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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분 일기-18. 열정

초심으로 살아남기

by 선호

열정이 넘치진 않지만 매너리즘에 무릎을 꿇지는 않는다.


고교시절 아르바이트를 할 때부터 나는 그런 사람인 걸 알았던 것 같다. 24시간 우동집에서 시급 3천 원에 저녁 8시부터 오전 9시까지 했던 아르바이트나 한여름 땡볕과 한겨울 눈보라에서도 했던 경복궁 수문장 교대의식 아르바이트에서도 요일이 모호해지는 하루하루가 계속되면 타성에 젖어 매너리즘에 빠지기 마련이지만 이상하게 나는 그렇지는 않았다. 뭔가 전문적인 일을 배우기에는 머리가 따라오질 못했지만 일을 함에 있어서 흘러가는 시간이 숙련도를 올려줄지언정 타성에 젖어 매너리즘에 빠지는 일은 없었다고 나름 자부한다. 그렇게 했던 일들을 그만두는 것은 학교 복학이라던가 월급을 못 받는 다던가 하는 이유였지 내가 더 이상 이 업무에 대한 재미를 찾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러기에 열심히 하는 모습이 관리자들 보기엔 좋았겠지만 동료들에게는 좋은 모습만은 아니었다. 알바주제에 왜 저렇게 열심히 하는지, 적당히 하고 넘어가면 될 일을 너 때문에 일이 만들어진다 라는 뒷담화도 아닌 앞담화를 들었지만 나는 돈 주는 사람이 정해놓은 회사의 규칙대로 움직이고 있었을 뿐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술자리도 거의 없을 새벽 3시쯤, 길에 아무도 없는 번화가 우동집에서 야간담당 주방이모와 상의하며 만들어 몰래 술꾼 단골들에게 팔던 메뉴가 사장 눈에 띄어 주간 메뉴로 올라갔을 때나 아동극 하나 대충 만들어 애기들 부모 돈이나 뜯어보자 하는 것도 몰래 배우들과 상의해 추가 조명을 만들어서 공연이 끝났을 때 아이들과 부모들이 손뼉 치며 좋아하면 무대 뒤에서 느끼는 뿌듯함이 내 나름대로의 상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열정이 넘쳤던 대학로의 2년 반은 아무리 공연 무대 준비로 밤을 새우고 술을 마셔도 기운이 나던 시기였다. 공연을 만들고 다니는 크리에이터 조명팀이 아니고 소극장에서 몇 개월 동안 같은 공연을 몇 번이고 똑같이 플레이하는 조명기사이긴 했지만 영사기로 틀면 똑같이 나오는 영화가 아니라 하루하루 같지만 다른 라이브 공연이기에 나에겐 매일이 다른 하루였다. 하루 일과는 항상 같지만 하는 일은 매번 다른 관객과 다른 분위기에서 일을 하기에 더 매진하고 싶었고 더 배우고 싶었던 마음뿐이었다. 프로 조명팀에서 공연 셋업을 위해 오면 어떻게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어깨너머로 기웃거리고 영어 원서로만 있던 조명기계의 매뉴얼을 사전을 뒤적여 해석해 보곤 했다. 결국 넘어진 것은 '더 늦기 전에 안 되는 일 억지로 하려고 말아라'라는 차가운 프로 조명감독의 말이었기에 그렇게 그 말을 핑계로 도망쳐 버렸다.


서점에서 일을 했던 6년의 시간도 고되고 힘들긴 했지만 매너리즘에 빠지지는 않았다. 일을 배우던 2년여간은 정신이 없었고 일이 손에 익고 난 이후에도 지루하다는 생각은 없었다. 파주 물류센터에서 보낸 시간도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어떻게든 나아지려고 물류 시스템을 파헤쳐 본사와 싸우곤 했다. 그냥 시키는 대로 밤 12시까지 일하던 선배들도 괜히 모난돌에 정 맞는다고 한소리 하곤 했지만 결국 건의한 대로 개선되는 시스템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함께 한 선배들이지만 '어차피 단순 노동인데 그냥 해'라는 말에 순응하면 나도 그들처럼 될까 봐 두렵기도 했고 그건 내가 나를 포기하는 느낌이라 싫었다.


그렇게 제주에서도 9년째 비슷한 업무로 일을 하고 있다.


한 달 중 열흘은 제주시, 닷새는 서귀포시, 또 다른 일주일은 제주도 전체로 기간을 나누어 배송을 하는데 거의 내가 맡은 고정 담당 지역을 가고 가끔 중간에 이사일을 하곤 한다. 거의 같은 하루가 일주일이 한 달로, 다시 일 년이 9년이 되었다. 매번 같은 일을 하기에 익숙해지지만 매번 다르다. 섬이다 보니 항상 바뀌는 오늘의 날씨뿐만 아니라 육지에서 오는 배송물량의 수급과 재고까지 매일 생각하면서 일을 한다. 물론 내가 회사 책임자가 아니지만 지금껏 그렇게 몸에 배어 있었기에 어쩔 수가 없다.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수월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하고 의견을 내지만 내가 들어올 때부터 함께 일을 하는 동료들은 왜 그리 유난이라고 타박을 하곤 한다. 그냥 하루치 배송하면 끝이지 않겠냐는 말을 들을 때면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가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다. 분명 5-6년 전만 해도 같이 고민하고 이야기했던 동료들이 어느 순간 오늘 하루만 넘기면 된다고 해버리니 얼마 없는 파이팅도 파삭 식어버리곤 한다. 2-30대 때 같이 밤을 새울 열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초심은 이미 사라져 버린 듯한 공허한 눈빛들을 보니 나도 그렇게 될 것 같다. 40대 중반이 되니 더더욱 현실이 고달파 지기에 그 유혹을 참기가 힘들기도 하다.


그런 하루가 될 뻔했지만 오늘도 그러지 않기로 결심한 날이었다. 그랬다.


'나는 지치지 않을 거야' -뮤지컬 빨래 <슬플 땐 빨래를 해> 가사 중.


오늘도 스스로 되새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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