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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Aug 05. 2021

빨간머리 앤처럼

  “초록색 지붕이 몇 채인가 세어보자!”

  초등학교 5학년 때 조금 일찍 사춘기가 찾아왔다. 그때 나의 변화를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빨간 머리 앤”뿐이었다.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당시 유행하던 TV 만화를 통해서이지만 절대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매일매일 그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갔고 어느새 내가 “빨간 머리 앤”처럼 되어있었다.

  실은 이러한 묘한 감정이 나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점심시간에는 밥을 빨리 먹고 운동장에 나가 “빨간 머리 앤”에 나오는 초록색 지붕 집을 발견하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고, 친구하고 몇 채인지 세어보기까지 했다. 언니가 있는 여자아이들은 “빨간 머리 앤” 후속편 책을 학교에 갖고 와 빌려 주지도 않으며 자랑을 하기도 했다. 그럴 때일수록 남자아이들은 자신들하고 다른 문화를 즐기고 있는 여자아이들에게 이질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런 차이에 우월감을 느끼며 여자아이들만의 비밀을 “빨간 머리 앤”을 통해서 성숙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때 그 마음이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것이다. 결혼할 때 식기세트와 함께 서점에서 세트로 사들인 것이 바로 “빨간 머리 앤” 시리즈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약하고 힘없는 여자아이가 당당히 어려움을 극복하고 행복의 결말을 맞이한다는 내용에서 그랬던 것 같다. 소녀가 생각하는 세상이나, 결혼을 앞둔 신부의 측면에서 보면 앞으로의 미래를 상상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럴 때 이 책을 읽으면 현재는 미래의 행복을 위한 준비기간이라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이 즈음해서 자연스레 이 책을 지은이가 과연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졌다. 역시나 작가 L.M. Montgomery는 주인공 ‘앤’과 비슷한 성장 과정의 경험을 토대로 작품을 그려내었고, 그런 이유에 주인공과 비슷한 작가의 모습에서 ‘앤’이 더욱 친밀하게 다가왔다. 작가가 목사부인이었기에 완역본에서는 성경 구절이 자주 나온다. 막연히 알고만 있었던 내용 깊은 곳에 작가의 깨끗한 신앙관이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대학 시절을 보낼 때의 일이다. 가장 좋아하는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빨간 머리 앤”이라고 대답하고 잠시나마 나를 바보 취급할까 봐 머뭇거린 적이 있다. 그랬더니 “우리 서로 통하네.”라며 더욱 관심을 보여준 친구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대중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상상력이 풍부한 주인공 ‘앤’이 희망적인 상상을 하면 할수록 그것이 현실이 되었고, 많은 사람이 ‘앤’과 같이 꿈을 꿀수록 어려운 현실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앤’의 상상하는 습관이 좋은 것일수록 꿈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 모든 독자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이 책을 읽다 책 속에 나오는 ‘길버트’라고 ‘앤’과 함께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청년을 마음속으로 짝사랑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주인공 ‘앤’이 좋았지만 그런 ‘앤’을 사랑하게 되는 ‘길버트’에게 선하고 강한 의지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책을 많이 읽으면 똑똑해진다고는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 이전에 갖추어야 할 품성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지식이나 상식만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이다. 나는 이런 것들을 가끔 어린아이들에게도 발견한다. 어른들이 잘 포장해 두고 싶어하는 마음을 아이들은 금방 판단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닉하게도 ‘길버트’는 이런 선한 모습을 전혀 표현하지 않고 도리어 장난꾸러기의 모습으로 ‘앤’을 화나게 했다. 그래서 좋은 면을 감추며 다가오는 ‘길버트’의 까칠하면서도 알 수 없는 행동들이 나를 비롯한 소녀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한 것 같다. 

  이 책에는 숨어있는 보석과 그것을 찾는 기쁨이 있어 앞으로도 소중히 보관할 예정이다. 아름답고 빛나는 것들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길을 가다 여유를 잃었을 때 잠시 상상해본다. “빨간 머리 앤”처럼···           

                                                                201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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