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엔 조르바를 만나요ㅡ이애순>를 읽고
아버지를 그리며
ㅡㅡ 어린왕자
내가 아버지를 그리며 눈물 흘린 것은
순전히 홍시 때문은 아닙니다.
엄마가 되려고 하던 그 해
당신은 편찮으신 몸으로 대문을 고쳤습니다.
당신 떠난 후
남은 사람 안전하게 살 수 있겠다 싶으셨겠지요.
철문이 삐그덕거려도
열쇠고리에 녹이 슬어도
아버지 당신이 계신다는 것만으로
안전한 삶이었는데
떠난 후가 애달프셨겠지요.
당신은 아셨습니다.
자꾸 집으로 가자했던 이유를
평생을 일궈온
삐그덕거리던 철문이 고장 난 집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으셨던 거지요.
그리고 슬며시 건넨 검은 봉다리
혼자 먹으라며, 건넨
그 붉은 홍시를 먹던 큰아이가 당신을 대신한
이 세상의 선물이었습니다.
비 오는 날은 낭만이다. 할 일도 없고 갈 데도 없는 그저 텀블러에 커피 가득 채우고 정자에 앉아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ㅡㅡ<비 오는 날엔 조르바를 만나요ㅡ이애순 수필> 중
나이 60을 향해 갈 때 사람 속에 어울리려면 자기만의 무기가 있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나잇값에 맞는.
뭘까. 나에겐 뭐가 있을까. 작가가 제시하는 탁월한 음식 솜씨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는 구수한 입담도 없고, 궂은일도 척척 할 수 있는 재빠른 일머리도 없다. 무엇으로 나잇값을 하리.
난 이도 저도 없는 길을 잃고 헤매는 중년이지 싶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홀로다. 이 긴 세월을 홀로 누리는 시간이 반년은 족히 되리라. 그렇다면 중년을 넘어서는 지금부터 홀로서기를 연습해야 한다. 아니 실전이다.
인생을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이웃집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수 있고, 시장에서 만나는 사장님의 이야기도 쓸 수 있고 나와 연관이 있건 없건 스치는 인연은 인연으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모두 낭만을 간직한 그리움들이다.
작가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멍게 한 접시'로 펼쳤다. 결혼해 타지로 내려오기 전 우연히 퇴근길에 아버지를 만난 남편이 멍게 한 접시로 소주를 대접했던 신혼시절, 그것이 처음이자 거의 마지막이 되었다며 회상한다. 간병하다 명절이 돌아오고 시댁 먼저 갔다 오겠다며 돌아설 때 대답도 않고 바라보시던 아버지 당신의 허허로운 그 눈길이 마지막이었다고. 끊어놓은 차표 생각에 외면하고 돌아섰던 그 짧은 교류가 상처로 남았다는 이야기에
정말로 나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못생긴 거 먹지 마라,
멍게가 먹고 싶다던 당신 딸에게
멍게 한 접시 못 사 준 당신이
모르긴 해도
그저 한스러우셨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때의 어린 나는 이제 엄마가 되어
당신이 못 보고 떠난 그 손자와
멍게 한 접시로 막걸리 앞에 놓고
당신을 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