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뜨거웠던 기억 속으로

아홉 살 나의 인생은ㆍ

by 어린왕자

무화과가 익어가면 가을이 오고 있다는 소리다.
이 계절 나의 아홉 살은 많이 어설펐다.

서울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온 나는 서울 말씨를 쓴다고 친구들한테 놀림을 받았다. 그들끼리 손을 잡고 길게 원을 그리며 길을 걷지 못하게 막아서는 날이 많았다. 그 후로 그들과 어떻게 친해지게 되었는지 감히 기억엔 없지만 강산이 몇 번 변한 오랜 세월을 그들과 함께 이고 살고 있다.

우리도 셋방을 살았다. 부엌 하나에 방 한 칸이 전부였던. 좋았던 것은 주인집에 커다란 무화과나무가 담장을 넘어 길가로 가지를 뻗쳐 자랐다는 것이다. 함부로 따 먹을 수 없었지만 길가에 떨어진 무화과를 주워 먹는 자유를 누리며 지독히도 가난한 삶을 보냈다.

요즘은 무화과를 돈으로 산다. 맛이 예전만 못한 무화과지만 맛으로 사는 게 아니라 추억을 사는 것이다. 세월은 추억을 먹고사는 것이라 여기는, 돈 주고도 못 사는 어릴 적 내 아홉 살의 기억은 여민이의 아홉 살 인생보다 아팠다.

그 컸던 무화과나무와 부엌 딸린 서너 평 정도 되는 한 칸짜리 방은 '우리 것'이 아니었다. 그걸 알기까지는 나보다 두세 살 어리거나 많았던 아이들이 모두 친구 먹었다는 사실을 안 것보다 훨씬 이후에야 그걸 알게 되었다.




여민이는 세상을 느낄 만할 때쯤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의 차이를 알았으며, 한 학년 올라갈 때쯤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때려야만 월급이 나온다는 기종이의 말에 선생님을 '월급기계'라는 별명도 붙여줄 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세상엔 쓸모없는 것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개똥은 나무 거름을 주는 데 쓸모 있고 돌멩이는 장독 뚜껑 눌러 놓는 데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단지 골방철학자처럼 돈을 벌지 않는다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란 것도 안다.

세상에 쓸모없는 인간은 없다.


인생을 살다 보면 분명 악당도 만난다. 가난한 시대에도 가난한 사람들 등쳐 먹고사는 풍뎅이영감 같은 악당도 있다. '야아도(선점)'를 먼저 했다고 월세를 받아먹는 야비한 악당에겐 그 악당보다 더 교활해져야 이긴다는 것을 아버지로부터 배우면서 그 악당을 물리친 아버지가 더 교활한 사람이란 것도 여민이는 알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어떤 마음일까. 며칠 학교에 오지 않는 우림이가 죽었으면 어쩌지 깊은 고민에 빠진다. 토굴할매가 죽었다. 꽃 향기가 났다.

"죽음이나 이별이 슬픈 까닭은 우리가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기 때문이야. 잘해주든 못해주든, 한 번 떠나 버린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지ㆍㆍㆍ. 사랑하는 사람이 내 손길에 닿지 못하는 곳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슬픈 거야."

아홉 살 여민이는 인생을 배웠다. 자질구레하고 못나고 아프고 힘든 삶 속에도 앞으로 나아갈 희망은 반드시 있고 그렇기에 가파른 세상으로 낑낑거리며 올라야 할 이유가 있다고.




아홉 살 인생,
그 이후 열 살ㆍㆍㆍ의 인생도 그러하듯.

무화과에 실린 나의 그 가난했던 아홉 살의 추억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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