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가 평안한
잠이 쏟아진다. 눈을 뜨려 안간힘을 써도 자꾸만 눈이 감긴다. 고개를 쳐들면서 흔들어도 보고 입을 벌렸다가 깊은 탄식을 하기도 하고 이내 고개를 뒤로 젖히기도 한다. 그러나 무거운 눈꺼풀을 이길 수 없다. 의자 등받이에 고개를 갖다 대니 자동적으로 입이 벌어진다. 아~ 미치겠네
햇살은 거실 안쪽면을 채우고도 따사롭게 흩어져 있다. 옴베르토는 내 키보다 훌쩍 커 있고 아보카도 나무 잎사귀도 여러 갈래로 새로운 길을 뻗고 있다. 무시할 수 없는 햇살의 힘이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다. 거실을 차지한 햇살도 문틈의 그림자에 끼어 한 끗 어긋난 차이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지만 의자 하나 놓고 잠을 청해보기엔 안성맞춤이다. 의자를 들고 거실로 들어와 중앙에 펼친다. 햇살을 마주 보며 받아들이고 있다. 이미 정신의 반은 잠에 취했다.
먹다 남은 커피를 들이키며 읽다 만 소설의 끝을 향한다. 도서관 사서가 추천하는 김애란 소설 <안녕이라 그랬어>를 펼쳐두고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고 있다. 인기가 있다길래 예약이 잡혀 있던 것을 내 차례가 되어 이번에 빌리게 된 책이다. 소설집이라 그리 환영하는 부류는 아니지만 내 차례가 언제인지 몰라 잊고 있던 것을 어제 도서관 사서가 내게 건네주었다.
좀 정신이 차려졌나 싶을 때 요의를 느꼈다.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나오다 배도 고프지 않은데 자연스레 발걸음이 주방으로 향했다. 어제 사온 배 하나를 꺼내 들고 깎았더니 칼이 잘 들지 않는다. 반쪽을 깎아 들고 다시 거실 한복판 의자로 와서 덮었던 책을 다시 펼치며 깎아놓은 배로 손이 갔다. 포크를 가져오지 않았다. 다시 일어서기 귀찮아 손으로 집어 들고 한 입 우거적 베어 물었다.
손에 묻은 과일즙을 닦아내려 손은 당연히 치맛자락으로 뻗는다. 휴지도 아닌 것에 휴지인 양 한번 문질렀다가 그 손으로 책장을 넘기고 다시 또 배 하나를 집어든다. 더러운 일인 줄 알면서도 더럽다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만 계산하고 만다. 수분은 많은데 질감은 부드럽지 않아 씹히는 맛이 거칠다. 반쯤만 잘라온 걸 잘했다 축하할 일라며 혼자 만족한다. 접시를 내려놓을 데가 마땅치 않아 들고 있다가 식탁으로 다시 발을 옮긴다.
해가 지는 것도 아닌데 어스름이 내려앉는다. 먹구름이 끼려나 날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며 시계를 보니 아직 다섯 시가 채 안 됐다. 책은 이미 덮여 있고 거실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몸은 의자에 완전 박혀 굳은 듯 움직임이 없다.
그대로 스르륵 잠이 들었나 보다. 정신이 몽롱해지진 상태로 눈을 한번 뜨고 밖을 보니 흐릿하다. 정적을 깨는 카톡소리에 혼미해진 정신이 번쩍 트이며 눈은 저절로 핸드폰으로 향한다. 저녁을 먹고 들어온다는 큰아들의 문자다. 나는 저녁을 뭘 먹지? 운동이나 갈까 어제도 쉬었는데. 깊은 잠에 빠지지 못하고 하루 온종일을 흐지부지 보낸 것 같아 아쉬움이 밀려드는 시각이다. 수업이 없는 하루 오늘 평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