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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Aug 13. 2022

퇴사하자마자, 불면증의 저주가 풀렸다고?

저주에 걸렸던 그 미친 여자는 이제 없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옛 동료로부터 연락이 왔다. 자발적 백수를 자처했던 터라, 퇴사 이후 생활이 꽤나 궁금한 모양이다.


마지막 출근일이 불과 2주 전이었기에 '옛'이라는 수식어가 아직은 어색하다. 하지만 모든 지난날이 그러했 듯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옛이야기 한편에 자리하겠지.


옛 동료의 물음에 오전에는 소소하게 사부작 거리는 일들을 한다고 답했다. 구체적으로 뭘 하냐는 질문이 이어지자 "일기, 요가, 영어 공부"라고 설명하며, 오후의 일과는 집안일, 강아지들이랑 놀기, 독서나 글쓰기라고 전했다. 저녁에는 아이들 밥을 차려주고 난 후 남편 가게에도 나간다며 묻지도 않은 이야기들까지 술술 읊어댔다.


"오호라, 그 정도면 거의 건물주 생활 아닙니까? 여기에 골프까지 배우시면 그야말로 갓벽입니다!"


이어 나의 백수 생활을 찬양이라도 하는 듯, 채팅창에 현란한 이모티콘들을 등장시킨다.


아, 괜히 말했어. 그냥 넷플릭스나 보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뒹굴뒹굴한다고 할걸, 쓸데없이 거창해 보이는 거드름을 피워댄  같아 후회됐다.


집에만 머무르는 시간이 어색할까 봐 퇴사를 준비하며 만들어 놓은 "돈 적게 드는" 취미 생활일 뿐인데, 사무실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의 시선에서는 호사스럽기 그지없는 백수의 일상으로 보이나 보다.



아직 방학 중인 아이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정리한 후 살림을 챙기고 나면 대략 3. 드폰을 손에 쥐고 강아지들과 소파에 드러눕는다.

출처 : Unsplash

낮잠 자기 딱 좋은 자세로, 회사원 신분일 때 흔히 했던 주말 패턴이다. 하지만 퇴사한 이후에는 낮잠 자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밤 수면의 질과, 수면의 양이 절대적으로 좋아졌기 때문이다.


야호!!!! 산 정상에 올라 이 상쾌한 기분이 메아리로 온 세상에 울려 퍼질 때까지 마음껏 소리치고 싶지만, 정작 등산에는 취미가 없으므로 일단 패스!


최근 3년은 마치 잠신의 저주라도 걸린 듯 밤마잠과의 사투를 벌이곤 했다. 한밤의 미친 여자라는 제목으로 책 한 권을 써도 될 만큼 사방이 까만색으로 도배된 환장의 밤들이었다. 


하룻밤에도 수십 번씩 죄 없는 베개를 내리치고, 무고한 이불을 걷어찼다. 자세를 고쳐 잡아도 소용이 없자, 대뜸 일어나 명상을 하고, 갑자기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기도 했다. 소설 불편한 편의점과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는 오디오 완독만 몇 번 한 것인지(참고로 러닝타임은 각각 8, 10시간이다).


게다가 한 번 깨면 그대로 잠이 달아나 아침까지 뜬눈으로 지새우는 날도 부지기수였는데, 여전히 어둑어둑한 새벽녘이 꼭 내 미래를 드리우는 것 같아 해가 뜰 때까지 어떻게든 눈을 감고 있었다. 해가 떠서 저절로 눈이 떠지는 아침을 맞고 싶다는 평범하고 소박한 소원마저 외면당하자 괜스레 삶이 서글퍼지기도 했다.


만성 수면 부족 상태에서 오후 3시는 다시 잠신의 저주가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다만 밤과는 정반대의 형태로 출몰해 마의 3시라 일컬을 만큼 잠이 정신없이 쏟아져내렸다. 이건 뭐 지킬 앤 하이드야 뭐야.


노트북에 손을 얹은 채 놀이동산 회전바구니 마냥 고개가 360도로 정신없이 허공을 휘젓기도 했다. 애써 정신을 차리려 창가 쪽 휴게 공간을 찾거나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러 카페에 가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자리로 돌아와도 정신은 여전히 몽롱했다. 그 이후는 이 악물고 버티는 시간들이었다. 퇴근할 자유가 허락되는 6시까지.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불면의 밤.



흔히 태도나 상황이 어떻게 무 자르듯 단칼에 바뀌냐고들 하지만, 퇴사와 함께 불면증은  자르듯 사라졌다. 날짜 분기점을 지나자마자 단칼에 저주가 풀리니 허무함을 넘어 섭섭할 지경이다.

출처 :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밤에 충분히 자고 있기에 오후 3시의 저주도 자취를 감췄다. 강아지들의 배와 턱밑을 정신없이 쓰다듬으며 창밖을 내다보거나 입이 심심해진 기분에 벌떡 일어나 아이스크림을 꺼내먹는다. 정신을 억지로 붙들어 매려는 몸부림이 아닌 평온한 힐링이다.


"자, 예뻐 예뻐 많이 해줬으니까 이제 너희들끼리 놀아. 엄마는 할 일 좀 할게"라며 한국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강아지들에게 친절하게 나의 일정을 설명하고는 식탁 의자에 앉는다.


정신이 또렷한 덕에 책을 읽어도 진도가 쭉쭉 나간다. 글감이 튀어 오르면 브런치나 블로그 앱을 켜고 메모를 해두거나 내친김에 글 한편을 써 내려가기도 한다. 글이 막히면 과감하게 덮어버리고 집안을 둘러본다.


"집안일엔 끝이 없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친정 엄마를 떠올리며, 평소에 물건이 난잡하게 놓여 불편했던 공간들을 정리하거나, 그새 어질러진 바닥과 표면들을 치운다. 미뤄둔 빨래를 개기도 하고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와 세면대를 닦기도 한다.


하지만 에너지를 많이 들이지는 않는다. 집안일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기에 천천히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에너지를 쏟아서 열심히 해야 하는"일"이 되는 순간 가족들과 나에게 짜증과 성질을 낼 것 같아서다.



창밖을 내다보니 여전히 한 낮이다.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나간 김에 자전거나 한 바퀴 타고 장을 봐서 들어와야겠다고 생각한다.


아직 뜨거운 여름날이지만, 자전거를 타며 마주치는 바람이 제법 선선하게 느껴진다. 넓은 길에 들어서니 시야가 탁 트이고 장애물도 없어 마치 포카리스웨트 광고 모델이 된 것 같은 근본 없는 착각마저 들어버린다.


상쾌한 기분에 자유로운 마음이 더해지자 좀 더 달리고 싶어 진다. 옛 동료가 부러워마지 않던 백수의 생활이 이것이려나? 건물주는 아니지만 충분히 호사롭다.


같은 시각 병든 닭처럼 앉아서 유 헤드 빙빙을 시전하고 있던 과거의 나와, 페달을 밟으며 싱싱 달리고 있는 현재의 내가 교차하면서 책상 앞 잠신의 저주에 걸렸던 미친 여자는 저 멀리 아득하게 사라져 간다.


백수의 하루가 늘어날수록, 회사와 동료들, 그리고 "죽기 살기로 버텼던 오후 3시의 나"가 조금씩 낯설어지는 기분이다. 지난날들이 그러했 듯 자연스럽게 과거의 시간들로 흘러들어 가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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