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이거지! 열심히 일하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술 한잔 기울이는 이 시간이 제일 행복해."
남편은 특별할 것도 없는 저녁 밥상에 감탄하며, 꼴꼴꼴 소주를 따라 원샷한다.
"당신은 진짜 먹는 데에 진심인 것 같아."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맥주캔을 딴다.
"내가 돈 쓸 데라곤 오로지 먹는 것뿐이잖아. 삶 자체가 군더더기 없이 미니멀하지."
"근데 이제는 내 월급이 끊겨서 먹는 즐거움마저 마음껏 누리지 못할지도 몰라. 부동산이나 투자 공부를 해서 자산을 좀 더 불려놨어야 했는데... "
퇴사로 줄어든 소득을 메우기 위한 방편이 있었다면 생활비 부담이 줄었을 것 같다는 가정법을 곁들인다. 무리해서라도 밀어부쳐볼 걸. 후회와 한숨이 뒤섞인다.
"그랬다면 다른 걸 포기하거나 희생해야 했을지 몰라."
그는 내 정수리께에 손을 얹고는 잔잔하게 토닥여준다. 나를 안심시킬 때 하는 행동이다.
1년 전부터 퇴사를 결심했으나, 당장 때려치울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월급의 부재" 때문이었다. 15년 이상 맞벌이로 살며 지출 규모를 꾸려왔기에 예산의 절반이 뚝 잘려 나가는 상황을 함부로 가늠하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퇴사하기 전에 가치 있는 기술이나 파이프라인을 장착했으면 좋았으련만, 나를 정비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던 만큼 양다리를 걸치고 준비하는 옵션은 생각하지 않았다. 현실적인 솔루션은 내 월급을 뺀 예산 안에서 생활할 수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이었다.
퇴사 전 6개월 동안 남편과 나는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TF팀을 결성(직장인 관성을 못 버림), 워크숍을 해야 한다며 저녁마다 술자리를 가졌다. 그 사이에 단골이 된 술집만도 여러 곳이다.
돈 아낄 궁리를 한다면서 그렇게나 돈을 뿌리고 다니다니. 카드 명세서를 볼 때마다 술 먹고 탈이 난 속보다 돈 때문에 쓰린 속이 더 아프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 덕에 사장님들이 서비스도 왕창 주셨으니 그리 손해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안사면 100% 할인이라던데 사은품 받았으니 이득이라고 여기는 꼴인가?)
초기에는 최소한으로 필요한 예산을 세우고, 각 항목별 지출 규모를 조율하는 "정량적 점검"이 주를 이루었다. 우선순위와 지출 순위를 정렬하고 중요하지 않은 항목은 줄이거나 배제하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면 옷이나 신발은 당분간 아이들 것 외에는 사지 않기로 하거나, 외식비는 한도를 정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소소한 절약 방법에는 인테리어나 주방 소품에는 일절 돈을 쓰지 않는 것, 카페 방문 횟수를 제한하는 것 등이 있었다.
자, 이제 실행 방안을 마련했으니 TF 팀은 해체하고 테스트 운영 기간을 가질 법도 한데, 우리는 어느새 술 한잔 기울이며 퇴사 후의 삶의 변화를 그리는 이 시간 자체를 즐기게 되었다(계속 술 먹으러 다녔다는 이야기). 대화의 깊이가 더해지면서 그 초점은 돈에 대한 가치관을 공유하는 "정성적 기준"으로 옮겨가게 된다.
"10억 줄 테니 개발에 땀나도록 일해야 한다 VS 1억 줄 테니 놀아도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할 거야?"
"헐, 일하다 죽겠다."
"그치? 나도 그냥 1억 받고 놀래. 아니면 그걸로 작은 매장 하나 차려도 되고."
"응! 여행을 가도 좋겠다."
"마저. 혹은, 해보고 싶은 걸 배워서 취미 생활 겸할 수 있는 소득원을 만드는 방법도 있어."
공상인지 망상인지 모를 상상을 안주 삼아 술자리는 한껏 달아오른다. 환장의 팀웍이다.
남편과 나는 돈 부자가 아닌, 시간 부자로 살고 싶어 돈 대신 시간을 선택한 것이니 거기에서 더 큰 만족을 느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을 함께 했다. 명품을 좋아하지도 화려한 삶을 꿈꾸지도 고급스러운 물건을 욕심내지도 않는 소박한 우리이기에 돈이 많아봤자 쓸 곳도 없으며, 욕심의 대상은 스스로 주도하는 시간의 양일 뿐이라고.
귀착점은 느긋하고 소박한 오늘의 행복을 지키는 것이었다. 바삐 돌아가는 복잡한 서울 한복판에 살면서 한가로운 소리나 지껄이는 듯 보이겠으나, 둘 다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성향대로 일상 속 작은 것들을 누리고 사는 쪽이 더 잘 맞았다.
나노 단위로 시간을 쪼개 살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원샷하는 대신,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호호 불어가며 마실 수 있는 여유를더 좋아하는 것이다. 자꾸만 궁둥이를 걷어차려는 자기 계발서의 행동강령으로 머리를 채우는 것보다,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에세이 문장을 곱씹으며 머리를 비우는 쪽에 마음이 간다.
(신혼초에는 지지고볶고 싸운 기억도 많지만) 어느덧 부부의 삶은 같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물건, 관심사, 인간관계는 간소하게 유지하면서, 남는 시간엔 대화하고 산책하는 검박한 삶에서기쁨을 느꼈다.
아, 유일한 사치는 술값이려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난 6개월 동안 TF팀 워크숍을 빙자하며 동네를 돌아다니다 보니 안주가 신선하고 가성비 좋은 주점들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술값에 들인 돈이 아깝지 않은 이유가 하나 더 있었군). 닥치면 정신차린다는 말처럼 막상 퇴사를 한 이후부터는 그 횟수도 줄이기 시작했다.
초창기 워크숍에서 정해진 내용 대로, 카페 가는 횟수 역시 현저히 감소했고(남편이 만화카페를 운영 하기에 같이 출근해서 커피나 차를 마신다), 소확행 혹은 시발 비용(거친 표현 죄송합니다;;)으로 길에 뿌리는 돈도 말끔히 사라졌다. 옷에 대한 욕심은 아예 없어졌는데, 이 부분은 지난 1년간 훈련을 해온 덕분이기도 하다.
상황에 맞춰 지출이 제자리를 찾아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자, 예산을 일일이 통제하거나 억지로 조이기 보다는 흐름에 맡겨보기로 했다. 아마도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하거나 옐로 카드를 집어 들어야 할 때는 또 다시 TF팀을 구축할 것 같지만(그래도 술값은 아끼자).
나의 직업이 정해지기 전까지 당분간은 남편 매장 수입만으로 생활해보다가 예산이 부족해지면 둘 중 한명이 Gig Worker가 되는 옵션을 생각하고 있다. 정답 없이 상황에 따라 수정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면서 바꿔가는 Agile 방법이다.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범주도 넓혔다. 노트북 앞에 앉아 자판이나 두드리는 생활만 해와서 시야가 좁을 뿐, 사실 해볼만한 일은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것 같다. 이미 나오기로 결심했다면, 그리고 나왔다면 새로운 모든 경험들을 두 팔 벌려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퇴사를 고민한 지난 1년은 이런 마음가짐을 갖기 위한 시간이었나보다).
마침 최근 들어 손노동이 몰입의 기쁨을 선사하고 문제 해결력을 길러준다는 사실을 깨달은 참이다. 몸을 쓰는 일은 실용적이며 기억 또한 오래간다. 어릴 적 배웠던 자전거와 자기장의 원리 중 어떤 걸 더 많이 기억하고 있는지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다양한 경험은 앞으로의 삶에서 가치 있게 축적될 것이라 믿어본다. 단, 일이 삶을 넘어서지 않도록 돈이 조금 부족해도 멈출 때는 멈추기로 한다.
일에 영혼마저 들이붓고 공허한 눈으로 퇴근하는 길, "일하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었다.
먹고사니즘은 평생에 걸쳐 우선순위에 자리해야 하겠으나 돈의 가치가 최상이 되는 순간, 먹고살기는 죽기살기가 되곤 한다. 죽기살기로 돈 벌어서 부자가 된 후에 삶을 즐기겠다는 가치관은 존중하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었다.
일하다 죽지 않고 살아서 제 발로 나온 김에, 앞으로는 죽을 것 같이 힘들게 노력하지 말고 내 속도와 방향에 맞춰 살아보기로 했다. 돈은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먹고살아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