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글쎄요 '풍부한'은 물건을 많이 가진 것 같은 느낌이고요, '풍성한'은 뭔가 감정적으로 많이 채워진 느낌이 드네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즉흥적으로 대답하긴 했는데 정확히 어떤 차이가 있나 싶더라고. 수업이 끝나고, 두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봤어. 허무하게 두 개가 같은 의미인 거야. '넉넉하고 많다' 아.. 아닌데 이 느낌은 아닌데, 둘은 좀 다른데.... 사유가 필요한 시점.
'풍부한'은 무언가 많은 느낌, 많이 소유한 느낌인데 풍성하다는 것은 뭘까? 어떤 의미일까? 나는 언제 풍성하다고 느낄까? 일정 부분은 '돈'이 역할을 하는 것 같은데 절대적이지는 않은 것 같고... 그동안 풍요, 풍부, 풍성 이런 개념들은 사회에서 정의 내린 것들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살았지 한 번도 나 스스로 정의 내린 적은 없더라고.
'책은 도끼다'에서 박웅현 님은 이런 말을 하더라. "돈을 많이 안 벌더라도, 기분 좋으면 팁 정도 줄 수 있는 정도여도 좋겠다고". 와... 그렇지! 그럴 때 넉넉하고 풍성한 느낌이 들지. 내가 가진 것을 가볍게 내어줄 때 느끼는 감정.
문득, 작년 가을이 떠올랐어. 엄마는 본인 칠순 기념으로 집안에 젊은 여인들에게는 팔찌를 선물하고, 이모들에게는 시집을 선물했어. 시집의 앞 장에 짧은 메시지를 적을 때, 나는 글을 조금 쓸 줄 안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붙들려 짧고 간결하며 감동이 될 멘트를 만들어야 했어. 선물을 준비하는 엄마의 눈빛은 소녀 같았어. 어느 때보다 풍성하고 반짝였어. 아름다웠어. 만일 내게 아름다운 모습이 있다면 그녀의 것이겠지. 풍성함이란 그런 것일까. 내 마음이라는 포장지에 작은 선물을 담아 사랑하는 이에게 내어주는 것.
'풍성하게 존재한다'는 건 상대에게든 나에게든 무언가 내어줄 때 느껴지는 충만감 같아.
가령 이럴 때 나는 기분 좋은 풍성함을 느끼곤 해.
가까운 지인에게 밥과 술 혹은 밥과 차를 모두 사줄 수 있는 그런 날. 멀리 있는 지인에게 커피 쿠폰을 보내는 그런 오후. 가까운 이에게 책 선물을 하는 그런 주말. 좋아하는 초밥 도시락을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먹을 수 있는 그런 한 주. 갑자기 떠나고 싶을 때, 비행기표를 끊어서 바로 날아갈 수 있는 그런 계절.
그럴 때의 기분 좋음은 뭐랄까. 살아있음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그게 뭐라고, 막 삶이 내 손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
대뜸 '어젯밤에 무슨 꿈 꿨어?'라는 내 질문에 어리둥절해하는 네 모습을 보며, '오늘은 내가 그대에게 풀코스로 쏠 께'라고 말하는 그 순간에 설렘. 우리 멀리 있어서 함께 하지 못하지만, 이번 주 한가한 시간에 혼자 커피 한잔 하면서 서로를 생각하자, 서로의 안녕을 빌자,라고 쓴 문자를 발송할 때의 그 두근거림. 계절의 시작 즈음, 서점에 들러 좋아하는 지인들을 떠올리며 그에게 어울리는 책을 고를 때의 그 행복한 걸음걸음. 언젠가는 매일 점심, 고급 초밥 도시락을 먹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품고 맛보는 농어 초밥의 바다 맛 기쁨. 제주행 비행기 표를 끊으면서 아... 1시간이면 제주 아일랜드에 도착한다고? 한 마리 새처럼 자유자유한 기분 좋은 떨림.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 당신에게 그것은 무엇일지. 더 큰 소유는 아니기를. 오늘이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일상적인 것이기를. 미루지 말고 오늘 그 풍성한 감정을 누릴 수 있기를.
하루하루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유리병에 '기분 좋음'을 채워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좋겠다. 나를 기분 좋은 상태에 자주 담가주는 것. 오이 절여지듯이 서서히 기분 좋음에 취하는 병에 걸려버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