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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 도감(대학 편 3화)

이니셜 D

by 아포드




강의실에는 동양철학 강의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음.. 지난 시간에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까지 하셨습니다~"


과대표가 대답했다.


"아.. 십이연기였나.. "


교수는 무심한 듯 대답하며 가져온 서류철을 뒤적인다.


"지난 시간에 골치 아픈 거 했으니까 오늘은 오늘은 좀 재밌는 주제로 가볼까 해요."


"여러분들 혹시 중국 역사에 나오는 '달기'라는 여자 알아요?"


"에... 그러니까 이 달기라는 여자는 중국 은나라 말기 주왕의 첩으로 들어가서...."


중국 은나라 이야기에 등장하는 '달기'라는 인물에 대한 교수의 강의가 한창 이어지고 있던 순간이었다. 달기는 팜므파탈적 매력으로 은나라 왕의 총애를 받고 첩으로 들어가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왕가를 타락시킨 여성이다. 그런데 지선의 소녀 감성은 정작 달기의 화려한 일대기보다는 그녀의 네이밍에 꽂히고 말았던 것이다.


"키득키득... 오빠! 이름이 달기래!"


보나 마나 딸기를 떠올린 듯하다. 거기에 요염한 팜므파탈에 여기저기 발칙한 일들을 벌이고 다녔으니 그것들이 지선의 머릿속에서 뒤섞여 새콤 달콤 매콤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모양이다.


소곤대며 조금 맞장구를 쳐주자 하고 싶은 말이 많아졌는지 이런저런 수다들이 적힌 쪽지를 자꾸 접어 보내면서 연신 키득거린다.


"그만 조용히 좀 해.. 이러다 걸려.."


더 이상 받아주지 않자 지선은 또 내 어깨를 밀치며 앙탈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잉~ 왜~~"


"왜는 무슨 왜야 혼자 또 신나가지고서..."


그때였다.


"거기 두 사람 나가. 그리고 앞으로 내 수업 들어올 필요 없어."


감정이 결여되어 있는 싸늘한 말투가 강의실을 울렸고 이내 정적이 찾아왔다.


언제부터였는지 교수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고 시작부터 우리에게 경고가 아닌 퇴장을 알려왔다.


"아 교수님 죄송합니다. 앞으로 조용히 하겠습니다."


나는 부랴부랴 교수에게 사과를 했다.


"아니 됐고 둘이 그렇게 좋으면 나가서 떠들라고."


"두 사람 이름 뭐야?"


교수는 출석부에 지선과 나의 이름에 펜으로 표시를 하며 재차 내몰았지만 나가면 정말 끝일 것 같아 그저 굳은 표정으로 묵묵히 남은 수업 시간 동안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그렇게 수업이 끝나고 교수가 강의실을 떠나던 순간 위기감이 엄습해 왔다. 교수들은 개인적인 감정을 학점에 반영하는 일이 흔히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환이 두려웠던 나는 교수의 뒤를 따라갔다. 마침 그는 한적한 학교 주차장에서 담배를 피우며 쉬는 시간을 갖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옆에 있는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하나 뽑아 그에게 다가갔다.


"저.. 교수님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라는 멘트와 함께 음료를 건넸다.


"아~ 뭐..."


교수는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아서 의중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캔 커피를 건네받았다는 부분에서 조금의 안도감이 느껴졌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





시간은 흘러 학기말이 되었다. 여전히 그 동양철학 시간의 일이 종종 떠오르면서 걱정이 되곤 했지만 그 이후로는 떠든 적도 없었고 과제도 신경 써서 제출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감정도 느슨해지기 마련이니교수는 이제 그 일을 희미하게 기억하거나 혹은 잊었을지도 모르지 않겠냐며 부디 그날의 감정이 학점으로 표현되지 않기를 바랐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던 대학 생활도 끝나가고 있다.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마지막 기말고사 기간을 치르고 종강을 맞이한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서 언제의 대학 생활이었냐는 듯이 그날의 기억들은 빠르게 잊혀가고 있었다. 이제 졸업식 이외에는 더 이상 학교에 남은 볼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르바이트 출근길에 우체통에서 내 이름으로 온 우편 한 장을 발견하게 된다. 꺼내보니 학교에서 보낸 나의 마지막 성적표였다. 시간이 없어 읽어보지는 못하고 가방에 챙겨 넣었다. 당시 나는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철판 요리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아침에는 재료 준비를 하느라 바빴고 점심엔 메뉴를 만드느라 바빴기 때문에 우편을 열어보게 된 것은 늦은 오후쯤이었다.


음식 냄새에 찌든 몸을 이끌고 휴게소에 들어가 우편 봉투를 열고 뻔한 학교 안내 문구가 적힌 용지 뒤편에 숨은 성적표를 꺼낸다. 학교에서 학점에 문제가 있다거나 하는 연락은 없었으므로 졸업에 큰 지장은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나의 마지막 성적표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한 마음에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가 나의 시야에 소름 끼치는 한 구절이 들어왔다.


"동양철학 D"


D라니! 한편으로는 어떤 과목 보다도 신경 썼던 이 교양과목이 D라니!! 교수는 그날의 앙갚음을 잊지 않은 게 분명하다. 그날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뽑아 건네지 않았더라면 F를 줬을까?


금테를 두르고 있어 다소 유치한 디자인의 조리복과 조리모가 대학 성적표를 놓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을 한층 더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나는 다급히 지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혹시 너도 성적표 받았니?"


"응 오빠~ 받았는데 왜?"


"동양철학 점수 어떻게 나왔어? 난 D 받았거든.."


"헐! 진짜?! 오빠 어떡해!"


"넌 뭐 받았는데?"


"난 A..."


지선은 A를 받았다는 사실이 내 가슴에 마무리 일격을 가한다.


나를 D로 인도하고 자신은 A를 받은 그녀가 미웠다.

나만 D를 주고 그녀는 A를 준 교수가 미웠다.


손에 묻은 철판 볶음 소스가 성적표에 베이도록 움켜쥐었다가 마음을 진정시킬 무렵 나는 깨달았다.


은나라의 왕이 그랬듯 나 역시 그랬던 것이었다. 친근하게 다가와 나를 현혹하고 종국에는 나의 학점을 몰락시킨 그녀.


그래... 나 또한 '달기'에게 당하고 말았음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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