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둘째 날, 일요일 아침 8시 4분.
휴대전화가 진동하여 받았다. 뜻밖의 사람이었다. 친구의 며느리인 최 선생이었다.
그녀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휴일 아침부터 이런 부탁 전화를 드리게 되어…."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자기 외삼촌이 밀양에서 일을 하다가 전기톱에 다리를 베어 종아리 근육이 손상되고 뼈까지 다쳤다. 119구급차를 불렀는데, 구급대원이 환자 거주지의 부백병원과 인근 지역 몇 군데 종합병원 응급실에 전화해도 환자를 받아주겠다는 병원이 없어 출발도 못 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학에서 퇴임한 지 벌써 6년, 전공도 영상의학과, 그중에서도 복부만 평생 해왔으니 정형외과와는 업무적으로 얽힐 일이 없어 그쪽 방면으로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이를 어쩌나. 하지만 사람은 일단 살려놓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아는 인맥을 총동원하기로 했다.
먼저, 환자가 가장 진료받고 싶어 하는 병원이자 내가 교수로 근무했던 부백병원 원장에게 전화했다. 그는 나의 제자이자 오랫동안 친근하게 지내온 사이라 지금까지 내 부탁이라면 어지간한 것은 다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마침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답변은 실망스러웠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요즈음은 환자 입원에 관한 한 병원장 말도 잘 안 먹힌다고 한다.
특히 정형외과의 경우, 레지던트들이 병원을 떠난 후로는 단순 골절 환자 외에는 잘 받으려 하지 않는 데다 이와 같이 뼈뿐 아니라 심한 연부 조직 손상을 동반한 환자는 감염 내과를 비롯해 여러 세부 전공 의사가 협진해야 가능한 일이기에 더더욱 힘들다고 한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다른 곳에서 도저히 손댈 수 없는 환자들을 맡아 치료해야 할 3차 의료 기관인 대학병원이 2차 전문병원보다 못한 동네병원 수준으로 전락하다니!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전화를 끊었다.
이제 어디로 전화해야 하나?
나의 연줄이 닿는 정형외과 전문병원은 두 곳.
먼저, 정형외과 환자 부탁할 일이 생기면 항상 전화했던 민부병원이 떠올랐다.
하지만 인근에 있는 대학병원 정형외과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후, 이 병원으로 환자가 너무 몰려 내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던 서 원장은 아예 신환을 받을 수 없을 정도라는 소문을 들은 터라 도저히 부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곳은 하나, 수영에 있는 샘터병원.
마침, 이 병원 영상의학과에는 내 직계 제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대표 과장인 이 선생에게 전화했다.
받지 않았다.
다음으로, 그 밑에 있는 장 선생에게 전화했다.
그 역시 받지 않았다.
하기야, 폭주하는 업무에 일주일 내내 시달리다 휴일만큼은 푹 쉬고 싶을 텐데 일요일 아침 8시에 전화를 받을 사람이 누가 있겠나.
마지막으로,
몇 달 전에 이 병원 영상의학과로 스카우트되어 간 이 교수에게 전화했다.
약간 졸린 듯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나는 상황을 설명하고 응급실에 전화 한 통 해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난색을 표했다. 그는 이 병원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데다 자신의 세부 전공이 정형외과와는 거리가 먼 흉부라 마음 편히 응급실에 부탁할 처지가 아니라고 했다.
내가 말했다.
"그럼, 재단 이사장한테 직접 전화 한 통 해주시지 그래, 이 교수랑 동기잖아!"
"그런데. 이사장과는 평소 얼굴 보기도 쉽지 않아서...." 하며 말끝을 흐렸다.
비록 자기를 모셔 온 대학 동기라 할지라도 일단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로 전환되고 나니 그리 만만한 사이가 못 되는 모양이다.
대학에 있을 때는 주로 남의 부탁만 들어주는 입장이었는데, 이 나이 와서 내 일도 아니고 내 가족 일도 아닌 일을 가지고 제자와 후배에게 아침부터 고개 숙여가며 아쉬운 소리를 하고 있자니 기분이 언짢았다.
이만하면 할 만큼 했다. 인제 그만두자!
그래서 최 선생에게 내 능력으로는 안 되겠다고 전화하려는 순간, 저러다가 환자가 죽겠다는 생각이 또 발목을 잡았다. 저 정도 부상이면 적절한 조치가 빨리 취해지지 않을 경우 자칫 출혈로 죽을 텐데. 비록 출혈은 막는다 하더라도 즉시 입원해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으면 감염으로 사망할 수도 있을 텐데….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 선진국인 대한민국 대도시에서 출혈로 죽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런 나라에서 환자가 감염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어떻게 119구급차가 환자를 이송할 병원을 못 구해 구급차 안에 환자를 눕혀 놓고 출발도 못 하고 있단 말인가?
어쩌다 한 나라 의료의 근간인 대학병원이 아무 구실도 못 하는 저런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단 말인가!
그동안 어떻게 쌓아 올린 공든 탑인데, 어쩌면 이렇게 하루아침에 허물어뜨릴 수가 있단 말인가!
전문의를 딴 순간부터 훌륭한 의사를 길러내고 이 나라와 인류의 의료 발전에 헌신하겠다는 소명 의식 하나로, 돈과는 담을 쌓고, 한눈 한번 팔지 않고, 청춘을 다 바쳐서, 오로지 한 우물만 파온 지난 35년 간의 내 인생이 너무나 허망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