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ㅡ황석영
개똥지빠귀 한 마리가 머나먼 북방 대륙에서 날아와 반도의 남쪽 서해안에 인연이 되어 팽나무가 생겨난 지 이백 하고도 오십 해 가까이 지났을 무렵, 사람의 세상은 조선이라는 왕국이었다. ㅡ본문
팽나무의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라 쌓여가는 겹겹의 층이라 할 만큼 모든 기억의 다른 층을 팽나무는 형성하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바닷물이 들어온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뀐다는 표현을 작가는 이리 아름답게 구사하고 있다.
어릴 적 스님의 보은으로 목숨을 건진 한 아이가 이곳 옥녀봉으로 와서 우람한 팽나무 하나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움막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다 몇 해가 지나 제법 큰 나무가 되었을 때 고목과 한 식구가 된다. 할매요, 당신의 자식이라오. 내가 키웠어요. 그러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을 잃어버리며 수도자의 길을 간다.
하나둘 팽나무가 있는 이곳으로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하제라는 마을 이름이 붙여지고 깨복쟁이 섬으로 부자마을을 이룬다. 어쩌면 할매 덕분이리라. 당골네(무당)도 이곳에 들어와 살았고 어느 날 꿈에 할매가 나타나 당골네의 집을 옮기라 하자 당골네는 할매의 말을 듣고 집을 옮긴다. 할매가 모든 사람들의 거처가 되어 두고 보금자리가 되어 주고 집터가 되어 준다.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나무였다.
내가 살던 마을에도 있었던 오래된 당산나무가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마을의 행사가 있을 때 당산나무 아래서 제를 지내며 안녕을 빌었던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선하다. 온 힘을 다해 당산나무는 그 마을을 지겨주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마을 사람들은 떠났지만 남아 있는 사람에게도, 산 아래 화려한 주택을 지으며 터전을 마련하는 외지인들에게도 그 당산나무는 지금도 평화를 빌어주고 있다.
하제 마을의 육백년 넘은 팽나무도 그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나무이리라.
조선이라는 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와 억압당할 때 국가에서는 천주교를 억압하지만 가난한 백성들은 모두가 평등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저항이든 종교든 자기를 치유해 주고 위무해 줄 수 있는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할매는 성심껏 그들을 치유해 주었고 보듬어 주었다.
해가 바뀌고 바람이 바뀌어 팽나무 근처에도 군산항구가 생겨나고 그곳의 팽나무는 더 이상의 서낭님의 팽나무가 아니었다. 일본육군비행학교의 조선분교가 세워지면서 작은 팽나무는 결국 베어지고 하제 마을이 강제 이주를 당하면서 코쟁이들의 사용처가 되어버릴 줄을 어찌 알았을까. 그런 와중에도 함부로 베어낼 수 없을 만큼 위엄이 있었던 큰 팽나무는 나라를 지켰고 마을 사람들을 지켰다.
하여 그 마을을 떠나온 동수는 새벽길을 달려 하제 마을로 뛰어갔다. 그곳에 큰 팽나무는 군산을 지키며 서 있었고 어디 갔다 이제 오냐며 반갑게 그를 반갑게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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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는 가장 보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감정과 전혀 다른 서술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반전 매력이 있다. 또한 모르고 있었던 개똥지빠귀의 장황한 생태 이야기에 나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되기도 했다. 그렇게 <할매>는 개똥지빠귀의 이야기로 앞부분을 장식하더니 큰팽나무를 중심으로 본론이 시작되어 조선의 한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사가 가운데 한 획을 긋는다. 그리고는 현대의 정치사로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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