 건 정말이지 상상할 수 없어 웃음이 터졌다가 이내 머쓱해진 나는 그만 가봐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카페를 나와 모퉁이를 돌자 우리 매장 앞에서 한 남자가 서성이는 실루엣이 보였다. 잰걸음에 다가가 인사를 하곤 올려다보니 노인이었다.


  “할아버지, 옷 보시려고요?”


  할아버지는 매장 안에 진열된 의류와 액세서리를 밖에서 뚫어지게 구경했다. 나는 서둘러 도어락을 풀고 문을 열어 안내했다. 한 걸음 물러난 나는 품 넓은 정장 바지 위로 카키색 항공점퍼를 입은 채 꼿꼿이 선 할아버지의 늠름한 자태를 응시했다. 왠지 나이가 들면 재이가 꼭 저 할아버지와 닮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언제 개업했는지 물었고 나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동네에 이런 게 있다는 걸 신기해했고 나는 대학가에 할아버지가, 심지어 가게에 들어와 빈티지를 훑어보고 있다는 걸 신기해했다. 그런데 의문은 오래지 않아 풀렸다. 이십 년 동안 동묘에서 구제를 팔았다고. 자기가 팔던 게 여기에 보여 발길을 멈췄다고.


  동묘에 가본 진 오래됐지만 전해 들은 게 있다. 이젠 더는 나이 든 사람이 찾는 곳도, 파는 곳도 아닌 시장. 그런 곳은 동묘 말고도 여럿 있다. 익선, 북촌. 망원. 해방. 어른들이 만든 공간, 아니 기억을 내준 공간. 아니 뺏긴 공간. 아니 함몰된 공간. 아니 모르지만 모두 다 알게 되어버린 공간. 하지만 그곳에서 일자리를 잃은 어른을 직접 만난 건 처음이었다. 낙원상가나 오래된 재단실들이 발길이 끊겨 그대로 사장되었다는 뉴스는 보았어도 오랜 시간 구제, 빈티지를 팔아오다가 자신까지 그대로 팔려버렸다는 이야기는 도무지 곁에서 가만히 듣고 있어도 거리감이 느껴졌다. 노인과 구제. 빈티지와 노인. 어느 하나 어울리지 않는 건 구제와 빈티지는 그대론데 수요자가 달라져서일까. 모르지만 구제와 빈티지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게 분명했다.


  침을 삼키며 돌아가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자 괜스레 마음이 편치 않아 나는 크롬으로 된 윙 배지를 하나 선물로 드렸다. 재이는 항상 유니폼에 이 윙 배지를 달고 비행을 떠났다. 나는 쇼윈도 밖 빈 철제의자를 쳐다봤다. 한날 구급차가 온 뒤로 치매 할머니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 소식을 어떤 주민은 다급하게 전했고 다른 어떤 주민은 평안하게 말했다. 그 높낮이가 너무나 상이해 어느 말도 온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뒤로 공무원들이 찾아와 골판지 박스 속에 할머니가 입던 옷가지와 여러 생활 물건들을 담아 챙겨 갔다. 그걸 가지고 어디로 가나요, 하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기회를 놓쳤고 빈집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간 뒤 소나기가 내렸고 뒤뜰로 빼놓은 재고품들을 급히 매장 안으로 피신시켰다. 꿉꿉한 냄새가 맨살에 달라붙은 채 땀이 되어 흘렀고 매장 안이 재고품들로 가득 차자 발 디딜 틈 없이 비좁아졌다. 하루빨리 뒤뜰에 차양을 설치해야겠다고 다짐하던 사이 일곱 번째 인플루언스가 방문했다. 슈프림의 박스 로고 티셔츠와 플리스 재킷을 입은 다부진 체격의 남자였다. 그는 재고품들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구도를 잡아 촬영했고 여기엔 자기가 입을 만한 사이즈가 없어 보인다며 아쉬운 소리도 덧붙였다.


  내가 빈티지를 포기한 이유 중 하나기도 했다. 짝을 분해하다 보면 빈티지엔 황금 사이즈가 드물다는 걸 알게 된다. 아주 크거나, 아주 작거나, 둘 중 하나다. 아주 작은 체형의 사람은 둘 다 입을 수 있고 아주 큰 체형의 사람은 하나만 입을 수 있겠지. 나처럼 어중간한 데다 몸매까지 받쳐주지 않는다면 빈티지를 고르다 늙어버려 인간 빈티지가 된다. 백화점에 가면 삼십 분이면 끝날 쇼핑을, 기우제를 지내듯 자기에게 맞는 사이즈가 마른하늘에 쏟아지길 기도하며 뒤적여야 한다는 점에서 나는 SPA 브랜드를 입고 일하지만 지나치게 깨끗해 보이면 안 될 것 같아 표백제를 한가득 풀은 대야에 새 옷들을 담가 물을 뺐다.


  “잘 어울리세요.”


  남자가 말했다. 나는 아디다스의 슈퍼스타를 신고 모헤어 소재의 아가일 패턴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뒤이어 남자는 블랙스타에 대해 물어왔고 내가 먼저 함께 후기로 실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아직 한 명의 인플루언스가 남았는데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감감했다. 그동안 바퀴벌레 한 마리가 매장에 침입해 재이, 재희 모두 출동했고 나는 발을 구르며 울었고 행어에서 3단 진열장으로, 3단 진열장에서 전신거울로 종종걸음을 치며 도망치는 바퀴벌레를 종이컵에 씌워 간신히 잡았다. 그런데 죽이기엔 미안해 매장 밖으로 방생해준 뒤 혹여나 다시 찾아올까 전전긍긍하며 가게 문이 여닫힐 때마다 문턱만 응시했다. 바퀴벌레의 진원지는 골목 배수구였고, 늦은 밤마다 누가 그곳에 몰래 음식물쓰레기를 버리고 간다는 제보가 있었다. 구청직원이 출동해 문제의 배수구 주변에 주차된 차량 블랙박스 영상을 확보한 뒤 잠복근무를 거쳐 현장에서 범인을 검거했는데 우리 점포 건물의 3층에 거주하는 여자였다. 언젠가 매장 뒤뜰에서 꽁초를 발견한 재이는 누가 아래로 담배를 던져 버리는 게 아니냐며 의심했다.


  “불붙기 딱 좋은데.”


  겁먹은 나와 재이는 담배꽁초가 어디에서 날아오는지 알아내려고 골몰했는데 우리 둘 다 돋보기와 안경을 잃어버린 코난이라 그런지 수사에 진척이 없었고, 그래서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불법 투기로 붙잡힌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 걸 목격하자 손끝을 세워 범인이라 지목했다. 처음에는 부인하던 여자는 집주인이 온 뒤에야 자백했고 앞으로 다시는 매장 뒤뜰로 담배꽁초를 던지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냈다. 사건을 마무리 짓고 돌아가는 구청직원에게 앞으로 저 여자가 받게 될 처벌을 물었더니 고작 벌금 십만원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며칠 뒤 1톤 트럭을 몰고 온 하청직원들이 배수로마다 하얀 연기를 살포한 후로 바퀴벌레는 종적을 감췄다. 잠잠한 날들이 이어졌고 개업 후 재이와 처음으로 여행을 떠났다. 경주로 갔고 황리단길에 있는 소품점에서 데이비드 보위의 얼굴이 흐릿하게 인쇄된 머그잔을 하나 샀다. 그리고 차를 몰고 왕릉을 돌아가다 사색이 된 재이가 갓길에 죽은 초록 사체를 봤냐며 내게 물었고, 황급히 차창 밖을 훔쳐본 나는 거북이, 하고 추측했다가 이내 아닌 거 같아 개구리, 하고 정정했다가 또 아닌 거 같아 두꺼비, 하고 말을 바꾸자 뭔데 자꾸 바뀌느냐며 운전대를 꽉 쥔 재이가 핀잔을 줬다. “꼬리가 길었는데 도마뱀 아니야?” 하고 최종적으로 정했더니 재이가 깔깔대며 초록 공룡 인형이었다고 놀려서 기운이 빠져 졸음이 몰려왔다. 숙소인 포항까지 가는 동안 기역자로 접힌 매트리스에 누운 고양이처럼 나는 조수석 시트에 배를 내민 채 누워 잠만 잤다.


  십 년 된 소나타였고 크리스마스가 지나가면 십일 년 차가 될 빈티지 소나타였다. 기내 승무원 직에 합격한 이후 재이가 부천에 위치한 중고차시장에 가서 계약한 첫차인데 누가 여기서 죽은 거 아냐, 하고 괜스레 찝찝한 말을 핸들에다 뱉어냈고 그 소리에 나는 빈티지를 두고 해괴한 논리를 펼치던 정연 선배가 잠시간 떠올랐다. 재이의 걱정과 달리 나는 재이의 소나타가 포근했고, 아니 중고차 딜러가 새 인조가죽으로 교체해놓은 조수석 시트가 포근했고 고장만 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영원히 재이가 운전석에 앉아 조수석에 앉은 나를 응시하듯 사이드미러를 흘겨보며 몰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가 비전도 없는 여자란 소리를 들었다. 우리는 해가 지고 바다 앞에 자리한 숙소에 도착했고 밑에 있는 조개구이집에서 모듬조개구이를 시켜 먹었다. 다음 날 한적한 영일대의 편평한 모래사장을 따라 걸었고 출렁이는 수평선을 바라다봤다. 공장 굴뚝들이 수평선 위에 앉아 하얀 연기를 내뿜었다.


  “잘한 짓일까?”


  우리 결혼도 해야 하는데, 라는 말의 앞머리는 모두 잘라 먹었다. 파도 소리가 모래알에 파묻힌 뒤 산발적으로 튀어 올라 내 귀를 덮쳤다.


  “기껏해야 백 년 사는데 좋아하는 거 해볼 거 다 해 봐야지. 안 그래?”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걸 낭비하며 산다고 혀를 차며 생각해본 적은 없다. 기껏해야 백 년인데 하고 싶은 것들 모두 다 할 수 있지. 하지만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생각과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잘 안다는 생각 중 어느 하나라도 명확하지 집히는 게 없어 결국 아무런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은 생각을 멈추게 하고, 나는 연역할 수 없고, 무엇이 좋은지 몰라, 좋아, 하고 말하는 순간 다시 무엇이 좋은지 몰라 좋지 않아, 하고 번복하게 되고, 결국 좋고 좋지 않은 건 언어의 간극보다 상황의 온도 같아서 이제는 조금 따스해졌다고 말할 여유가 생겼다. 그러자 겨울바람이 파도와 함께 밀려와 매장에 방문했던 동묘 할아버지를 데려왔다. 할아버지는 뭐가 좋아서 평생 구제를 팔았을까, 좋아한다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좋아한다는 말속에는 사람밖에 들어 있지 않아 내가 좋아한다고 말할 때면 불쑥 어느 시기에 내 마음에 들어왔던 사람들이 두서없이 나타났고 이제 더는 좋아하지 않는, 심지어 싫어진 사람들도 더러 있어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기가 힘겨웠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할 시간은?”


  재이의 물음에 바보같이 실제로 계산해보았다. 내가 백 년이나 살 수 있다면 앞으로 칠십 년은 재이와 사랑할 수 있겠구나, 하고.


  “내가 좋아하는 만큼 상대의 일도 좋아해 줘야겠지.”


  이 말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 나는 파도가 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늘과 닿아 흐릿해진 수평선이 눈에 걸렸다. 바다에는 수평선이 있고 땅에는 지평선이 있는데, 아마 이건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지구본을 교탁에 올려두고 가르쳐준 대로 지구가 둥글기 때문이고, ‘아마’라는 의문 부호를 재기하는 건 실제로 내가 지구 밖으로 나가서 둥근 지구를 본 적은 없기 때문이다. 내 시선이 닿을 수 있는 끝에 있는 곡선. 수평선, 지평선을 가만히 바라다보면 이 경계를 나누는 게 무의미해졌다. 다가갈수록 딱 그만치 멀어지기에 결코 수평선과 지평선의 끝에 가닿을 수 없고, 이 역시 지구에 속할 따름이다. 어느 경계까지가 지구일까. 중력이 닿는 곳까지 지구라면 달 또한 지구인 걸까.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인력이면 우리는 서로 다른 게 아니라 결국 하나의 덩어리인 걸까. 결혼은 이걸 허무는 과정일까. 아니면 인정하는 과정일까. 이경이 그랬다. 죽음 직전에 결혼이 잘한 선택이었다며 회상하는 사람은 열 명 중 단 한 명에 불과하다고. 내가 그 단 한 명에 속하겠다고 단언하자 이경은 비웃듯 말했다. 그 단 한 명은 배우자와 일찍 사별해서라고.


  마지막 인플루언스는 정연 선배였다. 햄버거 게임처럼 겹겹이 쌓아가는 놀이가 시간의 축적이라면 가장 아래에 깔려있던 정연 선배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사라졌어야 마땅한데, 내 앞에 멀쩡히 살아 나타났고 나는 단번에 알아봤다. 무의식적으로 선배, 하고 부를 뻔했지만 기애 씨가 매장에 함께 있었기에 안녕하세요, 하며 물끄러미 응시만 했다. 기애 씨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곧 제대할 아들의 선물을 고르고 있었고 선배는 혼자 조용히 내 가게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타인과 한자리에 있어서인지 선배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나를 앞에 두고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 선배를 뒤로하고 나는 기애 씨의 아들이 입을 만한 옷들을 골라 주었다.


  “빈티지라 좋아하겠어요?”


  걱정스레 물었더니 기애 씨는 아들이 입는 군복이 더 빈티지가 아니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훈련받다 보면 일 년만 지나도 사회에서 십 년 입은 거랑 같지, 뭐.”


  기애 씨, 휴가 나갈 때만 입는 A급 군복이 따로 있어요, 하고 알려주려다가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선배는 이 모든 일급 보안을 내게 알려줬다. 막 제대 후 복학한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선배 역시 자신이 생활한 부대가 비밀공작단이라도 되는 듯 무용담을 늘어놓길 좋아했다. 한반도의 운명이 자신의 비밀 부대로 시작해 결국 자신의 용단으로 결정 났다는 그런 구원 없고 구원자만 있는 이야기. 하지만 당시엔 이 무용담이 내겐 영웅담으로 다가와 하늘에서 내려온 슈퍼맨이나 어둠 속에 탄생한 베트맨보단 현실적이라 여겨졌다. 실제로 선배가 묘사한 각개전투에 대해 듣다 보면 내 팔, 다리가 쓸린 것처럼 쓰라렸고 혹한기에 대해 듣다 보면 내 코가 얼어떨어진 듯이 괴로웠다. 그사이 기애 씨는 구석에 숨겨둔 90년대 우라하라 신을 휩쓴 베이프의 카모플라쥬 코치 재킷을 찾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들이 머리를 빡빡 깎으니 꼭 영화 속 원빈과 닮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는데 나는 그 옷이 바로 원빈의 원조인 키무라 타쿠야가 입은 모델이라며 영업하려다가 간신히 참아 넘겼다. 기애 씨가 고른 옷들을 결제하는 동안 선배는 촬영을 끝마치고 데스크에 자신의 소셜네트워크 주소가 새겨진 명함을 올려두곤 떠났다.


  지구를 담다.


  선배의 소셜네트워크 소개말을 노트에 옮겨 적으며 오랜만에 본 모습을 상기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깔끔한 정장 차림새였다. 선배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 업로드된 글들을 쭉 훑어봤는데 개인적인 사견이 담긴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선배가 인플루언스가 되었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았다. 그럴 만한 재능이 있고, 그럴 만한 일을 할 거라 상상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마주치게 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내가 놀라지 않은 이유라면 선배의 태연한 행동 덕분이었다. 이미 모든 걸 다 눈치채고 찾아온 사람처럼 평온한 얼굴로 가게 문을 열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무심히 내 인사를 받아줬고 오래전 학과 술자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 번 비끗대지 않고 촬영을 끝마치고 돌아갔다. 불쾌하진 않았다. 불쾌하려면 선배가 나의 적이 아니라 모든 악을 감춘 선인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나야 했다.


  선배가 쓴 후기는 단출했다. 빈티지 옷가게 ‘이름’. 미국 빈티지가 유행하는 시기에 흔하지 않은 일본 빈티지 옷가게. 언더커버(UNDERCOVER). 텐더로인(Tenderloin), 네이버후드(NEIGHBORHOOD), 웨어하우스(Warehouse), 요지 야마모토(Yohji Yamamoto), 미하라 야스히로(Mihara Yasuhiro) 등이 있다. 매장을 대표할 만한 옷과 브랜드에 대해 찬찬히 소개했다. 어느 문장에도 개인적인 사견이나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고 오탈자 역시 찾기 힘들었다. 이 글을 써 내려간 선배의 목소리를 상상했다. 나이가 들어도 목소리만큼은 바뀌지 않는다고. 어눌한 어투로 선배는 노화가 제일 느린 부위가 성대라고 일러주었다. 그때의 나는 참 다행이라 여겼다. 시간이 지나 선배의 얼굴이 변하더라도 알아차릴 수 있을 유일한 단서니까. 선배의 목소리는 여전할까. 아니 여전히 선배의 말을 나는 알아듣지 못할까.


  선배가 놓고 간 명함 속 연락처는 내 전화부에 저장된 번호와는 일치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연히 우리의 연락이 끊긴 것이지만 나는 암호를 해독하듯 레이저로 각인된 숫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전화해볼까 고민하던 사이 주문한 짝이 왔고 뒤이어 선배도 왔다. 해외 배송으로 날아온 짝을 뒤뜰로 옮겨 분해하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뜰에서 가게 문까지는 멀지 않았지만 나는 그 거리가 허들로 백 개쯤 가로막힌 듯이 아득히 멀어 보였다. 하나 자빠트리지 않고 모두 뛰어넘어야 과거의 선배와 온전히 만날 수 있을 것 같았고, 허들 하나하나를 뛰어넘으며 올라오는 날숨과 뛰는 가슴으로 인해 이제야 내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놀라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선배.”


  날숨과 함께 힘없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을 뱉어냈다. 선배는 포마드를 바른 말쑥한 스타일로 가게 문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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