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롭 Aug 09. 2024

새긴 글자에 숨결을 불어넣어

이자현의 유적을 찾아서 4

청평 산골 물은 얼어붙지 않는다. 겨울 한복판 진락공 세수터 아래 벼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위에서 나는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갈지 가늠하는 술래가 되어. 청평산 물소리가 좋기로서니 눈이 채 녹기도 전에 눈발이 날리는 날, 돌과 바위가 많아 미끄러운 산을 오르는 이는 없을 터. 무인지경에서 숨바꼭질이라니!


사람이 아니라 그림자 찾기 놀이다. 거의 천 년 전 인물 이자현의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 속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머리카락 보이지 않게 꼭꼭 숨어버릴 수도 없으니 단번에 찾아낼 줄 알았다. 일명 진락공 세수터 또한 그의 그림자이지만 필적이 더 궁금했다. 글이나 말과 함께 글씨는 그 사람을 알아보는 수단이기도 하니까. 구태여 필적을 보지 않아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다. 그런데 이자현을 사모한 선인들이 그의 유적을 순례하며 남긴 기록을 보니 가까이에서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 것이다. 동경이 동경을 낳아서.


처음 온 날 이자현의 필적을 끝내 찾아내지 못하고 산을 내려갔다. 그러고는 날씨가 어떤지 살피지도 않고 무모하게 먼 길을 또 나서 진락공 세수터 안내판 앞에 섰다. 거기에 ‘청평식암(淸平息庵)’이 새겨진 위치를 알려주는 한 문장이 덧붙어 있었다. “동쪽 절벽에는 청평식암이라고 새겨놓은 큰 글씨가 있다.” 식암폭포가 내가 발을 디딘 반석 바로 아래이니 근처에 식암 터가 있는 게 분명한데, 안내판 옆의 이정표는 천단, 소요대, 오층석탑으로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어디가 동쪽인지 방향 감각이 없지만 내가 선 그 지점에서 보이는 절벽은 하나다. 지난번에는 그 절벽에서 찾아볼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천단 방향인 위쪽으로 전진했다. 등잔 밑이 가장 어두운 법이어서 엉뚱한 데서 헤맸으니, 그날의 전략은 등잔 밑부터. 그렇다면 폭포 옆으로 박아 놓은 쇠붙이를 밟고 벼랑을 도로 내려가야 했다. 계곡의 물이 순조롭게 낙하하는 벼랑에 수직으로 박힌 얇은 쇠붙이를 밟으면서 마음이 가팔라지고 있었다. ‘오늘은 과연 찾아낼까?’      



동쪽 절벽



산등성이에 우뚝 선 절벽을 정면에서 올려다보니, 눈을 내리깐 거인 같았다. 나는 꿈쩍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었다. 존재 자체로 벽을 느끼게 하는 거인도 용기를 내어 다가오는 자에게 짐짓 틈을 내어준다는 걸 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려고 해도 접근할 길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 절벽과 나 사이로 식암 폭포의 물이 흘렀다. 누가의 말한 대로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오랜 세월 그를 사모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졌으니 길이 있기는 있을 테지만, 또 한동안 소원한 시대를 만나 길이 파묻혔는지 내가 길을 찾지 못하니 길 없는 길을 가보는 수밖에.  


절벽 앞으로 흐르는 계곡의 물을 건너 마른 잡목의 가지를 헤치면서 산등성이로 기어올랐다. 그 위의 깎아지른 절벽에 바짝 다가서서 절벽 한쪽 끝에서 한쪽 끝으로 나아가면서 절벽의 위아래를 샅샅이 훑었다. 청평식암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나아갈수록 초조해서 목이 말랐다. 물을 마실 겨를 없이 절벽의 끝에 다다르자 마침내 글자가 어렴풋하게 보이는 게 아닌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발을 옮기는데 쿵쿵 뛰는 심장과 같은 속도로 나아가지지 않았다. 조심스레 글자가 제대로 보이는 지점에 이르러 나는 그만 주저앉을 뻔했다. ‘대체 왜 여기 이름을 새기는 거야?’


내가 발견한 것은 어디든 제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종족의 습성. 산을 오르는 도중에 미끄러져서 얼얼한 손으로 헝클어진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내려다보니 바지는 흙투성이고 운동화는 나뭇잎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런 꼴로 쉬지도 않고 쫓아왔으나 그의 자취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고. 또 산 밖으로 밀려나는가. 나를 내리누르는 듯한 절벽 아래서 되돌아서는데 허기가 몰려왔다. 몇 걸음 옮기다가 눈앞이 캄캄해 바위를 붙잡고 얼빠진 사람처럼 한참 서 있었다. 그러다가 왜 문득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는지 모르겠다. 신선이 사는 골짜기 선동(仙洞)을 찾는 사람이 근래 없는데, 느닷없이 한 사람이 들어와 미로에 빠졌으니 산의 정령이 딱히 여겨 내 이름을 불렀을까?


나는 문득 고개를 돌렸고 내가 선 응달과 달리 싸락눈이 언제 그쳤는지 그 자리에는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길 없는 길 위에서 찾아 헤매던 것이 대각선 방향 언덕의 암벽에 드러나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선 지점으로부터 직선거리로 한 10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바로 전까지 절벽을 샅샅이 살피며 한쪽 끝에서 한쪽 끝으로 나아갈 때는 온통 절벽뿐이었는데, 절벽과 절벽 사이가 트여 있었다. 의식하지 못했으나 내가 용케도 멈춰 선 곳은 그러니까 절벽의 문 앞이었던 셈이다. 절벽에 문이 있을 줄이야. 좀 전까지 닫힌 돌문이 자동으로 열리지는 않을 테고, 원래 열린 문을 그제야 발견한 것이다. 그 안의 광경을 목격하고 폭죽보다 더 큰 소리가 내 안에서 터져 나왔다. 겨울잠을 자는 생명들이 다 깨도록 괴성을 지르는 와중에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눈앞이 캄캄할 땐 고개를 돌리면 되는구나!    



청평식암(淸平息庵)



벼랑을 허겁지겁 오르자 절벽 뒤에 숨겨진 땅이 있는데, 밝고 아늑한 기운이 감돌았다. 바위가 많은 험한 계곡에서 평평한 땅에 발을 디디고 나는 저만치서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 약 천 년 전 인물의 글자를 바라보는데 절로 입이 벌어졌다. 그의 필적을 표현할 언사가 내게는 없으니, 다만 우러러보다 발꿈치를 들고 팔을 쭉 뻗었다고 고백해야겠다. 내 손길은 천 년의 간격을 훌쩍 건너뛰어 한달음에 달려 나간 마음의 길이다. 그러므로 맨 아래 글자 끝에 겨우 닿은 것은 손이 아니라 마음이다. 그가 손으로 새긴 글자에 접촉하는 순간 암벽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심장처럼 벌렁거리는 한 손을 한 손으로 감싸고 순식간에 오른 작은 땅 위를 천천히 돌았다. 탑이 그 땅 가운데 있기나 한 듯이. 하늘도 편애하는 듯 따사롭고 포근한 땅. 그 위에서 가볍게 걸을 때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텅 빈 방”(장자, <인간세>)이 절로 떠올랐다. 청정하고 무욕한 마음에서 광명을 지닌 도심이 드러난다는 의미로 한 말이. 식암 터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필적뿐이다. 하지만 그 터에 그가 남긴 자취는 필적만이 아니구나 생각하며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 땅의 크기를 걸음 수로 재어 보았다. 가로 여섯 걸음, 세로 네 걸음. 그 땅을 다 차지하도록 암자를 지어도 아주 작은 방 한 칸일 텐데, 1696년(숙종 22) 그곳을 찾은 김창협에 따르면 암자는 바위에 새긴 네 글자 옆에 있었다. 당시 암자는 후대 사람이 복원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자현이 수도한 식암을 상상하기에는 충분했으리라. 이자현 생존 당시 식암이 무릎을 제대로 펼 수 없을 만큼 작고 둥글어 고니의 알과 같아 붙여진 이름은 곡란암(鵠卵菴). 김창협이 암자 문을 열어보고 “지난날 벼슬살이 그만둔 뜻, 참선을 탐닉해서가 아닐까(向來掛冠意 豈亦耽禪寂)”라고 했듯이, 이자현은 고니 알 같은 암자에서 몇 달이고 나오지 않았다.


마음이 쉬는 경지를 지향하여 그치다 또는 쉬다, 라는 뜻을 가진 글자[息]로 암자 이름을 짓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마음의 평화란 날뛰는 마음을 가라앉힌 뒤에야 찾을 수 있으니. 그가 찾고자 한 것 또한 한마디로 행복이었으리라. 세상 사람과 같은 것을 추구하지만 그는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것이다. 그래서 이황은 이자현을 단번에 천리를 날아가는 고니에 비유했다.     


식암 터



땅바닥에는 기왓장이 드문드문 박혀 있었다. 지금은 철거되었지만 근래에 이르기까지 거기에 암자가 있은 흔적이었다. 이자현이 식암을 세운 이래 계속 수행자가 찾아와 허물어진 암자를 복원하며 수행을 이어갔다. 이자현이 떠나고 사백여 년 뒤인 1555년(명종 10) 당시 고승 보우도 이자현이 수행한 식암에서 수행하며 이렇게 읊조렸다. “이웃 머니 찾아오는 승려 적고, 구름 깊어 속객도 드무네. 고요하게 일 없이 앉아서, 드러나는 천기를 조용히 관조하네”


아득히 어디서 봄기운이 일렁이는지 계곡의 얼음장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울렸다.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 쪽을 보아도 다른 시간에 한자리에서 바라본 이들의 눈길이 닿아 있는 듯했다. 김창협은 이자현이 새긴 청평식암을 바라보다가 1635년(인조 13) 같은 자리에서 선 증조부 김상헌의 시를 읽지 않았을까. 내가 외투 주머니에 넣어간 그의 청평산 유람록을 꺼내었듯이.     


息庵居士遊何處  

식암거사 어느 곳에서 노닐고 계시는가

千古精靈入冥漠  

천고의 정령이 간 곳을 헤아릴 수 없네

鑱崖刻石留古跡  

절벽 깎고 돌에 새긴 자취 남아 있는데

至今未遣莓苔蝕  

지금까지도 거기 이끼가 끼지 아니했네

松陰滿地不見人  

솔 그늘 드리운 땅에 사람 보이지 않고

石壇桃花春自落  

돌단의 복사꽃 봄에 절로 떨어지는구나


김상헌, <식암(息庵)>     



식암거사는 볼 수 없지만 그가 새긴 글자는 암벽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가 떠난 지 오백여 년이 지나 김상헌이 찾아간 그때나 천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이나 그의 필적을 보면 세월이 무색하게 여겨진다. 청평산 어딘가에 식암거사가 있을 것만 같아 한 번 불러 보고 싶어질 정도이다. 세월도 비껴가는 듯한 필적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응시하는 동안 자신은 다 의식할 수 없을지라도 천고의 정령과 대화를 나누었으리라. 가물가물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시간은 절벽의 폭포처럼 흘러가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석벽 위쪽에 기이한 형태로 선 소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뿌리는 하나이지만 거대한 두 개의 둥치로 갈라져 마치 두 그루처럼 보이는 소나무. 건너편의 다른 소나무가 그중 하나를 휘감으면서 연리지를 이루고 있다. 그 소나무에 깃들인 학을 타고 식암거사는 어딘지 모를 곳으로 날아가고 없지만. 그가 살던 땅에 발을 들이고 보니 인간계와 확연히 구별되는 듯한 땅이어서 발을 디딘 그곳의 색다른 분위기를 김상헌은 환상적으로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흩날리는 복사꽃이 제격이다.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복사꽃 떠내려오는 물줄기를 따라가 어부가 본 이상향의 풍경처럼.


절벽에 폭 싸여 내가 겨우 찾아내기도 했듯이 그 땅은 비밀스럽다. 암벽 위의 소나무 둥치에 매어둔 굵은 밧줄이 아래로 드리워져 있었다. 밧줄을 잡고 거대한 뱀이 똬리를 튼 듯 땅 위로 드러난 소나무의 구불거리는 뿌리를 밟고 언덕을 오르자 소나무들이 자리한 땅은 식암 터보다는 작지만 평평한 땅이었다. 그곳을 김창협은 ‘송단(松壇)’이라고 불렀다. “암자 뒤에는 푸른 절벽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는데 그 위가 송단으로 한적하여 앉아 있을 만하였다.”



송단(松壇)



그 일대에서 그곳이 가장 높은 곳이니 송단은 내게 내려다보기 좋은 전망대 같았다. 아래에는 내가 얼마 전까지 청평식암을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생각하며 두리번거린 진락공 세수터가 보이고. 맙소사. 송단에 오층석탑 방향이라는 이정표가 있었다. 그러니까 진락공 세수터에서 오층석탑 방향으로 올라오면 금방 송단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청평식암은 이정표도 안내판도 따로 없다. 마음의 평화에 이르는 길이 없지는 않으나 마음이 쉰다는 뜻을 가진 그의 영토에 이르는 길은 그러니까 가리어진 길. 마음의 평화를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처럼.


낙엽이 깔린 전망대 송단을 거닐며 그곳에서 때로 먼 곳에 눈길을 주었을 이자현을 생각하다가 주머니에 넣어둔 볼펜을 찾으니 없었다. 주인이 출타한 사이 그의 집을 방문한 객이 그 집 담장에 시를 한 편 남기듯이 나는 그에게 편지를 쓰려던 참이었다. 그 볼펜 말고도 가방에 볼펜은 또 있었지만, 거의 다 닳아서 잃어버리지 않아도 곧 버려질 테지만, 가슴이 허전하여 발로 낙엽을 쓸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가진 부귀도 공명도 미련 없이 버린 마음을 떠올리며 송단에 떨어진 솔방울을 주워 모았다. 주머니가 불룩하도록.


책상 위에 올려둔 솔방울을 바라보다 눈을 감으면 머리 위로 소나무가 드리워지고 소나무 그림자는 나를 품에 안아준다. 솔바람 소리도 때로 들린다. 그러나 그와 같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자 하는 열망으로 살지 않는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무성한 잎을 달고 있다 한들 끝내 모두 떨구어야 할 인생의 겨울은 쉬지 않고 다가오고 있는데. 그날을 맞으면 곁에 있는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해줄까.


이자현은 제자들에게 유언했다. “사람의 목숨이란 덧없는 것이어서 나면 반드시 죽음이 있는 것이니, 부디 슬퍼하지 말고 도에 정신을 두어라.” 고해의 바다에 빠져 죽지 않고 끝끝내 살아남아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고 말없이 묻는 이들에게 도를 추구하라고 답하는 이자현. 그 말이 가슴을 파고들지 못한 까닭은 가슴까지 현실에 깊이 매몰되었기 때문이겠지. 그가 입적할 때 향기가 방안에 자욱하더니, 차츰 온 산골에 두루 퍼져서 사흘 동안이나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자현 부도



이자현 사후에 불교식 장례법으로 화장하고 유골을 청평사 승려가 보관하고 있는데 빛깔이 푸르러 청옥(靑玉) 같았다고(윤휴, <풍악록(楓岳錄)>) 하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 전해진 것으로 볼 때 사리는 청평사에 따로 보관하고 유골은 돌함에 담아 계곡에 매장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청평산문수원기>에 따르면 이자현은 자신이 묻힐 곳을 미리 정해 두었다. 청평사 승려의 인도로 김창협은 이자현의 유골이 매장된 곳을 찾았다. 이자현의 부도는 현재 영지(影池) 근처에 있지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부도가 따로 없었던 듯하다.

      

不見息菴見遺刻  

식암을 보지 못하고 남긴 글자를 보는데

四山窈窕雲漠漠  

적막한 사방의 산에는 구름이 자욱하네

陰厓瘞骨僧知處  

유골 묻은 응달 비탈 승려 따라 찾아보니  

石函瓦缶綠蘚蝕  

돌함과 뼈단지가 푸른 이끼에 잠식되었네

沈吟欲去仍少立  

떠나려다 생각에 잠겨 그대로 잠시 있는데

蒼鼠晝爭松子落  

청설모가 한낮에 떨어진 잣을 다투는구나


김창협, <증조부의 시에 삼가 차운하여[敬次曾王考韻]>     



암벽에 새겨진 글자는 자신을 알고자 하는 열망으로 인생을 불태운 뒤 남은 일종의 사리가 아닐런지. 마음이 가라앉은 자의 본성이 글자에 숨결을 불어넣어 천고의 세월에도 이끼가 끼지 않는다. 간혹 그를 동경하는 마음들이 길을 찾아내기도 하지만 하늘도 그 땅을 숨겨 예나 지금이나 구름만 찾는 듯한 비밀스러운 그 땅에서 그의 글자를 보고 있으면 결국 두 손을 모으고 절하게 된다.  


석벽 앞에서 김창협은 그의 유골이 안치된 곳이 궁금했을 것이다. 그래서 청평사 승려에게 물어보지 않았을까.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한전(羅漢殿) 왼쪽 계곡에 돌함이 있는데, 그 속의 뼈단지에 진락공의 유골을 담았다.” 그의 유골을 매장한 자리에서 가까운 나한전은 현재 없지만 식암에서 “방향을 돌려 서쪽으로 수십 보 간 곳이 나한전(羅漢殿)”(김창협, <동정기(東征記)>)이다. “나한전의 앞에는 계곡 물이 절벽을 타고 흘렀으며, 석대(石臺) 아래에는 돌을 파낸 곳이 두 곳이 있었는데, 진락공이 손을 씻던 곳이다.”(김상헌, <청평록(淸平錄)>) 김상헌과 김창협의 설명을 단서로 나한전 위치를 추정하면 진락공 세수터 근처이다. 그곳에서 김창협이 목격한 돌함과 뼈단지에는 아득한 시간이 푸른 이끼로 돋아나 있다.


 우리는 모두는 죽는다는 평범한 사실을 새삼스레 인식하고 절로 발걸음을 멈춘 그때 그가 가슴에서 들은 말은 혹시 이런 뜻이지 않을까. “잠시 후면 너는 다 타버린 재나 몇 개의 마른 뼈로 변해 버리고 이름만 남거나, 심지어 이름조차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름이 남는다고 해도, 이름이라는 것은 단지 소리와 메아리에 불과하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 그토록 소중히 여기고 중시했던 모든 것들은 곧 썩어져 버릴 허망하고 하찮은 것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차지하려고 서로 물어뜯는 우리는 서로 싸우며 물어뜯는 강아지들이나 웃다가도 서로 티격태격하고는 금세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과 같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명상록』) 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눈으로 먹이를 다투는 청설모를 보고 있을지라도 마음의 눈으로는 자신의 인생살이를 보았을 것이다.      





이전 05화 세수터인가? 찻물터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