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
그 병원 법인 이사장인 박 원장에게 내가 직접 부탁하는 것이었다.
병원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그의 사진은 내 눈에 아주 익숙한 얼굴이었고 그의 이름 역시 확실히 아는 이름이었다.
이 교수와 대학 동기라니 나보다 대학 4년 후배이고, 그가 부백병원에서 전공의 수련을 받았다고 하니 그 시기는 내가 전문의 취득 후 첫 직장으로 부임한 때와 일치했다. 하지만 하도 오래된 일이라 그와 나 사이에 어떤 만남이나 관계가 있었는지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낯익은 얼굴과 이름뿐.
그런데, 이 양반 휴대전화 번호를 어떻게 알아내지?
병원에 물어본들 알려줄 리 만무하고, 이 교수에게 다시 전화해 물어보기도 참 뭣한데....
또다시 "아이고, 말자." 하고 포기하려는 순간, 문득 황당한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밑져야 본전인데 내 휴대전화 주소록에서 이름이나 한번 찾아봐?'
주소록을 훑어가던 중 박씨 편에 이르니 박호종이란 이름 석 자가 있는 게 아닌가!
하지만 내가 익히 아는 박호종은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대학 다닐 때 싱어로 활약했던 의대 보컬팀 '메디칼포'의 한 기 선배로서 나와 몇 년이나 같은 무대에 섰고, 레지던트 수련 역시 나와 같은 병원에서 받은지라 내 휴대전화에 전화번호가 남아있다면 그 선배일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또 망설였다. 전화를 해? 말아?
만약 그 선배가 받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몇십 년 동안 서로 연락 없이 지내다가, 그것도 일요일 아침에 전화해서 "선배님, 미안합니다. 번호를 잘못 눌렀네요." 할 수도 없고. 하지만, 한쪽은 체면이 걸린 문제지만 한쪽은 목숨이 걸린 문제다.
아이고 모르겠다. 일단 해보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한 번 가자마자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비록 짧은 문장이었지만 내가 기억하는 박 선배의 음성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한껏 목청을 가다듬고 점잖게 말했다.
"아침 일찍 대단히 죄송합니다.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과거에 부백병원 영상의학과에 근무하던 한석상 교수입니다."
그러자 곧바로 아주 반가운 반응이 돌아왔다.
"아이고, 한 교수님. 너무 오랜만입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어찌 이럴 수가! 이 번호가 박 원장의 번호라니!
나는 근 사십여 년 전의 인연이라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그런 나를 이리도 반갑게 맞아주니 참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론 미안한 마음 금할 수 없었다.
나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 정도 상처 같으면 혈관도 나가고 신경까지 손상되었을 터이니 일반적인 외상 환자를 다루는 정형외과 의사 외에 미세 접합 수술이 가능한 전문의까지 함께해야 제대로 된 수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있는 수영 병원에는 그런 팀이 없어 환자를 받지 못합니다만, 저희 제2병원인 서부산 샘터병원에는 그런 팀이 꾸려져 있어 이런 환자 항시라도 받도록 해두었습니다. 그러니 그쪽으로 가라고 하시지요. 제가 전화해 놓겠습니다."
할렐루야!
나는 즉시 최 선생에게 전화해서 지금 바로 그쪽으로 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가 왔다.
"119 구급대원이 미덥잖아 하며 진짜 그 병원과 접촉이 된 거냐, 그 병원 이사장 이름이 뭐냐며 꼬치꼬치 묻는다는데요."
"어허이, 지금 그런 한가한 소리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니 빨리 출발이나 하라 하셔. 그리고, 구급대원에게 이사장 이름은 박호종이라 전하고 내 폰 번호도 가르쳐 주어 만약 거기 가서 문제가 생기면 나한테 직접 전화하라 그러세요."
전화를 끊고 난 후, 나는 박 원장에게 환자 인적 사항을 문자로 보내고 최 선생에게는 병원 도착 후의 진행 상황을 수시로 내게 보고하라고 했다.
그 후, 환자는 병원에 도착하는 즉시 입원하고, 수술 전 검사 과정을 거쳐 응급 수술을 받은 후 무사히 회복 중이란 연락이 왔다. 그제서야 긴장감이 풀리며 안도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동안 가슴 졸였을 그 가족 생각에 내 가슴이 훈훈해져 왔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데 내가 이런 식으로 쓰임 받다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