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현의 자취를 찾아가는 길에는 바위가 많았다.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곳곳에 밧줄이 설치되어 있었고, 오르기 힘들까 봐 바위에 쇠붙이를 박아 계단을 만들어 놓은 곳도 있었다. 어떤 곳은 물이 말라서 계곡에 나뭇잎이 물처럼 흐르고 있기도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물이 흐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보이지 않던 물이 어느 지점에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으니까.
바윗길을 오를수록 물소리가 아래만큼 세차지는 않았다. 계곡의 물소리가 세차다면 강 가까이 왔다는 뜻인지 모른다. 순천동천이 바다에 다다라 에스자 모양으로 계속 굴곡을 그리듯이, 해가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듯이 자연에는 당도가 임박했음을 암시하는 신호가 있다. 그처럼 삶의 길에 굴곡이 있고 어둠이 짙다면, 삶의 이정표는 전환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리는 것일까.
발걸음은 선동 깊숙한 곳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이자현 유적지에 도착. 처음 온 날, 진락공 세수터라는 안내판을 보고는 그 뒤에 있는 계곡이 세수터인 줄 알고 거기서 어슬렁거렸는데. 그날은 안내판 바로 앞에서 발견했다. 평평한 바위에 간격을 두고 파인 두 개의 샘과 그 사이를 이어주는 길고 좁은 홈을. 김상헌이 쓴 청평산 유람록에 “석대(石臺) 아래에는 돌을 파낸 곳이 두 군데이다. 진락공이 손을 씻던 곳이다.”라고 적혀 있으니 진락공 세수터를 제대로 찾기는 찾았다.
진락공 세수터
그런데 그 유적을 세수터라고 하는 게 좀 의아했다. 자연 속에서 산다면 세수는 계곡에서 하지 굳이 돌을 파서 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은 어찌하여 그것을 세수터라고 생각했을까? 이자현은 왜 돌을 파내어 샘터를 만들었을까?
의문이 이는 와중에 그 유적을 옛사람과 다른 시각으로 보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900년 전 우리 茶(차) 문화 보여주는 유산이 ‘세수터’ 신세로 전락”이라는 제목의 신문 기사에서는 조선 문인들이 세수터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그 유적을 찻물터라고 주장했다. 이자현의 사적을 기록한 <청평산문수원기(淸平山文殊院記)>를 새긴 비의 뒷면에 보이는 “음명다(飮名茶:이름난 차를 마심)”라는 표현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었다.
1125년(인종 3) 의천의 제자인 혜소가 지은 이자현의 제문이 사적비의 뒷면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박세당에 따르면 이처럼 비석에 제문을 새기는 것은 중국에서는 흔히 행하는 풍속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자현의 경우가 처음이다. 그렇게 최초로 비석에 새겨진 제문에 “배가 고프면 향기로운 밥을 먹고 목이 마르면 좋은 차를 마시니 오묘한 작용이 막힘이 없어 즐거움이 끝이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는 것이 바로 선가의 가풍이다.”(이장용, <이수의 보문사 시에 차운하여[次李需普門寺詩韻]>) 도의 경지를 말하는 이러한 일상에서 주목되는 점은 바로 차 생활이다. 문맥으로 보자면 차는 그에게 물과 같은 음료였다고 할 수 있다.
예종과 인종 등 고려 왕이 이자현을 만나기를 청하거나 그를 만난 후 하사한 예물 목록에 차가 빠지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무슨 차를 하사했는지 밝히지 않았으므로 알 도리는 없지만, 1123년(인종 1) 송나라 휘종의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의 견문록『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을 보면 이자현이 생존한 당시 고려인의 차 선호도를 짐작할 수 있다.
“고려에서 생산되는 차는 맛이 쓰고 떫어 마실 수 없을 정도이다. 고려인은 오직 중국의 납차(臘茶)와 용봉차(龍鳳茶)를 귀하게 여긴다. 황제가 하사해 준 것 이외에도 상인들이 가져다 팔기 때문에 근래에는 차 마시기를 매우 좋아한다.”
고려시대에는 왕실만이 아니라 문인과 승려 등 귀족층에 차가 폭넓게 수용되었다. 궁중에는 다방(茶房)이라는 관부를 두어 다사(茶事)를 주관하게 했으며, 차를 세공으로 바치는 다소(茶所)가 있었다. 차는 왕실에서 행해지는 각종 의식은 물론 외교상의 예물이나 고위 관료의 상(喪)에 부의로 쓰이기도 했다. 게다가 차를 파는 다점(茶店)은 백성들의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노무라미술관,『다도와 한국의 전통 차문화』참고)
이규보의 경우 “차로 낙을 삼을 만하니, 어찌 날마다 술에 취하리오”라고 할 정도로 차를 즐겼는데, 차는 “마음을 씻어 물 같이 맑게 한다.” 그래서일까. 빙설처럼 맑은 시를 얻으려고 시를 쓰기 전에 차를 마시는 시인도 있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왕과 신하들이 죄인을 사형시킬 것인가 유배를 보낼 것인가 하는 결정을 앞두고 다례 의식을 행했다는 것이다. 다시(茶時)라고 하는 그 의식은 조선조까지 이어졌다. 차가 의사 결정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인데(윤성재,「고려시대의 차[茶]와 다방(茶房)」, 157면) 차의 역할은 마음을 맑게 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당나라 시승(詩僧) 교연의 시 <차를 마시는 노래[飮茶歌誚崔石使君]> 일부를 보자. “한 잔 마시면 혼미함이 씻겨, 마음이 천지에 가득하도록 상쾌하고. 두 잔 마시면 정신이 맑아져, 문득 뿌리는 빗방울에 가벼운 먼지가 씻긴 듯하고. 세 잔 마시면 득도하니, 어찌 번뇌를 없애려고 고심할 필요가 있으리오.”
그러니까 차는 궁극적으로 득도의 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만년에『능엄경』을 암송할 정도로 불법을 신봉한 이규보는 “늙어도 물은 길을 수 있으니, 한 잔의 차로 참선 시작하네”라고 읊조렸다. 이규보의 시구절과 같이 차 한 잔이 참선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참선이 생활인 이자현에게 차란 생존에 필요한 밥과 같고 물과 같은 것일 뿐만이 아니다. 그에게 차란 선과 같은 것이 아닌가.
“거울은 가인(佳人)을 따르고, 돌솥[石鼎]은 도사를 따른다”라는 말이 있다. 그처럼 차를 끓이는 돌솥은 선 수행을 하는 승려나 도사의 필수품이다. 옛 그림 <고사한일도(高士閑日圖)>를 보아도 시동이 돌솥에 차를 끓이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차는 정신이 한가로운 도의 경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재관, <고사한일도(高士閑日圖)>
그런데 해소되지 않는 의문 하나. 왜 바위샘을 만들어 찻물을 길어야 했을까?『다신전(茶神傳)』「품천(品泉)」에서 “차는 물의 신(神)이고, 물은 차의 체(體)다”라고 했다. 차가 정신이라면 물은 육체다. 좋은 물이 아니면 다신은 나타나지 않는다. 차가 제 맛을 낼 수 없다는 뜻이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것과 같다. (정민,『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321면) 좋은 차를 선택하는 것 못지않게 좋은 물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찻물로 가장 좋은 물은 바위틈이나 돌에 흐르는돌샘물이라고 한다.(『차생활문화대전』참고)
당시 고려인이 좋은 찻물을 찾아 애쓰는 정경을 문인들이 남긴 시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를테면 평양 박금천은 물이 달고 시원하여 차 달이기에 좋은 물이라고 소문나 도성 사람들이 찻물을 길으러 오가느라 종일 수선스럽고, 좋은 샘물을 철병에 담아 지인이 선물로 보내 주어 그 물로 차를 끓이기도 했다. 이규보의 표현을 빌리면 이렇게 맛을 낸 “향기로운 차는 진실로 도의 맛[道味]이다.” 차 맛이 곧 도의 진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수터 또는 찻물터로 의견이 분분한 이자현의 유적은 차 생활과 선 수행이 하나라는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정신을 말해주는 터가 아닐까. 차를 마시는 일상이 바로 도라는 가르침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