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릉에서
장릉 가는 길목에는 정순왕후의 사릉에서 단종의 장릉으로 옮겨 심은 한 그루 소나무가 있다. 생전 단종이 있는 영월 쪽을 바라보기 위해 동망봉에 올랐던 정순왕후의 혼이 깃든 정령송(精靈松). 속수무책으로 서로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기만 한 두 사람은 죽어서도 함께하지 못하고 단 한 그루 소나무로 이어져 있다. 사후 사백여 년이 지난 뒤에.
청령포 관음송(觀音松)에 단종의 한숨과 울음소리가 서려 있듯이 평생 애달파한 정순왕후의 한이 정령송에 서린 것일까. 장릉에서 멀찍이 떨어져 서 있는 정령송은 가냘프기만 하다. 그러나 줄기는 곧게 하늘로 치솟고 있다. 주위 소나무들보다. 고개를 치켜들고 정령송을 올려다보다가 알았다. 정령송이 단종 곁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단종의 정령이 계신 곳을 알고 있다는 것을.
발걸음을 옮겨 사월의 햇살이 내리쬐는 장릉으로 가자 흰나비가 날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꽃이 없는데 너울거리는 나비들. 헤매고 있는 듯이 보였다. 나비가 내려앉는 곳을 유심히 보니 아주 작은 꽃이 피어 있었다. 흰 별 모양의 꽃이. 내 큰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꽃이라도 나비는 다 알고 날아오는구나 감탄하다가 산비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령이 370년이고 높이가 22미터나 되는 느릅나무가 꽃잎처럼 작은 잎을 달고 있는데 까만 줄기가 드러난 거대한 고목은 마치 연두색 꽃을 흐드러지게 피운 꽃나무 같았다. 그 맞은편의 정자각과 양쪽의 비각과 수복방 사이 허공에는 하얀 버들개지가 날리고 있었다.
의외로 평온한 장릉에서 정자각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남양주에 사는 한 여자 관람객은 사릉에 자주 가는데 거기 정자각에서 바라보면 정면에 능이 보인다고 하면서 장릉은 특이한 형태라고 문화해설사에게 말했다. 사릉만이 아니라 보통 능은 평지에 있으며 정자각과 일직선상에 있다. 하지만 장릉은 예외다. 능을 조성하기 위해 땅을 가린 것이 아니기 때문. 이백여 년이 지난 후에 왕릉의 격식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노산군의 시신을 매장하면 삼족을 멸한다는 세조의 어명에도 불구하고 열 손가락이 강에 둥둥 떠 있는 단종의 시신을 찾아 장사 지낸 자는 호장 엄흥도. 그는 통곡하면서 관을 갖추어 이튿날 아전과 백성을 거느리고 영월군 북쪽 5리에 있는 동을지(冬乙旨)에 무덤을 만들어 장사를 지냈다. 그때 엄흥도의 일가가 화가 있을까 두려워 말리자 엄흥도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하더라도 달갑게 여긴다[爲善被禍 吾所甘心]”라고 했다. (이긍익,『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4권)
문화해설사를 따라 장릉 일대를 둘러본 뒤에 혼자 천천히 다시 산길을 걸어 장릉으로 가고 있었다. 멸족될 위험을 무릅쓰고 단종의 시신을 지게에 지고 오른 길을. 선을 행하다가 화를 당하더라도 달갑게 여긴다고 한 엄홍도의 말을 생각하면서.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걸고 한 그 행위는 오직 선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한 선이 무엇인지를.
선은 모두가 가진 마음속 가장 고귀한 진실일 테다. 진실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진실과 목숨 중에서 택해야 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나. 엄흥도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옳은 일을 한 사람을 우리는 충신이라고 한다. 충(忠)을 풀이하면 자기 마음을 다한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엄홍도는 단종 한 사람에게만 충성한 것이 아니다. 누구보다 자기를 배반하지 않은 것이다. 구차하게 목숨을 빌지 않고 진정한 자신과 하나가 되는 길을 택했으니 죽어도 좋다고 말할 수 있었으리라. 나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산길에서 혼자 생각에 빠져 있었다. 걷는 동안 내 발자국 소리가 들렸던가. 오가는 이 없는 그 길에서 문득 무엇인가 어디에 스치는 듯 스르륵 소리가 나서 정신이 들었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뒷모습을 본 순간 악! 소리를 지르며 내달렸다. 나도 모르게 방향을 틀고서. 오르던 산길을 도로 내려간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 지 십 년은 된 것 같은데. 거기서 볼 줄이야. 철쭉이 핀 봄날에.
진초록 뱀이 산비탈 아래로 꿈틀거리며 가고 있었다. 내가 비명을 질러 저도 기겁했으려나. 산길을 내달려 장릉 입구 엄흥도 비각까지 내려와서도 놀란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나와는 다른 길로 제 갈 길을 가는 뱀을 보고도 소스라치는데 온 가족이 죽을 위험에 처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슴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곧장 달려갈 수 있는 사람! 이제 그를 생각하면 떠오른다. <한 사람의 진실>. 그날 아침 장릉에 가기 전에 손이 가는 대로 펼친 시집에서 읽은 시.
한 사람이 진실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 사람이 진실하면 세상이 바뀔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진실한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 사람이 진실한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
모두가 거짓을 말해도
세상에 필요한 것은 단 한 사람의 진실
모든 새가 날아와 창가에서 노래해야만
아침이 오는 것은 아니므로
한 마리 새의 지저귐만으로도
눈꺼풀에 얹힌 어둠을 밀어낼 수 있으므로
꽃 하나가 봄 전체는 아닐지라도
꽃 하나만이 봄일지라도
류시화, <한 사람의 진실>
꽃 하나가 피면 봄은 온다. 꽃 하나가 피면 세상의 어둠은 점차 밀려난다. 엄홍도가 단종을 묻은 후 60여 년이 흐르는 동안 그곳은 조정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 사람이 진실하면 세상이 바뀔 수 있다.” 설사 수백 년이 걸린다고 할지라도.
단종에 대한 국가 차원의 치제는 중종 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진다. 그 이전 시기에 단종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논죄의 대상이었다. 중종반정 이후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의 본격적인 정계 진출은 단종의 복위를 추진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때 이르러 치제나마 시행된 것은 중종 대에 빈번하게 일어난 천재이변과도 관련이 있다. 천재이변은 인간 세상에 무엇인가 잘못이 있음을 경고하는 하늘의 전언으로 인식되었고, 이 핵심에는 단종애사가 자리했다. (김효경,「단종 제사와 신앙의 전개 과정」, 161면)
1516년(중종 11) 중종은 노산군 묘를 찾으라는 왕명을 내리고 특별히 우승지를 보내 치제했다. 설, 단오, 추석, 동지에 치제하라고 명하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흐지부지 행해지지 않았다. 그때로부터 20여 년 뒤에 엄흥도의 후손을 앞세워 단종의 무덤을 다시 찾아낸 사람은 1541년(중종 36) 영월 군수로 기용된 박충원이다.『선조실록』1581년 (선조 14) 기사에 실린 박충원의 졸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박충원은 문명(文名)으로 벼슬길에 진출했으나 임백령에게 미움을 받아 영월 군수로 쫓겨났다. 영월에 부임한 여러 명의 군수가 갑자기 죽는 요괴한 일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노산군이 빌미라고 여겼다. 박충원이 제문을 지어 노산군 묘소에 제사를 올렸는데 그 제문에 ‘왕실의 원자로서 어리신 임금이었네. 청산의 작은 무덤 만고의 쓸쓸한 혼이로다’라고 했다. 그 뒤로 이 제문을 축문으로 사용한다. 박충원이 6년 동안 군수로 있었으나 끝내 탈이 없었고 요사스러운 말도 사라졌다. 사람들이 이 일로 그를 칭송한다.”
박충원이 영월 군수로 부임한 경위에 대해 윤봉구의 <장릉에 대한 사실 한 토막[莊陵事實一段]>에 더 구체적이다. “당시 영월에 부임한 자들이 연이어 죽는 재앙이 있어서 사람들이 모두 영월을 사지(死地)라고 여겼다. 임백령이 박충원을 영월로 쫓아낸 것 또한 그를 사지에 두려는 계획에서이다.” 윤봉구가 임백령의 의도를 곡해했는지 모르지만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당시인의 영월에 대한 인식이다. 당시 영월은 이른바 사지(死地)이다. 외지인만 그렇게 여긴 것이 아니다. 토착민은 귀신 우는 소리를 때때로 듣고 흉흉한 소문을 서로 전했다.
박충원의 졸기에서 영월 군수로 부임한 자들이 비명횡사한 사건의 원인을 노산군에게서 찾은 이면에는 한스러운 생애와 억울한 죽음 뒤에 무주고혼이 된 노산군에 대한 연민이 자리한다. 노산군이 폐위당한 것은 그의 실덕이나 잘못 때문이 아닌데 그에 대한 처우가 온당하지 못하다는 점에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노산군이 세상을 떠난 뒤로 제사가 행해지지 않았으며 분묘에서 나무하고 소치는 것도 금하지 않았으니, 요괴한 일이 일어난 것은 이루다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한준겸,『유천차기(柳川箚記)』)
이러한 여론에도 불구하고 노산군 묘의 치제는 지속적으로 이뤄지지 못한다. 후왕의 입장에서 선왕이 행한 일을 함부로 고치지 못하는 까닭은 자칫하다가 세조의 과오를 드러내게 되기 때문이다. 선현들은 신민의 한스럽고 답답한 마음을 위로하는 동시에 풍교를 세우는 방법이라는 취지로 노산군의 분묘를 수축하고 치제하기를 청하거나 양자를 세우기를 청했다. 그러나 복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임금의 과오를 숨긴다는 의리에 위배가 된다고 본 것이다. 윤휴만이 노산군의 복위를 청했다가 거절을 당했다. (이긍익,『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4권 참고)
노산군 사후 복위되기까지 약 이백 년이 걸린다. 1698년(숙종 24) 단종은 복위되었다. 그러나 장릉에서는 매해 한식제(寒食祭)와 고유제(告由祭)만 거행되었다. (김효경, 168면) 1772년(영조 48) 영월 부사가 된 신광수가 단종의 기일인 10월 24일, 매년 이날이면 단종의 능 앞에서 곡해야 한다고 토로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단종 기일에 두견새 울음소리를 듣고 곡하듯이 쓴 시가 있다.
天下傷心處
천하 사람이 마음 아파하는 곳
天下傷心日
천하 사람이 마음 아파하는 날
吾聞子規啼
나는 두견새 우는 소리 듣나니
乃在春三月
마치 지금이 춘삼월인 듯하네
不如年年今夜哭陵前
매년 이 밤 능 앞에서 곡하는 게 나으리
枝枝寒木灑淸血
겨울나무 가지마다 피눈물 흘리네
신광수, <10월 24일 단종 기신에[莊陵忌辰十月二十四日]>
단종의 애사를 기록한『노릉지(魯陵誌)』를 읽을 때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정조가 말했듯 단종의 죽음에 하늘도 땅도 감응한다. 단종이 사사된 날. “뇌우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 수 없고 맹렬한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깔려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이긍익,『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4권) 해마다 그날이 되면 단종의 한이 서린 땅에 뿌리내린 나무는 피눈물을 흘린다. 단종을 애달프게 여기는 마음에 그렇게 보인다.
매년 돌아오는 음력 10월 24일. 한겨울 마치 춘삼월인 듯이 시인은 두견새 울음소리를 듣는다. 왜 하필 두견새 울음소리일까. 전설에 따르면 두견새는 두우(杜宇)라는 이름을 가진 촉나라 망제(望帝)의 화신이다. 망제는 그가 재상으로 삼은 별령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쫓겨나 서산에 은거했다. 그 뒤 한을 품고 죽은 그의 혼은 두견새가 되어 밤마다 피를 토할 때까지 울었다. 그 울음소리가 돌아가야 해[不如歸] 하고 하소연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두견새는 왕위를 빼앗긴 영혼이 깃든 새이므로 망제와 같은 처지인 단종과 동일시된다. 단종 기일에 들은 두견새 울음소리는 그러니까 단종 울음소리이다.
죽은 자의 한은 산 자에게 되살아난다. 해원이 될 때까지. 몸이 없는 영혼의 해원은 산 자를 통해서 가능하므로. 한이 없어야 산 자도 죽은 자도 평화롭다. 사는 동안 누구도 한스럽게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세상의 평화에 이바지하는 것일까. 귀 기울여본다. 가슴에. 누구 울음소리가 들리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