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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Aug 23. 2022

쓰레빠를 신고 회사에 갔다

발가락에 자유를 허하노라

지난해부터 복장 규제가 완전히 없어지면서 C레벨의 고위급 간부들도 하나둘 반바지를 입고 출근하기 시작했다.


이어 젊은 남직원들이 바로 트렌드를 이끌며 윗세대와는 미묘하게 다른 느낌의 경쾌한 반바지 차림이 하나 둘 늘어갔다.


하지만 전면 자유 복장이라 해도 앞뒤 뚫린 쓰레빠(날씬한 여성용 뮬이 아닌, 사이즈 넉넉한 슬라이드형 슬리퍼, 구분을 위해 쓰레빠라고 표기함)를 신고 출퇴근하는 것은 암묵적으로 금기시되었다.


반바지라 하더라도 대부분은 운동화를 매치했고, 버클 달린 샌들을 신는 직원들도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여긴 회사고, 너는 직원이야."


빌려준 간판과 소속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 월급쟁이로서 최소한의 정체성은 필요했던 모양이다. 솔직히 쓰레빠 차림은 동네 편의점이나 집 앞 쓰레기장 패션의 대명사가 아니던가? 회사에 대한 사춘기 반항심으로 똘똘 뭉친 나조차도 앞뒤 뻥 뚫린 쓰레빠를 신고 출퇴근하는 건 평생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직장인들의 상당수는 의자 아래에 쓰레빠를 두고 산다. 나 역시 그랬다.


자리에 앉아 앞뒤 꽉 막힌 신발을 쓰레빠로 갈아 신는 그 순간, 작지만 소중한 해방감이 느껴진다.


자리에서 일할 때만이라도 발가락을 요리조리 움직이며 자유를 만끽한다. 쓰레빠 앞쪽 끝까지 발을 밀어 넣고 느슨하게 풀어보기를 반복한다. 한시도 가만히 못 있는 듯 하지만, 숨죽인 듯 고요한 사무실에서 산만한 건 오직 발들뿐이다. 눈은 모니터를 뚫을 기세로 총기를 유지하고 손과 팔 역시 키보드를 두드리기에 최적의 위치에서 숨 가쁜 움직임을 이어간다.


일이 잘 안 풀리거나 긴장될 때는 다리떨기로 넘어가는데, 이때 앞뒤 막히지 않은 쓰레빠라면 한층 리듬감이 생긴다. 그러다 자세가 슬슬 지겨워지면 한쪽 다리를 꼬고 앉는다. 헐렁하게 걸쳐진 쓰레빠가 아슬아슬하게 떨어질랑 말랑하며 짜릿한 스릴을 선사한다. 그러다 스르륵 미끄러져 툭 하고 떨어지는 순간,


"OO님, 내 자리로 와주세요."


팀장이 호출한다. 재빨리 신발을 갈아 신고 일어선다. 보고는 물론 화장실에 갈 때에도 정중하게 신발을 갈아 신는 것은 묵시적인 룰로, 쓰레빠를 찍찍 끌며 사무실을 돌아다니는 행위는 무례하거나 다른 직원들의 집중을 방해하는 일로 간주되었다. 



초여름에서 늦여름까지 동네에서는 늘 쓰레빠를 신고 다닌다. 


덥거나 수시로 비가 오는 여름 날씨와도 찰떡궁합인 데다 무심한 듯 대충 입는 원마일웨어(동네 패션의 고급진 표현)와도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8월 중순, 딱 하루 회사에 가야 할 일이 있었다. 노트북을 반납하고 동료와 저녁을 먹기로 한 날이었다.


정식 근무는 7월 말로 종료되었으나, 휴가가 남아 있어 연차 소진 후 8월에 퇴사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인사팀 안내에 따르면 노트북 역시 퇴사일에 반납하면 되었다.


잠깐 들를 뿐이라도 마지막 공식 출근일이니 만큼 예의를 갖추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평소 출근 복장인 비즈니스 캐주얼 스타일 대로, 면티에 리넨 롱스커트를 집어 들었다.


코디는 과하거나 덜함 없이 깔끔하게 떨어졌다. 하지만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어색했다. 그새 살이 붙긴 했으나 치마가 작아질 만큼은 아니었는데 지퍼를 잠그고 나니 거북하고 갑갑했다.


깡충한 단발머리에 어울리지 않게 여성스러운 차림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산뜻한 느낌을 살리고 싶어서 다시 한번 짧은 단발로 자른 터였고 이는 고무줄 통바지와의 조합이 가장 좋았다. 퇴사한 이후에는 통바지 두벌을 번갈아 입으며 지냈다.


망설일 것도 없이, 바로 그 전날에 입었던 고무줄 통바지로 갈아입었다. 역시, 조이는 느낌 없이 허리가 편안했고 단발과 궁합이 잘 맞았다.


요즘 내 모습, 그러니까 동네 돌아다니는 패션 그대로였다.


신발 선택에 시간을 쏟을 이유도 없었다. 여기엔 쓰레빠가 제일 잘 어울리니까.




늦은 오후 회사에 도착했다. 조용히 해당 부서로 올라가 노트북만 반납하고 카페에서 동료를 기다리려 했는데, 마침 엘리베이터 앞에서 팀장과 다른 동료들과 마주쳐버렸다.


"어? 안녕하세요? 노트북 반납하러 오셨어요?"


그쪽에서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아, 네네."


"오신 김에 우리 층에도 들러서 인사하고 가세요."


"아, 근데 보시다시피 쓰레빠에 복장 불량이에요."


그제야 그는 내 쓰레빠와 츄리닝에 가까운 고무줄 바지에 주목한다.


"아, 쫌 그렇겠네요. 그나저나 회사 안 나오니 좋아요?"


"네, 잠도 잘 자고 소화도 잘 되어서 살도 쪘어요(참고로 나는 왜소한 체격이 늘 스트레스인 종이인형형 인간이다)."


"부럽다."


말은 저리 해도 자발적 백수가 결코 부러운 건 아닐 테고, 평일 대낮에 쓰레빠 신고 돌아다니며 그 차림으로 회사에 와 본 게 부러운 거겠지?


앞으로도 계속 좋기만 할지는 알 수 없다. 아마 더 큰 고민과 고통의 시간이 올지도 모른다. 그래도 여름 햇살 아래 쓰레빠를 찍찍 끌며 발가락에 예의를 강요하지 않고 꼼지락 거림을 허하는 자유로움 만큼은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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