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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롭 Mar 25. 2024

이자현의 유적을 찾아서 2

벼랑에 하얗게 매달린 얼음장 아래로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무명의 폭포 맞은편에는 높다랗고 평평한 바위. 명찰처럼 달고 있는 안내판에 적힌 이름은 척번대(滌煩臺). 번뇌를 씻는다는 뜻을 가진 바위는 폭포를 관상하기에도, 명상하기에도 맞춤한 듯한 자리에 놓여 있었다. 바위를 자연스럽게 제자리에 배치하는 솜씨라니.



척번대(滌煩臺)



보이지 않는 손이 솜씨를 부려 마련한 바위 위에 가부좌한 이자현은 천 년 전에 떠나가고. 삼백 년 만에 그가 다시 돌아왔는지 또 한 사람 김시습이 찾아와 같은 자세로 앉아 있다 떠나가고. 그 후 아무도 오지 않았다. 두 사람의 자취를 찾아 많은 이들이 오고 갔으나 바람이 앉았다 가듯 사라졌을 뿐.


거대한 바위는 갈라지고 그 위에 판자 모양의 돌들이 포개져 있는 척번대. 시간을 첩첩이 쌓은 듯 바위가 층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한번 앉아봐도 될까.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는 여럿이 앉을 수 있을 만큼 커 보였는데, 그 위에 올라서니 딱 한 사람이 앉을 만한 크기였다. 그러니까 척번대는 한 사람을 위한 자리. 제 몸이 다 부서지도록 기다릴 것이다. 단 한 사람을. 다시 천 년이 흘러 천 겹으로 갈라진다 해도 거기 남아 있을 바위. 단 한 사람을 위해.



척번대(滌煩臺)



눈이 내려앉아 젖은 바위가 눈물에 젖은 듯 보였다. 아직 주인은 도착하지 않았다. 그사이 잠시나마 척번대를 차지하고서 고개를 드니 눈 그친 하늘이 눈을 맞추고. 정면을 바라보자 폭포수가 거침이 없었다. 눈을 감으니 개울물이 가슴속으로 흘러들고, 솔바람이 뼛속까지 스미는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마음에 낀 때가 떨어져 나가 말개지는 기분. 본성을 그대로 간직한 자연 속에서 내가 나로 돌아오고 있었다.


종국에 망각한 자신을 되찾아 대자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해도 척번대를 오래 누릴 수 있는 이는 천 년에 한 사람. “명예의 길에 열중한 많은 이, 누가 여기서 늙을 수 있으리오.” 그렇고 말고. 구사맹이 척번대에 올라 중얼거린 때나 그로부터 오백 년이 흐른 지금이나 사람들 마음이 쏠리는 방향은 그리 다르지 않으니. 거창한 욕망을 추구해서만은 아니다. 사는 일에 골몰하느라 잠깐의 틈조차 내려면 벼르고 별러야 하니까.


문장ㆍ도교ㆍ불교ㆍ의약ㆍ음양술ㆍ말타기ㆍ활쏘기ㆍ거문고ㆍ바둑. 아, 다 적기에도 숨이 가쁜 이 많은 것들에 능했다는 곽여. 그도 관동 안찰사로 근처에 왔을 때야 청평산을 찾았다. 물소리도 산색도 바뀌는 봄. 걸을 때마다 늘어뜨린 옥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는 옷차림으로 산속으로 들어온 까닭은 친구 이자현을 만나기 위해서. 두 사람은 과거에 함께 급제했으나 한 사람은 벼슬길로, 한 사람은 베옷 차림으로 선도(禪道)의 길로 갈라져 삼십 년이 지난 때였다.


이자현이 청평산으로 떠나며 다시는 서울에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누구라도 산으로 오지 않으면 그를 만날 일은 없을 터였다. 벗을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가슴에 넘쳐흘렀을 테지만 정작 마주하고는 별말이 없는 두 사람. 처음 만나 인사한 뒤 30분간이나 같이 묵묵히 앉아 있다가 오늘 저녁은 퍽 재미나게 놀았다 하고 헤어졌다는 칼라일과 에머슨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들도 시를 주고받았을까?


이자현과 곽여 사이에 시가 놓여 있었다.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지만 가슴에 담긴 말 가운데 정수만을 골라 침묵과 함께 엮은 시. 두 사람만 알았을 마음 한 자락이 여기에 있다.



淸平山水冠東濱  

청평의 산수는 해동에서 으뜸인데

邂逅相逢見故人  

여기서 뜻밖에 벗을 만나 마주하네

三十年前同擢第  

삼십 년 전 같이 과거 급제했는데

一千里外各栖身  

천리 밖 멀리 따로 깃들여 살았네

浮雲入洞曾無累  

골짜기에 드는 뜬구름 매임이 없고

明月當溪不染塵  

시내 비추는 달 홍진에 물들지 않네

目擊忘言良久處  

보고도 말을 잊고 한참 앉았노라니

淡然相照舊精神  

오랜 친구의 담박한 심정 알겠네

곽여, <청평 이거사에게 주다 [贈淸平李居士]>     



『고려사』에 따르면 예종은 자신의 부름을 거절하고 산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자현에게 그의 동생 이자덕을 보내 설득하면서 사모하는 마음을 표현한 시를 하사했다. 끝내 지금의 서울인 남경 행재소에서 이자현을 만났을 때 물었다. 천성을 수양하는 일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한 일은 곽여도 들어서 알고 있었을 테지만, 직접 마주한 순간.


웃으며 벗을 맞이했을 이자현. 정처 없는 구름처럼 자유로워 보이고 온몸으로 발산되는 본성의 청명한 기운은 밝은 달 같았으리라. 곽여의 가슴에 쌓인 말들은 그를 대하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어쩌면 절로 눈물이 났을지도. 내가 처음 만난 한 어른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눈물이 흘렀던 것처럼. 곽여는 할 말을 잊고 달을 올려다보듯 그를 보았을까. 밝은 달 같은 거울에 마음을 비춰보았을까. 마주 앉아 말이 없는 곽여가 애초 물으려 했던 말을 이자현은 묵묵히 알아듣고 시로 답했다.


 

暖遍溪山暗換春  

따뜻한 기운이 산수에 퍼져 가만히 봄으로 바뀌는 날

忽紆仙仗訪幽人  

신선의 의장 드리우고서 홀연히 산사람 찾아주셨네

夷齊遁世唯全性  

백이숙제는 천성을 보전하기 위해 세상 피한 것이요

稷契勤邦不爲身  

직과 설은 일신 위해 국사에 부지런한 것이 아니지

奉詔此時鏘玉佩

 왕명을 받들고 온 이때 쟁쟁 패옥 소리 울리는데

掛冠何日拂衣塵  

어느 날 벼슬 그만두고 옷의 먼지를 털어내려는가

何當此地同棲隱  

어찌 반드시 이곳에 은거하여 함께 살아야 하리오

養得從來不死神  

본래부터 가진 불사의 정신을 기를 수만 있다면     



왜 산에 사는가 묻는다면? 세상에서 청절로 이름난 백이와 숙제는 왜 세상을 피해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먹고살았을까. 그 마음에 견줘 보면 자신의 마음도 다르지 않다는 것. 오직 진정한 자신으로 살기 위해서. 이유는 그뿐. 벗은 왜 벼슬한다고 여기는가 묻는다면? 태평성대를 이룩한 순임금의 어진 신하 직과 설이 국사에 애썼듯이 곽여가 벼슬을 하는 까닭도 단지 일신의 부귀영화 때문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이리라는 것.


각설하고, 그대 언제 은거하려는가? 이자현이 곽여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함께 살자는 말이 아니다. 굳이 산속이어야 할 필요는 없으니. 어디서든 자기 안에 깃든 불멸의 성품을 양성할 수만 있다면. 그때가 부디 늦지 않기를 바랐을 텐데. 이자현과의 만남이 곽여의 결심에 영향을 미쳤을까. 시간이 흐른 뒤 곽여는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김해로 내려갔다. 1083년(순종 1) 급제한 이들 중에 고관은 아무도 없고, 이자현과 곽여 등이 모두 벼슬을 그만두고 처사가 되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그해의 합격자 명부를 처사방(處士榜)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자현의 자취를 찾아가는 길에는 바위가 많았다.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곳곳에 밧줄이 설치되어 있었고, 오르기 힘들까 봐 바위에 쇠붙이를 박아 계단을 만들어 놓은 곳도 있었다. 어떤 곳은 물이 말라서 계곡에 나뭇잎이 물처럼 흐르고 있기도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물이 흐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보이지 않던 물이 어느 지점에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으니까.


바윗길을 오를수록 물소리가 아래만큼 세차지는 않았다. 계곡의 물소리가 세차다면 강 가까이 왔다는 뜻인지 모른다. 순천동천이 바다에 다다라 에스자 모양으로 계속 굴곡을 그리듯이, 해가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듯이 자연에는 당도가 임박했음을 암시하는 신호가 있다. 그처럼 삶의 길에 굴곡이 있고 어둠이 짙다면, 삶의 이정표는 전환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리는 것일까.


발걸음은 선동 깊숙한 곳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이자현 유적지에 도착. 처음 온 날, 진락공 세수터라는 안내판을 보고는 그 뒤에 있는 계곡이 세수터인 줄 알고 거기서 어슬렁거렸는데. 그날은 안내판 바로 앞에서 발견했다. 평평한 바위에 간격을 두고 파인 두 개의 샘과 그 사이를 이어주는 길고 좁은 홈을. 김상헌이 쓴 청평산 유람록에 “석대(石臺) 아래에는 돌을 파낸 곳이 두 군데이다. 진락공이 손을 씻던 곳이다.”라고 적혀 있으니 진락공 세수터를 제대로 찾기는 찾았다.



진락공 세수터



그런데 그 유적을 세수터라고 하는 게 좀 의아했다. 자연 속에서 산다면 세수는 계곡에서 하지 굳이 돌을 파서 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은 어찌하여 그것을 세수터라고 생각했을까? 이자현은 왜 돌을 파내어 샘터를 만들었을까?


의문이 이는 와중에 그 유적을 옛사람과 다른 시각으로 보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900년 전 우리 茶(차) 문화 보여주는 유산이 ‘세수터’ 신세로 전락”이라는 제목의 신문 기사에서는 조선 문인들이 세수터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그 유적을 찻물터라고 주장했다. 이자현의 사적을 기록한 <청평산문수원기(淸平山文殊院記)>를 새긴 비의 뒷면에 보이는 “음명다(飮名茶:이름난 차를 마심)”라는 표현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었다.


1125년(인종 3) 의천의 제자인 혜소가 지은 이자현의 제문이 사적비의 뒷면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박세당에 따르면 이처럼 비석에 제문을 새기는 것은 중국에서는 흔히 행하는 풍속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자현의 경우가 처음이다. 그렇게 최초로 비석에 새겨진 제문에 “배가 고프면 향기로운 밥을 먹고 목이 마르면 좋은 차를 마시니 오묘한 작용이 막힘이 없어 즐거움이 끝이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는 것이 바로 선가의 가풍이다.”(이장용, <이수의 보문사 시에 차운하여[次李需普門寺詩韻]>) 도의 경지를 말하는 이러한 일상에서 주목되는 점은 바로 차 생활이다. 문맥으로 보자면 차는 그에게 물과 같은 음료였다고 할 수 있다.


예종과 인종 등 고려 왕이 이자현을 만나기를 청하거나 그를 만난 후 하사한 예물 목록에 차가 빠지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무슨 차를 하사했는지 밝히지 않았으므로 알 도리는 없지만, 1123년(인종 1) 송나라 휘종의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의 견문록『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을 보면 이자현이 생존한 당시 고려인의 차 선호도를 짐작할 수 있다.


“고려에서 생산되는 차는 맛이 쓰고 떫어 마실 수 없을 정도이다. 고려인은 오직 중국의 납차(臘茶)와 용봉차(龍鳳茶)를 귀하게 여긴다. 황제가 하사해 준 것 이외에도 상인들이 가져다 팔기 때문에 근래에는 차 마시기를 매우 좋아한다.”


고려시대에는 왕실만이 아니라 문인과 승려 등 귀족층에 차가 폭넓게 수용되었다. 궁중에는 다방(茶房)이라는 관부를 두어 다사(茶事)를 주관하게 했으며, 차를 세공으로 바치는 다소(茶所)가 있었다. 차는 왕실에서 행해지는 각종 의식은 물론 외교상의 예물이나 고위 관료의 상(喪)에 부의로 쓰이기도 했다. 게다가 차를 파는 다점(茶店)은 백성들의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노무라미술관,『다도와 한국의 전통 차문화』참고)


이규보의 경우 “차로 낙을 삼을 만하니, 어찌 날마다 술에 취하리오”라고 할 정도로 차를 즐겼는데, 차는 “마음을 씻어 물 같이 맑게 한다.” 그래서일까. 빙설처럼 맑은 시를 얻으려고 시를 쓰기 전에 차를 마시는 시인도 있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왕과 신하들이 죄인을 사형시킬 것인가 유배를 보낼 것인가 하는 결정을 앞두고 다례 의식을 행했다는 것이다. 다시(茶時)라고 하는 그 의식은 조선조까지 이어졌다. 차가 의사 결정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인데(윤성재,「고려시대의 차[茶]와 다방(茶房)」, 157면) 차의 역할은 마음을 맑게 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당나라 시승(詩僧) 교연의 시 <차를 마시는 노래[飮茶歌誚崔石使君]> 일부를 보자. “한 잔 마시면 혼미함이 씻겨, 마음이 천지에 가득하도록 상쾌하고. 두 잔 마시면 정신이 맑아져, 문득 뿌리는 빗방울에 가벼운 먼지가 씻긴 듯하고. 세 잔 마시면 득도하니, 어찌 번뇌를 없애려고 고심할 필요가 있으리오.”


그러니까 차는 궁극적으로 득도의 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만년에『능엄경』을 암송할 정도로 불법을 신봉한 이규보는 “늙어도 물은 길을 수 있으니, 한 잔의 차로 참선 시작하네”라고 읊조렸다. 이규보의 시구절과 같이 차 한 잔이 참선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참선이 생활인 이자현에게 차란 생존에 필요한 밥과 같고 물과 같은 것일 뿐만이 아니다. 그에게 차란 선과 같은 것이 아닌가.


“거울은 가인(佳人)을 따르고, 돌솥[石鼎]은 도사를 따른다”라는 말이 있다. 그처럼 차를 끓이는 돌솥은 선 수행을 하는 승려나 도사의 필수품이다. 옛 그림 <고사한일도(高士閑日圖)>를 보아도 시동이 돌솥에 차를 끓이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차는 정신이 한가로운 도의 경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재관, <고사한일도(高士閑日圖)>



그런데 해소되지 않는 의문 하나. 왜 바위샘을 만들어 찻물을 길어야 했을까?『다신전(茶神傳)』「품천(品泉)」에서 “차는 물의 신(神)이고, 물은 차의 체(體)다”라고 했다. 차가 정신이라면 물은 육체다. 좋은 물이 아니면 다신은 나타나지 않는다. 차가 제 맛을 낼 수 없다는 뜻이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것과 같다. (정민,『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321면) 좋은 차를 선택하는 것 못지않게 좋은 물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찻물로 가장 좋은 물은 바위틈이나 돌에 흐르는 돌샘물이라고 한다.(『차생활문화대전』참고) 


당시 고려인이 좋은 찻물을 찾아 애쓰는 정경을 문인들이 남긴 시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를테면 평양 박금천은 물이 달고 시원하여 차 달이기에 좋은 물이라고 소문나 도성 사람들이 찻물을 길으러 오가느라 종일 수선스럽고, 좋은 샘물을 철병에 담아 지인이 선물로 보내 주어 그 물로 차를 끓이기도 했다. 이규보의 표현을 빌리면 이렇게 맛을 낸 “향기로운 차는 진실로 도의 맛[道味]이다.” 차 맛이 곧 도의 진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수터 또는 찻물터로 의견이 분분한 이자현의 유적은 차 생활과 선 수행이 하나라는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정신을 말해주는 터가 아닐까. 차를 마시는 일상이 바로 도라는 가르침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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