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웃고 있다
내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다닐 땐 충효일기를 썼다. 지금은 거의 사생활을 노출하는 것이라 하여 쓰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때는 매일매일 써야 했고 매일매일 선생님께 검사를 받아야 했다. 아이들의 일기 숙제는 곧 엄마의 숙제가 되기도 했다. 쓸 것이 마땅찮은 날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루의 일과를 메꿔야 했다. '손도장 그림'도 어떤 책을 보고 영감을 얻어 아이에게 해 보라 했던 작품인데 그때는 신선했다.
내 손에 잡힌 아이의 일기장은 한여름의 정점이었다. 또박또박 깔끔하고 정확하게 쓰인 글자는 새삼 아이의 무해한 성격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아마 그가 초등1학년 때 우리는 에어컨을 샀나 보다.
ㅡ에어컨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는데
우리 집에 새로 산
멋진 에어컨
학교 갔다 돌아와서
땀을 닦아주는
선풍기보다
시원한 에어컨
수업이 없어 하루 온종일을 쉬는 하루다. 아직 바깥은 한여름이라 나서기 힘들고 집에 가만히 있자니 시간이 아까워 뭘 할까 고민하다 미뤄뒀던 치과를 가기로 했다. 치과는 꼭 가야 하는 곳이지만 그러기에 어지간하면 가기 싫은 곳도 치과다. 단골로 가던 치과가 코로나 이후로 문을 닫으면서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발 넓은 친구에게 가까운 치과를 소개받고 진료 시간에 맞춰 외출 준비를 하다 화장대 아래 마련된 책꽂이에 꽂힌 아이들 일기장에 눈에 들어왔다.
호기심에 이끌려 일기장을 펼쳤다. 큰아이가 초등 3학년 때 쓴 일기장, 작은 아이가 초등 1학년 때 쓴 일기장이 내 손에 잡혔다. 그 아이들의 사생활을 훔쳐보는 것이 재미있고 즐거웠고 반가웠다. 아마 그때의 아이들은 자기가 한 일들을 거짓 없이 자세히 써 놓았다.
일기를 읽다 웃음이 터지는 바람에 몇 장을 찍어 일하고 있을 다 큰 아이들에게 보냈더니 더 크고 환한 웃음이 건너온다. 재미있단다. 그랬나? 갸우뚱거려지는 고개도 얼핏 느껴진다. 입가에 띤 엷은 미소가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든다. 한여름 더위가 싹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