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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독순 Oct 26. 2024

빈티지가 아닌 빈티지 옷가게(13)

결벽증과 빈티지

  결벽증 Mysophobia , 潔癖症.


  ‘공포증의 하나로서 어떤 불결을 병적으로 두려워하는 상태와 태도가 습관화하여 성격 경향과 같이 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완전벽이 강하고 엄격해서 융통성이 없다. 그로 인해서 자신의 행동에 제한을 받게 되거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자기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끌어들이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대인관계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교육심리학 용어사전의 내용은 대부분 인정하지만 나의 대인관계에 있어 문제를 일으킨 건 정연 선배만이 유일했다. 나는 머리칼이 헝클어진, 아침에 머리를 감지 않고 출근한 게 분명한 의사에게 되물었다.


  “선생님, 저는 깨끗하지 않아요. 아니 손만 깨끗해요. 자주 씻거든요.”


  의사는 그게 일종의 결벽증이라 지적했고, 그럼 도대체 결벽증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이 지구상에 존재하는지 궁금했지만 내가 봐도 지나치게 자주 손을 씻긴 했다. 우리나라가 한순간 물부족국가로 지정된다면 남들보다 여기에 내가 크게 일조했을 게 분명하고, 나는 나의 조상이 떠올릴 조상이 다시 그 조상이 떠올릴 조상이 손을 자주 씻어 오래전 지구였던 화성에 물이 말라버린 거라고 믿는 주의였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의사는 강박증과 결벽증은 철로와 같이 서로가 밀접하게 맞물린 거라며 자신의 증상을 외면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고깝게 들린 건 아닌데 저 의사는 더럽게 살아 좋겠다며 비웃었다. 내가 결벽증이라고 말했을 때 제일 놀란 건 이경이었다.


  “네가?”

  “내가.”

  “네가?”


  며칠 동안 강의를 빠진 이유를 육하원칙에 따라 찬찬히 알려줬지만 이경은 여전히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러다 뭔가 떠오른 건지 자신의 이너백에서 크리스찬 디오르의 립글로우를 꺼내 들었다.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차린 나는 고개를 틀어 이경의 눈을 피했다.


  “야, 너 이거 매번 뺏어 썼잖아.”


  고개를 튼 채로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비싼 건 괜찮은가?”


  내가 뱉고도 그 해명 속에 나에 대한 배신들로 가득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결벽증에 대한 배신이 가득했다고 해야 할까. 변호가 없어 둘 다 해당한다며 나의 뇌는 판결했고 나야말로 무고를 당한 억울한 피해자라고 두 손 모아 외치고 싶었다. 도저히 결벽증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다시 광장시장에 들러 빈티지를 여러 벌 샀고, 결국 나는 끝내 한 벌도 걸칠 수가 없었다. 폴로의 옥스포드 셔츠와 타미 힐피거의 맨투맨, 나름 거액을 쓴 버버리 런던의 트렌치코트까지. 돈이 아깝기보다 선배와 멀어질 운명에 놓인 현실이 서글펐다. 깨끗하지 않은 결벽증도 있어, 하고 이경에게 둘러댔는데 곧이어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는 걸 깨닫고 아, 어쨌든 더러운 의사가 그렇대, 나보고 어쩌라고, 하며 짜증으로 마무리했다.


  “됐고, 정연 선배 여자 친구 생겼대.”


  이후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도서관 칸막이에 숨어 한참이고 울먹이다가 밖으로 나온 나는 중앙 계단에서 단발머리의 후배와 팔짱 낀 채로 나를 스쳐 지나간 선배의 미소만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때 둘을 갈라놓든지 미친 척하며 선배의 반대편 팔에 팔짱이라도 꼈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필 나의 왼팔에는 벽돌보다 무거운 『상실의 시대』가 껴 있었고 선배는 내가 나오코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는 듯했다. 나중에 가서 깨달았는데 그 후배가 미도리였다.


  이때부터 앓게 된 결벽증은 빈티지 옷가게를 개업하던 날까지, 아니 여전히 따라다닌다. 더는 약을 먹거나 결벽증을 앓고 있다며 단상 위로 올라가 주변인에게 소리치진 않지만 그 시절의 나는 자랑거리도 아닌데 비련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모든 슬픔을 공유해야 직성이 풀렸다. 내가 결벽증이란 소문은 금세 정연 선배의 귀에까지 흘러갔고 우리는 치즈돈가스가 학식으로 나온 날 교내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운명을 믿니?”


  다행히 이날 선배의 옆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운영이요?”

  “운명.”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간 교내 식당은 적막했고 선배의 말소리는 이미 지나간 외부 소음을 다시 불러낸 것처럼 선명히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라디오 주파수를 조절해 맞추듯 자음과 모음을 분해한 뒤 이리저리 다시 끼워 맞춰보며 의미를 유추해 보았다. 모든 정보를 취합해본 결과 ‘운명’으로 결론 났지만 이 단어가 교내 식당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고 생경해서 어떻게 받아쳐야 선배 앞에 선 내가 유식한 여자로 보일까 고민하다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모두가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세상이 너무 단순하지 않을까?”


  손에 쥔 포크숟가락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지금 같으면 정신 차리라며 포크숟가락 끝으로 이마를 탁 내리칠 테지만 그때 선배의 한마디, 한마디가 오래된 프랑스 무성 영화 속에서 불어를 쓰던 T존이 선명한 외국 배우 같아 모든 언어가 내게 이국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불어다 보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해석되지 않아, 네, 네, 네, 네, 네, 네, 네, 를 연발하다가 나는 네로 왕이 되었고 선배는 돌을 던지던 불난 집의 로마 시민이 되어 식탁을 사이에 두고 서로가 대치하는 꼴이 되었다. 나는 말이란 무형에 무게가 실리면 날아든 돌만큼 무겁고 아플 수 있다는 걸 교내 식당에서 경험했다.


  “탄생이.”

  “네.”

  “있으면.”

  “네.”

  “죽음도.”

  “네.”

  “있는 건데.”

  “네.”

  “듣기 싫니?”

  “네. 아, 아니요.”

  “내 말은 결벽증, 그거 운명이 아니란 거야.”

  “아, 네.”


  한 번도 운명이라 받아들인 적이 없었는데 선배가 운명이 아니라고 단언한 다음부터 평생 지고 가야 할 운명이 되어 온몸이 아팠다. 정말로 저 말을 하고 싶어서 운명론을 꺼낸 걸까. 아니면 그냥 운명론을 이야기하고 싶은 나머지 내 결벽증을 끼워 넣은 걸까. 마음의 추는 허락도 없이 뒤로 기우는데 나는 애써 앞으로 밀어냈다.


  엄마는 나와 한 침구에 누워 창밖에 뜬 별과 북극성을 바라볼 때면 그랬다. 네가 막 태어났을 때 심실이 하나였어, 하고. 그나마 흔한 선천성 심장 질환인데 병명은 심실중격결손증이었다. 대다수 소아기에 수술이 이뤄져 정작 당사자는 기억이 없고 흉터도 깊게 남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내 가슴은 개복 되었고 차가운 은빛 집기들이 이 안을 헤집으며 뛰는 심장을 건드렸다. 불현듯 본 적 없는 내 몸속이 상상될 때면 가슴막 아래로 암흑물질이 가득 찬 듯이 깊이 도울해졌다. 내 심장이 내 것처럼 느껴지지 않고, 아니 분명 내 것인데 모든 장기가 심장을 이인 취급하는 것 같았다. 타인을 내 가슴 안으로 끌어들일수록 더욱 선명해졌다. 좋아해서 도울했고 도울해서 좋아졌다. 심실중격결손증은 예방이 없다. 따라서 누구도 탓할 수 없다. 아팠던 기억도 없다. 흉터도 미미하다. 타인에게 말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따라서 아픈 사람이 아니라 아파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데 그 시기의 나는 어딘가가 비어버린 기분을 매일 가슴속에 품고 다녔다.


  손을 씻는 건 습관이었다. 무슨 물건이든 만진 뒤 손을 씻어야 직성이 풀렸다. 습관은 습관인데 고쳐야 하는 습관이라 여겨본 적이 없어 평생 습관인 채로 살고 싶은 내게 의사는 습관이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언제부터 그랬나요, 하고 묻는 의사의 물음에 엄마 뱃속에서부터요, 하며 대답할 뻔했다가 잘 모르겠다고 정정했다. 잘 모르는 건 사실이고, 잘 모르던 사실을 알게 해 준 건 선배이고, 몰라도 될 사실을 깨우쳐 준 건 의사였다. 아무래도 가장 미워해야 할 쪽은 의사였기에 나는 영혼이 깃든 빈티지를 권한 선배에게 미안한 감정이 서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왜 내가 건넨 사과를 두 학기나 지나서야 선배는 한 입 베어 문 걸까. 새로운 아이폰이 출시되어서일까. 선배는 아이폰을 썼고 지문 인식을 걸어둔 터라 그 후배와 주고받던 메시지를 훔쳐볼 방법은 없었다. 한 번쯤 선배에게 묻고 싶었다. 나와 사귀는 건지, 그 후배와 사귀는 건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까 겁나기보다 둘 다, 라고 선뜻 대답할까 두려웠다. 한번은 내 앞에서 그 후배의 이름을 언급한 적이 있다. “가민이는 좋은 아이야.” 아이라니. 가민이가 정말 아이라면 선배는 범죄자고, 아니 만나지도 못했을 거라며 골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선배가 습관처럼 타성에 젖어 내뱉던 ‘아이’가 상대를 낮춰 여기는 거라 미처 알아차리지 못해서 그저 나와 가민이는 아이, 선배는 오빠여야 올바른, 아니 반드시 그래야 하는 관계 계급 구조 정도로 여겼다.


  선배는 계급이 있는 군대를 나왔고, 나는 군대에 가지 못했고, 아니 갈 수 없을뿐더러 가고 싶지도 않았다. 군대는 규율이 있어 무력이 있고 민족이 있어 국가가 있고 적군이 있어 살의가 있지만 이상하게 눈물만큼은 결여돼 있어 나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군대를 다녀왔기에 선배가 좋아진 게 아니라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선배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군대를 다녀온 선배가 좋아졌다. 이제는 이 모든 걸 상대방 눈치를 살피지 않고 자연스럽게 열거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때의 나는 쉼표가 없는 문장처럼 모든 일에 마침표만 찍어내며 이번이 아니면 다음을 기약할 수 없을 거란 불안과 조바심을 느꼈다. 그래서 선배가 손을 내밀면 손을 잡을 수밖에 없고 입술을 내밀면 입술로 다가갈 수밖에 없고 선배가 아니라고 하면 아니란 것에 어떤 의문조차 품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선배가 악역을 배정받은 영화 속 조커처럼 나쁜 기질만 타고난 악인도 아니었다. 때리지 않았고, 선택권을 주었고 말하길 좋아했다. 이 모든 걸 실패한 이경의 연애사를 옆에서 지켜본 뒤로는 더욱 굳건하게 선배는 좋은 사람이라며 내 마음속 어딘가로 스멀스멀 피어나는 부조리들을 가라앉히려 안간힘을 썼다. 이경은 랜덤 채팅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만난, 자신이 글로벌 기업에서 일한다는 남자와 사귀었고 오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단순히 잠자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때렸고 다음 날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이경에게 발뺌하곤 빌었다.


  “술 취해서 맞은 거야, 주사야.”


  맞은 게 아니고 때린 거야, 하고 직역하고 싶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때린 남자와 관계를 끝맺지 못하는 이경이 납득되지 않았지만 금세 내가 처한 상황과 곤경이 떠오르자 마냥 욕만 할 수 없었다. 때려서 맞은 것. 맞아서 때린 것. 나는 이 두 단어가 주는 어감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했다. 두 단어는 철로에 놓인 열차처럼 밀접하게 맞물려 있는데 이경은 헤어지기 전날까지도 때렸다는 표현 대신 맞았다고 말했다. 때렸다는 어미가 올라간 표현 대신 다리를 맞았어. 등을 맞았어. 팔을 맞았어, 로 꼬리를 감추었다. 선생이 학생에게 체벌을 가하는 것도 아닌데, 아니 심지어 체벌조차 폐지가 되었는데 왜 이렇게 이경은 맞은 부위가 많은 건지 이해되질 않았지만 동시에 정연 선배가 그런 불공정한 거래를 내게 제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나는 내심 안도했다. 이경은 그 남자와 만나는 동안 거의 웃질 않았고 이제까지 본 적 없던 표정을 이따금 지어 보여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유이경, 하고 등 뒤에서 살며시 어깨라도 건들라치면 화들짝 놀라거나 때로는 아무런 맥락 없이 울었고 그러면 울어서 아무런 이유가 없어진 거란 우문에 화가 치밀었고 유이경, 왜 너는 네 감정이 이렇게 들끓는데 아무런 이유가 없느냐고 같이 울어버려서 우리 둘 다 정말 아무런 이유가 없어져 버렸다. 우리 둘 다 화가 났고 오빠를 욕하면 내가 욕먹고 욕하지 않아도 끝에 가선 내가 욕먹는 정말 수명이 욕으로 결정된다면 유이경에겐 노벨평화상을 줘야 마땅했다. 이경은 결국 오빠가 계속 얼굴을 때려, 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술집에서 온전히 피해자가 된 채 내게 고백한 뒤에야 그와 간신히 관계를 끝맺었고, 후로 우리는 그 남자에 대해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유이경.”


  학교 시계탑 벤치에 앉아 있는 이경을 부르자 목이 칼칼해졌다. 다가가는 대신 시계탑 뒤에서 빨갛게 달아오르는 석양을 무심히 쳐다봤다. 어디에서 이 비슷한 장면을 본 것 같은데 기억나질 않았고, 살금살금 이경에게 다가가 좁다란 양어깨 위에다 따뜻한 내 두 손을 올려놔 보았다.


  “나 이 장면 본 거 같아.”


  석양 뒤로 이경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판타스틱 소녀 백서.”


  원자폭탄이 투하된 듯한 이경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뿌리 염색 좀 하라고 주절댔다.


  “내가 스칼렛 요한슨할게. 넌 도라 버치해.”


  뭔가 불공평한데 불공정하지는 않아 이경에게 밀크티를 사주었다. 왠지 모르게 그날 이후로 나는 정연 선배와 관련된 일들을 일절 떠들지 않았고 이경도 물어보지 않았다. 우리는 「판타스틱 소녀 백서」 속 이니드와 레베카처럼 서로 닮은 구석이 없어 가까웠고, 가까워서 서로 닮은 구석을 찾기 힘든 거라 생각했다. 내 가슴속에 들어찬 암흑물질을 타고 날아가던 보이저 호가 40AU 거리에서 돌연 카메라를 돌려 촬영한 푸른 지구는 하나의 픽셀에 불과한 창백한 점이라며 칼 세이건이 전 인류에 겸손함을 중언했지만 그래서 더더욱 겸손하게 살고 싶지 않았고 40RP나 벌어 부자나 되고 싶었다. 고작 하나의 픽셀에 불과한, 이 작디작은 푸른 점에서 간신히 생존하는 우리가 얼마나 더 겸손해져야만 하는 걸까. 존재 자체가 겸손한 건 아닐까, 하고 푸념하자 아랫배가 움푹하게 꺼져 나는 남은 밀크티로 마저 채워 넣었다.


  정연 선배는 국어문학과에 재학했고 나와 이경도 마찬가지라 함께 전공 수업을 들었다. 졸업할 때까지 한 번의 조별 과제을 제외하곤 정연 선배와 나는 항상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 앉았다. 우리는 사귄다기보다 초등학교 시절 비밀 친구 놀이하던 마니또에 가까웠고 차이라면 서로 속옷 색깔까지 꿰뚫고 있는 관계였다는 것. 기숙사를 나와 모텔의 침구 위에서 선배가 내뱉던 모든 숨을 대신 들이삼켰고 그 숨을 선배가 없을 때면 몰래 몇 배로 토해냈다. 이경은 이게 한숨이란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상하게 선배와 사귀고부터 나는 한숨을 자주 쉬었고 강의를 빼먹는 날도 잦아져 대학생활에 즐거움이 사그라들었다. 캠퍼스의 낭만은 CC라는 비밀 연애를 선택한 요원에겐 해당되지 않았다. 오히려 전전긍긍하게 했고 그건 전적으로 후배와 헤어질 기미가 전연 없어 보이던 정연 선배 탓이었다. 가민이에게 미안하지 않아요, 하고 앞에서 충고하거나 교내에 막 신설된 성상담센터로 달려가 자백할 만큼 내 마음은 올곧지 못했고, 이 알 수 없는 분노가 거품만으로 채워진 맥주처럼 언젠가는 반드시 꺼질 거라 믿었고, 급기야 내가 여자로서 얼마나 매력이 메말라 있으면 선배를 오아시스 하나 없는 사막 한 가운데 덩그러니 세워둬 길을 잃게 만든 걸까 되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사람이란 동물이, 그러니까 동물에게 완전한 믿음을 가지기란 어렵잖아.”


  내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아도 선배는 모텔에 설치된 간접 조명을 멍하니 응시하며 혼잣말을 잘했다. 대개 다음 이어질 문장 역시 유사했다. “사람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불완전체이니까.” “믿음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거니까.” “인류는 믿음이란 매개를 두고 평생 싸우며 살아왔으니까.” 애초에 믿음이란 없다, 는 대전제를 세워둔 뒤 독백한 탓에 침구 위에서 가나다라를 어긋나지 않게 외우려 애쓴 나 혼자만 섹스에 미친 여자로 둔갑해 공허감이 밀려와 토할 것만 같았다. 또다시 변명하지만 그때의 나는 몰랐고, 공허해지면 공허해질수록 선배가 그 빈 공간을 채워주길 갈망하며 끝없이 기댔다. 그리고 다행이라면 선배가 가슴속은 아니라도 내 가슴 밖은 완벽히 채워줬다. 이상하게 선배의 체취가 묻은 빈티지는 내가 입어도 몸이 아무런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았다. 운명과 믿음을 멀리하라던 선배의 가르침 탓에 이 둘은 언제든 얘기치 못하게 측면으로만 달려와 나의 몸을 찰싹 때렸고 소름 돋았고 이내 나는 그게 사랑인 거라 착각했다.


  결벽증 Mysophobia , 潔癖症.


  ‘결벽증을 경험하는 사람은 세상이나 타인에 대한 불신이나 의심, 염려 등 인지적인 측면에서도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특성을 보일 수도 있다.’


  눈이 시릴 만큼 마지막 글귀를 오래도록 바라다봤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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