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유형
오후 열두 시 문을 열고 밤 아홉 시 문을 닫는다.
늦어도 열한 시 안엔 출근해 재고품들을 뒤뜰로 옮긴 뒤 청소를 끝마쳐야 오픈 시간을 맞출 수 있다. 빈티지에 재고란 표현은 어색한데 세월을 비켜 간 건 뒤뜰에 모아 따로 보관했다. 내가 매입하는 빈티지는 주로 남성복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까다로운 여자의 안목을, 그러니까 옷을 잘 모르는 내가 동일성별의 취향까지 읽어낼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자들은 대개 나와 같이 깨끗한 물건들을 선호했다. 하지만 모든 스타일의 종착지는 빈티지고, 그곳까지 파고들어 심취한 사람들은 대체로 낡을 대로 낡아 전생에 열댓 번은 빈티지 옷가게를 차려본 주인처럼 굴었다. 그런 기 센 손님들을 상대해 보면 차라리 새벽 일찍 동대문에 나가 보세 의류들을 떼와 파는 게 수월할 거라 여겼는데 우리 가게에서 한 블록 떨어진 ‘유미네옷가게’를 운영하는 유미가 당장 급한 대로 배달 아르바이트라도 뛸 생각이란 소식에 마음을 접었다.
“유미 씨, 오토바이도 운전할 줄 알아요?”
“아니요.”
“아, 자전거?”
나보다 두 살 어린 유미는 보세 의류를 파는 주인답게 쇼윈도에 입혀둔 것과 매번 똑같은 옷을 입고 일했다. 타탄체크 망토와 포플린 원피스 그리고 흰 양말을 감싼 발레리나 슈즈.
“걸어서요.”
“걸어서요?”
“언니, 요즘은 걸어서도 배달 다녀요.”
누가 될는지 몰라도 나만큼은 유미가 주문받을 수 있는 반경 내에선 절대 배달음식을 시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아는 유미는 멀리서 쳐다보면 걷기보다 무빙워크에 기댄 채 다가오는 그림자처럼 느긋해 보였다. 행동보다 심리가 더 그랬다. 매출이 바닥을 기는 데도 사태를 깨닫기보다 내일 먹을 떡볶이를 두고 더 골몰했고 그게 유미가 옷가게를 차린 계기가 아닐까 추측하다 보면 거울 요법이 되어 나 자신까지 불편해졌다. 이 동네는 대학 캠퍼스를 두 곳이나 끼고 있는데 상업 지구보단 신식 빌라 건물들이 주로 자리한 주택가라 주말이 오면 모두 번화가로 빠져나가 전쟁통에 버려진 유령마을처럼 고요했다. 시대가 급변하면서 대학들은 원격 수업에 돌입했고 더는 이곳에 머물 이유가 사라진 학생들도 본가로 거처를 옮겨 상권이 더욱 쪼그라들어 유미에게까지 닿아 결국 배달 아르바이트를 알아보게 했다. 사실 근원적인 문제라면 유미네옷가게에 가득 진열된 프릴과 레이스가 달린 공주 옷들이지만 대신 재이가 내게 했던 그대로 격려와 미소만 주었고 유미는 해맑게 따라 웃었다.
“언니, 그래서 떡볶이 언제 먹을 거예요?”
유미의 머리칼은 햇빛을 받으면 붉은 기가 돌았는데 유전이라고 말했다. 엄마도, 할머니도 햇빛을 받으면 붉은 기가 돈다고. 그 붉은 기 탓에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구애에 못 이긴 척 혼인했고 그로부터 태어난 엄마 역시 붉은 기를 이어받아 거기에 매료된 아빠와 결혼하여 자신이 태어났다는 삼대를 걸친 서사인데, 자신만큼은 아직 붉은 기로 덕을 본 게 없다며 푸념했다. 그 소리에 내가 유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더니 자기는 꼭 말괄량이 삐삐 같아 싫다고, 어릴 때부터 쭉 싫어했다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한 번도 떠올려본 적이 없었는데 그 말을 들은 이후부터 유미가 말괄량이 삐삐로만 보여 오히려 내가 싫어졌다. 그러면 앞으로 빨강머리 앤은 어떠냐고 물어봤고, 유미는 이 두 주인공이 같은 게 아니냐며 내게 되물었다. 그러고 보니 같은 게 아닌가, 하고 착각이 들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빨강머리 앤과 말괄량이 삐삐가 무슨 차이가 있는지, 둘의 차이를 하나 모르겠지만 유미는 빨강머리 앤도 말괄량이 삐삐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달래주고 싶다가도 낮은 콧대를 따라 은하수처럼 모인 주근깨가 이 두 만화 캐릭터와 겹쳐졌다. 빨강머리 앤도 말괄량이 삐삐도 모르지만 아마 유미와 똑같은 성격이지 않을까 상상하니 웃음이 터졌고 유미는 다시 한번 언제 떡볶이는 먹을 거냐며 내게 재촉했다.
유미의 어깨는 신기하게 둥글었고, 둥근 오렌지가 떠오르려다 레몬이 떠올랐고, 레몬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 자몽 맛이 났고, 자몽인가 싶어 쳐다보니 결국 무른 귤 같은 어깨라 에코백이 과즙처럼 흘러내릴 거 같아 안아주고 싶은, 세상에 둥글고 둥근 모든 걸 떠올리다 보니 가장 둥글고 예쁜 이경의 로저비비에 펌프스가 머릿속에서 아른거려 나를 괴롭혔다.
이젠 로지비비에 펌프스를 살 수 있는 매출엔 도달했지만 월세를 송금하고 나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대신 똑같이 생긴 밤색의 펌프스를 유미네옷가게에서 29,000원을 주고 데려왔다. 이제 가게에는 단골이라 부를 만한 손님도 두어 명 생겼고 이것도 빈티진가요, 하고 내가 신은 밤색의 펌프스를 가리켜 묻는 손님에게 태연히 빈티지가 아니란 사실을 고백할 용기와 여유도 생겼다. 광고 업체는 앞으로 두 명의 인플루언스가 더 방문할 거라 일러주었는데 나는 최대한 늦춰 찾아오길 바랐다. 그러니까 이상하게 그들이 왔다 가면 어김없이 감당하기 힘든 손님들이 우르르 몰려와 진이 빠졌다.
나는 서랍에서 노트를 꺼내 그들의 유형에 대해 써 보았다.
1) 관심병
빈티지에는 관심이 전혀 없을 것 같은 차림새로, 발렌시아가, 구찌, 알렉산더 맥퀸 같은 백화점에서나 파는 옷들을 갑옷 삼아 입고 나타나 매장에서 칼을 휘둘렀다. 그 칼은 결국 가격이라서 만 원짜리 티셔츠도 비싸다, 삼만 원짜리 바지도 비싸다, 오만 원짜리 재킷도 비싸다고 우기는 통에 당장이라도 단두대를 설치해 머리를 가격하고만 싶어졌다. 도대체 여기까지 찾아와 얻는 게 무엇인지 궁금했다가 해시태그로 ‘빈티지이름’을 검색해보고서야 해소되었다. 단 한 벌도 사지 않은 손님들의 SNS 계정에는 우리 매장에 진열된 빈티지들을 착용한 사진들로 가득했다. 그러면 다시 그 해시태그를 타고 비슷한 유형의 손님이 우리 매장까지 찾아와 칼을 휘둘렀고 그 칼질을 모두 피하느라 하루를 모두 소진하곤 했다.
2) 두 얼굴
이건 전자보다 더욱 분노를 유발해서 오히려 내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착각에 빠지게끔 했다. 차라리 면전에 대고 욕을 하면 나을 텐데 뒤로 숨어 입에 담을 수 없는 후기들을 남겨 놓았다. 후기는 당사자가 아니면 삭제할 수 없어 평생 꼬리표처럼 가게 뒤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처음에는 동종업체의 훼방일 거라 단정했지만 내가 아는 한 이 동네에 빈티지 옷가게는 우리가 유일했다. 차라리 잘못한 점을 알려준다면 고칠 텐데 비난이 전부인 후기라 대처도 반박도 할 수 없게 했다. 그럴 때면 이상하게 나는 매번 다른 모습으로 분장한 채 MTV에 모습을 드러낸 그 보위란 인물이 떠올랐고, 아니 재희의 말이 떠올랐고 혹시 그놈 짓이 아닐까 추측했는데 몇 차례 더 찾아가 심문해본 결과 의심을 거두게 되었다.
3) 무리한 환불 요구
이 유형은 실제로 매출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악질이다. 분명 이 옷에서 나는 구린내는 당신의 체취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빈티지 특성상 얼마나 입었는지 육안으로 확인이 어려워 이걸 악용한다는 점에서 막을 길이 없어 화병에 걸리게 한다. 한 번은 가죽 재킷을 사 간 손님이 열흘 뒤에 찾아와 환불을 요구했다. 가죽 재킷의 소매에는 이미 주름 자국이 자글자글해 반품은 안 된다며 정중히 거절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이 더위에 어떻게 입었겠냐는 소리였다. 그날 퇴근길에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겨울바람을 맞아 가로수가 하나 같이 앙상했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넌 덥니 이 새끼야. 난 추워 이 새끼야. 순간 궁금했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이 많은 욕을 도대체 나는 어디에서 배운 걸까. 전화를 걸어 재이에게 물어보았고 본능이 아닐까, 하는 논리적인 대답으로 돌아왔다.
4) 인플루언서
이것저것 입어본 후 현금이나 카드가 아니라 슬쩍 자신의 명함만 내민다는 점에서 제일 당혹스러운 유형인데 주말마다 이런 손님이 비일비재해서 이제는 표정 하나 찡그리지 않고 정중히 거절하는 방법까지 터득했다고 자찬하며 이 글을 쓰다 보니 2)에 해당하는 손님이 이놈들이 아닐까 하는 강한 예감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진종일 쓸 수 있지만 죽을 사死를 염원하며 여기에서 펜을 멈췄다. 그리고 노트를 다시 서랍에 넣어두고 손님들이 헤집어 놓고 간 옷가지를 제자리로 정리하며 생각도 정리해 보았다. 이 모든 게 고작 한 달 만에 벌어진 일이라니. 나는 소설 속 다양한 또라이들은 그저 작가가 만든 허상이라 믿었는데 책 밖으로 튀어나와 여기저기 활보하며 다니는 걸 똑똑히 목도하자 소름 끼쳤고 이 세상 모든 문학 작품이 하이퍼리얼리즘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책 속의 선한 주인공들 또한 실재해 내가 버티는 힘이 되었다. 개업 날 티셔츠를 사 간 중년 여성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방문했고 자신의 이름은 이기애고 여기 대로변 삼거리에 자리한 중식당을 운영한다는 걸 알려주었다. 재이와 함께 그 중식당에 들른 날 기애 씨는 시키지도 않은 탕수육을 서비스로 내주었다. 나는 고마운 마음은 가장자리로 밀어놓고 메뉴판에 적힌 탕수육 가격과 매번 기애 씨에게 할인해 준 옷들의 마진율 차이를 가늠해 보았다. 이런 게 자본주의의 폐해일까. 이후로 나는 매출을 계산할 때마다 1로저비비에펌프스, 2로저비비에펌프스, 3로저비비에펌프스 이런 식으로 금전적인 단위를 셌다. 천문학에선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를 1AU로 표기한다. 그래서 우리 가게는 729,000원을 1로저비비에펌퍼스 즉, 1RP로 표기한다.
“언니 가게는 매출 괜찮아요?”
“1RP이에요.”
“네?”
1RP의 매출을 올린 내가 떡볶이를 사기로 했다. 떡볶이를 먹는 내내 유미는 이 단위의 의미를 궁금해했고 나는 진지하게 알려주었다.
“똑똑하다, 언니. 전 0.5RP네요. 아니 0.4RP인가.”
유미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시무룩해진 유미에게 내가 손을 내밀며 언젠가 우리 꼭 큰돈을 벌어 진짜 로저비비에 펌프스를 사자고 결의했다, 분식집에서. 유미네옷가게까지 되돌아가며 우리는 조금은 가까워졌다는 친밀감을 느꼈고 유미가 먼저 말을 놓으라고 말했다. 그 부탁을 하면서도 유미의 걸음 속도가 유난히 느려 나와 조금씩 벌어져 뒤돌아보게끔 했고 다시금 유미가 주문받을 수 있는 반경 내에선 절대 배달음식을 시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언니, 알아요.”
나도 알아, 하고 무의식적으로 대답하곤 내가 뭘 아는지 고민했다. 무심코 뱉고 보는 습관이 문제였다. 유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내가 파는 옷에 아무도 관심 없다는 거요.”
왼쪽 엉덩이에 큰 점이 있다는 사실을 유미에게 들킨 적도 없는데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유미의 갑작스러운 고백 탓에 내가 파는 의류에 하나 관심 없던 재희가 떠올랐고 순간 우스워진 기분이 들었다. 아니야, 라고 말하려다가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니 대신
“유미야. 너도 내가 파는 옷에 관심 없잖아.”
하고 반박했고, 우리 둘은 이전보다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