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롭 Oct 15. 2024

꿈이 예시한 인연

보덕사에서

영월역을 나서자마자 깜짝 놀랐다. 눈앞으로 불쑥 튀어나온 산 때문에. 누가 두 팔을 벌리고 달려오는 것처럼 산이 역까지 마중을 나오는 곳. 영월이다. 저물녘 서울행 기차를 기다리며 들은 쟁쟁한 풀벌레 소리로 배웅해 준 곳도 영월이다. 울고 싶을 때는 청령포에 가자. 땅도 물도 바위도 소나무도 다 우는 청령포에. 한나절 청령포에 머물다 떠나며 혼자 속으로 한 그 말은 금방 잊었다. 눈물을 어떻게 참을 수 있나. 의지가 추월하지 못하는 눈물을. 


영월에 처음 간 그때를 새삼 떠올린 건 세상이 온통 연두로 물들어 가는 사월. 기차에서 KTX매거진을 보다가 단종축제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행사 일정에 영산대재, 단종제향, 학술심포지엄 등에 끌려 다른 날 말고 축제 때 가고 싶었다. 그래서 4월 26일 다시 찾은 영월. 보덕사에서 열 시에 하는 영산대재는 이미 시작된 시간이라 마음이 급하지만 멈춰 서지 않을 수 없었다. 변함없이 맞아주는 산이 또 거기 있어서. 푸른 품에 안기는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때마침 저만치서 달려오는 택시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축제의 저녁을 준비하는 흰 천막들이 늘어선 동강을 건널 때 택시 기사한테 그 산 이름을 물으니 발산이라고 했다. 승려의 공양 그릇인 바리때를 엎어 놓은 모양이라서 발산이라고. 산 이름에 바리때를 의미하는 글자[鉢]가 들어가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자신을 사진작가라고 소개한 기사는 차가 관풍헌을 지날 때 단종이 머물던 곳이라고 하며 국장행렬이 거기서 출발하는데 어떤 지점에서 사진을 찍어야 멋진 사진을 건질 수 있는지 알려주었다. 창절사를 지날 때는 국장행렬이 그곳에서 노제를 지내고 장릉으로 간다고 설명했다. 영월역에서 보덕사까지 차로 십 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 곳곳이 단종 관련 유적지였다. 그러니까 단종 박물관 안에서 차를 타고 달리고 있었다.      


보덕사 절 마당에는 아, 으 같은 태초의 소리가 리듬을 타고 흐르고. 관람객은 천막 안의 의자에도 툇마루에도 앉고 서서 구경하기도 했다. 열린 공간이다 보니 사람들이 끊임없이 내왕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국가무형문화재 영산재 이수자인 스님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어떤 의미를 가진 진언이 아니지만 어느 순간 몸이 전율했다. 내가 발을 디딘 그곳이 일순간 인간계가 아닌 듯하고 스님이 내는 소리는 인간의 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의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어도 산 자든 죽은 자든 영혼은 다 알아들을 것이다.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그 소리를.  


소리만이 아니라 몸짓을 통해서도 영혼과의 소통이 이뤄질 수 있겠구나, 그날 깨달았다. 흰 옷자락을 날리면서 선무도 천수다라니를 하는 스님을 보니 문득 신선이 연상되었는데. 외형적인 특징으로는 참모습을 볼 수 없겠지만 한 존재에게 바치는 경배하고 경탄하는 듯한 몸짓은 자기를 지우고 신을 드러내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그 몸짓은 그런 춤을 추고 싶게 마음을 흔들어 댔다. 춤보다 자기 안의 신을 우르르는 마음이 태도가 되도록 해야 할까. 그러면 삶이 춤이 되려나.


몸짓으로 하는 말 그러니까 춤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여겼는데 비구니들이 추는 지전춤을 보면서 나는 무단히 슬퍼졌다. 그날따라 몸의 말이 잘 들렸다. 상단불공이나 선무도 천수다라니와 마찬가지로 지전춤도 망자의 한을 풀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것. 그 무대 뒤에는 붉은 용의를 입은 단종의 어진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의 영령이 모든 것을 지켜보았으리라.      



해가 단종 어진 뒤의 키 큰 나무의 정수리를 비출 때. 영산대재는 끝났다. 새벽에 집을 나선 까닭에 허름한 식당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던 터에 사회자는 모두 점심 공양을 하고 가라고 했다. 마른 가지마다 기적처럼 돋아난 귀여운 연두가 이파리를 부풀리면서 세상을 싱그럽게 물들이듯이 허기진 마음을 단숨에 싱싱하게 하는 말을 들었다.


밥이라는 글자를 본다. ㅂ은 마치 그릇에 밥이 담긴 듯한 형상이다. 밥은 ㅂ 두 개가 위아래에 있다. 상하가 같은 글자이듯이 상하가 한자리에서 밥그릇을 하나씩 차지하고 공평해지는 시간 속에 상하는 사라진다.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누가 밥 먹는 모습을 보면 저이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구나 생각되어 가슴이 찡하다. 


절 밥. 얼마 만인지. 헤아릴 수 없이 까마득하다. 밥 먹고 가라는 말. 얼마나 다정한 말인지. 배가 고파서 알았다. 말만 들어도 벌써 따뜻한 밥을 나물에 비벼서 된장국과 함께 먹은 듯이 배가 부르고 마음이 풀리는 말. 그래서 헤어지기 못내 아쉬울 때 하게 되는 말. 밥 먹고 가. 같이 밥 먹다 보면 엇갈린 마음도 가지런해질 때 많지. 밥 한번 먹자는 말. 당신 참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말로 들린다. 


공양하고 가세요. 내게만 살짝 한 말도 아닌 그 말이 큰 위로가 되었다. 먹기도 전에 마음을 밥처럼 따뜻하게 데우고 손을 잡아끄는 끄는 손 같은 말을 듣고 누가 등을 보이겠나. 아는 누가 있어 마주 앉아 먹는 밥이 아니라 해도. 천막 안에 앉아서 혹은 서서 영산대재를 관람한 사람들이 줄지어 밥그릇을 하나씩 받아 들면 노보살들은 맞은편에서 나물을 한 가지씩 밥에 얹어 주었다. 뜻밖에 떡도 두어 개나 밥 위에 놓였을 때 마음이 얼마나 푸근해지던지. 


밥 위에 온갖 나물들과 떡이 얹힌 밥그릇은 세상의 전부. 세상을 다 차지한 느낌 알리라. 낯선 사람과 마주 앉아 말없이 밥만 먹어도 별로 어색하지 않고 흥성거리는 잔칫집 같은 분위기였다. 단종의 어진은 그대로 절 마당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는데 영산대재를 올린 뒤여서일까. 절 마당에 들어서서 첫눈으로 볼 때보다 편하게 보였다. 착시인가. 보이는 것은 마음 상태에 달려 있으니.      



단종 어진



그나저나 단종 추모 영산대재를 어찌하여 보덕사에서 지내는 것일까. 그러니까 단종과 보덕사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보덕사는 단종의 능인 장릉의 원찰이지만 단종으로 복위되기 전의 원찰은 금몽암이다. 금몽암의 창건은 단종의 꿈에서 비롯한다. 단종이 궁궐에 있을 때 그곳에 대한 꿈을 꾼 후 터를 잡아 절을 세우고 금몽(禁夢)이라고 한 것이다. (홍양호, <금몽암 중수에 대한 기문[禁夢菴重修記]>) 한편 단종이 영월로 물러나서 그 절을 보니 꿈에 본 것과 똑같아 이름을 금몽이라고 지었다는 설도 있다. (허훈, <동유록(東遊錄)>) 단종이 금몽암을 창건했다고 보든 암자 이름의 연원이 되었고 보든 두 가지 설은 단종과 그 절의 인연이 궁궐에서 꾼 꿈을 통해 예시되었다는 점을 말한다. 


금몽암은 장릉 왼쪽에 있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소실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 영월 군수 김택룡이 중건하여 이름을 노릉암(魯陵庵)으로 고치고 승려들로 하여금 그곳에 머물며 무덤을 수호하게 했다. (이긍익, 『연려실기술』) 노산군의 묘가 읍내에서 5리밖에 안 떨어져 있어서 사람들이 그곳에서 땔나무를 하거나 꼴을 베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관리가 해이해져 퇴락한 노릉암을 1662년(현종 3) 영월 군수 윤순거가 중건하고 이름을 을지분덕(乙旨分德)이란 지명을 따라 지덕암(旨德菴)으로 바꾸었다. 1698년(숙종 24) 단종 복위 이후 묘를 능으로 승격하고 능호를 장릉이라고 했으며 금몽암 터를 확장하여 큰 사찰을 짓고 보덕사(報德寺)라고 이름했다. 금몽암과 보덕사의 유래에 대해 홍양호의 <금몽암 중수에 대한 기문[禁夢菴重修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원찰 이름을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으로 보덕이라고 한 것은 장릉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홍직필, <보덕사 선루의 현판 시에 차운하다 [報德寺禪樓次板上韻]>) 1820년(순조 20) 홍직필이 영월을 유람하며 보덕사에서 93세의 최담이라는 노승을 만났는데, 단종이 영월로 물러날 때의 일을 말하면서 슬픔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홍직필은 평생 장릉을 수호한 노승의 행위를 기리는 마음을 시로 표현했다.     


冷雲殘照使人愁 

해 저물어 구름 차니 시름겨운데

松栢蕭森耐九秋 

만추를 견디는 송백은 울창하네

老宿能知塵刹報 

원로 승려 진세에 보답할 줄 알아 

百年鍾磬護珠丘 

일생 쇠북과 경쇠로 장릉 수호하네

홍직필, <보덕사 선루의 현판 시에 차운하다 [報德寺禪樓次板上韻]>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집 떠난 객지의 나그네는 시름겹다. 그렇지 않아도 단종의 비애가 서린 영월은 시름겨운 땅인데 나무는 잎을 다 떨구고 앙상하게 서 있는 만추 아닌가. 을씨년스러운 저녁 풍경 속에 보덕사가 있는 산자락의 장릉 곁에 울창한 송백을 발견하고 충신과 같은 절개를 떠올렸으리라. 날이 추운 뒤에야 독야청청한 송백을 재발견할 수 있듯이 어려운 상황에서 사람의 본심을 알 수 있다. 단종의 애사는 수백 년 전 일이지만 그것을 기억하고 평생 장릉을 수호한 노승을 사철 푸른 송백과 같은 사람으로 본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