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자기 주도 학습을 해보겠다며 3월부터는 다니고 있던 학원마저 그만둔 상태였기에 학교 진도나 따라갈 수 있을지 내심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시험공부라는 것도 요령이 붙어야 하는 것이니 만큼, 자기 주도로 대체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물어볼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알아서 할게."
답답해도 어쩔 수 있겠는가? 애초에 대화로는 이기지 못하는 싸움이었다. 한층 강해진 자아에 짜증, 분노, 예민까지 합체된 중 2의 전투력은 가히 세계 최강이니까.
어쩔 수 없다. 플랜 B에 돌입하자.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는 거야. 시험을 2주쯤 앞두고 아이 방에서 슬쩍 영어 자습서를 가지고 나왔다. (예상대로) 이과 성향이 강한 아이의 영어 자습서에는 어떤 손글씨도, 아니 페이지를 넘겼던 흔적조차 없었다. 알아서 안 하는 것도 알아서 하는 계획에 포함된 건가?
식탁에 앉아 아이 방까지 들리도록 큰 소리로 영어 자습서 본문을 읽기 시작했다. 영어를 손에서 놓은 지 20년이 다 되어가지만(그마저도 벼락치기 토익 공부였고, 파닉스나 회화는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다), 다행히 중 2 교과서 단어나 문법이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혀가 말을 안 들어 급 브레이크를 잡고 버벅대는 구간도 있었으나, 제 멋대로 만든 리듬감에 도취되어 쭉쭉(어디까지나 내 느낌) 읽어 내려갔다.
'어? 나 좀 하잖아?'
이윽고 아이가 방에서 나온다. 이 엄마가 뭐하나? 하는 궁금증을 유발해 함께 공부하고 싶도록 만드는 것이 플랜 B였으니, 이 정도면 작전 성공이다.
"엄마, 뭐해?"
"응, 영어 교과서 읽어보고 있어. 네가 시험공부하다가 궁금한 거 생기면 알려주려고."
"근데, 발음이 좀... 영어쌤이랑 많이 다르네"
절대 절대 고맙다는 말을 기대한 건 아니다. 하지만 예상을 한참 벗어난 아이의 반응에 정신이 혼미해졌다(플랜 C는 아직 준비하지 못했는데..).
"오랜만이라서 그래."
갑자기 튀어나온 방어기제는 거짓말을 낳았다. 제대로 된 발음을 배운 적이 없으니, 소싯적 영어 역시 내 멋대로 구사했었을 뿐 발음은 원래 구렸다. 오랜만이라서 혀가 말을 안 듣는 게 아니라 영어를 향한 내 혀는 본디 뻑뻑하고 둔탁하고 딱딱했던 거다. 부드러운 쉬폰 케잌이고자 했으나, 실상은 딱딱한 바게트 식감의 그런 발음이었다.
"그럼 예전에는 괜찮았다는 말이네? 엄마가 영어 하는 걸 본 적이 있어야지. 일본어는 좀 하시더만."
"응...? 그럼 일본어 때문에 그래."
5초 만에 쿨하게 인정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일본어 전공자의 영어 발음이 구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늘어놓는다.
(일본어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외래어 표기법이 그러하니 어쩔수 없음을 이해니까요)
"너, 마꾸도나르도가 뭔지 않아?"
"응 맥도날드(McDonald)잖아. 유튜브에서 봤어."
"그럼, 와쿠친은?"
"음....뭘까?"
"백신!(Vaccine)"
"와~ 좀 심하네!"
"마지막으로, 아이 라브 마이 화자 마자 안도 브라자는?"
"응...??"
(정답은 저 아래 일본어 강좌 코너를 참고해주세요!)
"이제 알겠지? 일본어 계속하다 보면 영어 발음이 구려질 수밖에 없다고! 이거슨 운명..."
"그러네. 오케이!"
다시 쿨하게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아이. 결국 내게 영어 공부를 도와달라는 요청은 없었다. 1학기 기말고사마저 망쳐버리자 제 입으로 영어 학원에 보내달라 했고, 다행히 이번 중간고사는 발음 좋은 학원쌤의 지도 하에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취업, 이직 등 생의 기로에서 영어는 번번이 내 발목을 잡았지만, 그때마다 일본어를 핑계로 꿋꿋하게 영어 공부를 등한시해왔다.
호기심과 동경으로 영어에 기웃대다가도 이내 일본어로 되돌아오곤 했다. 언어 하나라도 제대로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어 실력이 씹어먹을 정도로 출중한 것도 아니다. 전공인 데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후 다양한 형태로 활용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밥은 먹고 살 정도의 수준"을 면치 못했다. 일본어를 하면 할수록 나는 어학에 재능도 소질도 없는 사람이라는 확신만 굳어졌다.
게다가 1년이라도 살아본 일본 문화가 익숙한 탓인지 영어권 문화는 많이 낯설었다. 주변에서 추천하는 미드를 보다가도 몇 화를 넘기지 못하고 일드로 회귀하고, 모름지기 음악은 가슴이 시키는 대로 들어야 맛이 난다는 주관인지라 의식적으로 팝송을 찾아 듣는 것은 불편했다. 일본 음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인풋의 결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경험 기반에, 자고로 어학이라는 것은 꾸준히 해야 실력이 붙는 데다 휘발되지 않기 위해 연습을 반복해야 한다는 '왕도 없는 학습법'에 질려버린 탓일까, 예상되는 아웃풋이 가늠되지 않았다.
이번 생에 영어는 안 되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게다가 이제 와서 영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사는 데에 지장이 없고, 시간을 들여봤자 날이 갈수록 똑똑해지는 파파고와의 격차만 절감할 테니 영어에 손대는 건 시간을 똑똑하게 사용하는 방법도 아닌 듯했다.
집 앞에 마땅한 학원이 없으니까, 일본어 하나만 하기에도 벅차니까, 해봤자 실력이 좋아진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공부하기 귀찮으니까 등등 말하다 보면 2박 3일이 모자랄 지경의 갖가지 핑계를 들어 안 해도 되는 이유를 찾아왔던 것이다. 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는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에, 해야 하는 아주 적은 이유들을 찾아 단련해야 한다"라고 말했으나, 나는 소신 있게 트럭에 "안 할" 이유 쌓기만을 계속했다.
그 작고 소중한 이유를 발견한 건 그야말로 최근의 일이다.
퇴사 이후 어떻게 살아갈까를 고민하던 중에 만났던 [직장인에서 직업인으로]라는 책에서 "이직처 없이 그만두었다면 미래로 미뤄두거나 막상 하지 못했던 것을 시도해보라"는 문장을 스치는 순간,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영어였다.
왜 하필 영어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가슴 한켠에 자리했던 애증이었나 싶기도 하다. 해보지도 않고 지레짐작으로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버린 것이 내심 억울했나 보다. 직장 일을 거두어내고 신경 써야 할 상하관계를 벗어나니 단전 아래에 있던 무의식이 떠올랐던 걸까?
'그래. 포기했던 걸 다시 시작하는 용기의 발판으로 삼아보자.'
의지가 솟아난 김에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그날로 토익 책을 구매해 틈틈이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열심히라는 단어를 빗대기에는 부끄러운 수준이나, "꾸준히"는 하는 중이다.
문법과 독해, 듣기가 익숙해지면 또 다른 공부 방법을 찾아볼까 한다. 이 역시 책을 읽다가, 샤워를 하다가, 길을 걷다가 갑자기 튀어나오겠지. 애써 계획하지 않고 홀연히 떠오르는 날을 기다려보련다. 내 스타일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