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경주
가을 경주를 찾았다. 예전에 비해 가을의 단풍이 빚어내는 멋스러움이 덜하다. 마음이 메말라서일까, 꽃잎도 힘없이 바스러져간다. 켜켜이 쌓인 돌부처님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가을 바스러짐이 왠지 모르게 아프다.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한 모금 퍼다 살짝 낙엽 위에 뿌려주면 어떨까. 제일 높은 곳에 앉은 돌부처는 비바람에도 끄떡없을 것 같다.
경주의 가을은 늘 설레게 하는 뭔가가 있다. 몇 해를 가도 색다른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이른 아침 물안개를 보기 위해 새벽길을 달렸던 때도 있었고 제일 예쁘고 화려했던 가을을 품에 넘치게 만끽한 해도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가을이 예쁘지 않은 해가 많았다. 올해도 출사 하시는 분들의 사진이 인스타에 오르지 않아 기대를 내려놓지만 그래도 지나치면 안 되는 뭔가가 있어 결국 가을 경주를 찾게 된다.
올해 경주의 가을은 이번 주(중순 경)가 제일 예쁠 것이라 했다. 그래서 은행나무길이 예쁜 도리마을을 제일 먼저 가지 않을 수 없다. 목적지에 다다를 때쯤 멀리 보이는 은행나무 잎사귀들이 푸르게 보인다. 그래도 예쁠 거야 주문을 외며 발을 디딘 도리마을은 어느새 절정의 시간은 지나고 은행나무잎이 바닥에 떨어진 채 미처 떨어지지 못한 은행잎을 안타까이 바라보고 서 있다. 그렇구나, 그때만큼 예쁘지 않아도 예쁘구나!
모든 게 때가 있다는 말이 빈 말은 아니다. 청춘도 가장 아름다울 때가 있듯 도리마을 은행나무도 가장 예쁠 때를 지나쳤다. 그러나 어느 시기든 황금기는 자신이 만들기 나름 아니던가. 은행나무 아래 결결이 곱게 떨어진 은행잎도 너무 예쁘다. 매달린 가을도 바닥에 뒹구는 가을도 제각각 아름답다. 융단을 깔아놓은 듯 햇살이 비치면 비단보다 더 고운 빛을 발한다. 결결이 곱다.
도리마을을 지나 용담정으로 향했다. 용담정으로 향하는 농촌의 마을길은 한산하다. 수운 최제우 생가를 지나 용담정으로 오르는데 도로를 포장하느라 분주하다. 예전의 멋스러움이 사라지고 너도나도 자연을 즐기러 오는 사람들에게 자연은 많은 것을 베풀고 있다.
용담정의 가을도 예년의 멋스러움은 없다. 여기도 인공의 손길이 자꾸 거쳐간다. 초입 도로를 넓히고 있더니 오르는 산길도 더 넓어졌다. 낭떠러지에 나무 데크가 생기고 이리저리 뒤엉켜 있던 나무뿌리들은 어디로 갔는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자연에 인간의 욕심이 덧입혀져 살짝 눈살이 찌푸려진다. 자연이 쌓아 올린 견고한 돌무덤은 굳건했으면 좋으련만.
두고 온 산길이 발걸음을 잡는다. 오를 때 보지 못한 풍경이 눈앞에서 향기를 뿜어낸다. 자꾸 뒤돌아보고 싶은 마음에 또 사진 한 컷을 누르고 만다.
추녀 끝에 매달린 가을이 오래도록 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