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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Sep 28. 2022

퇴사 전, 패션 미니멀리스트 선언

1년간 옷 사지 않고 살기 & 화이트 티셔츠 5벌로 여름 나기

옷을 찾지 못해 지각할 뻔한 그날 이후로 옷을 사지 않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옷을 고르는 데에는 여전히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비되고 있었다. 이제 비움의 단계로 나아갈 차례였다.


옷 욕심이 줄어든 만큼 비움은 수월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이는 사지 않겠다는 절제보다도 실천하기에 더 어려운 영역이었다. 유명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에는 "설레지 않으면 모두 버려라"라고 했건만, 내겐 아직도 설렘을 주는 옷들이 수두룩했던 것이다.


한 두 개 찔끔씩 버리다 말고는 옷 고르는 데 한세월 걸리는 시행착오를 반복했다.


옷장의 충격이 잊혀갈 때쯤 유튜브에서 미니멀리스트들의 옷장을 보게 되었다. 4계절 합쳐 20벌 남짓한 옷들, 혹은 계절별 33개의 옷 신발 가방으로만 생활해도 충분하다는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신기한 마음에 이끌려 들여다보았을 뿐인데, 신묘하고 기묘한 알고리즘은 나에게 지속적으로 미니멀리스트들의 생활을 노출시켰다. 영상을 보면 볼수록 복리로 늘어나서 홈 화면은 어느새 미니멀리즘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생소한 노래도 자꾸 듣다 보면 좋아지는 것처럼 신기함을 넘어 호기심이 들기 시작했다. 패션 미니멀리스트들은 한결 같이 단순해진 삶의 변화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물론 채널 정체성을 지키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옷을 줄였더니 옷을 고르느라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고,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스타일과 좋아하는 소재만 남겨두니 입을 때마다 기분이 좋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남는 에너지와 시간을 더 중요한 곳에 집중할 수 있어 생활의 짜임새도 좋아졌다는 것이었다.


실천해보고 픈 마음에 궁둥이가 들썩거렸다. 해야 한다고 등을 떠미는 것과는 다른, 천상에서 내려와 손을 내밀어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입었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옷들을 추리기 시작했다. 숫자를 33, 20으로 제한하면 지레 포기할 것 같아 일단은 소유 vs 비움의 구분만 해두기로 했다.


기분이 좋아지는 옷들은 대부분 통풍이 잘되고 촉감이 좋은 면이나 실크 혼방, 양질의 모직 혹은 캐시미어 소재였다. 컬러는 화이트와 그레이, 블랙이 주를 이루었다. 톤온톤을 위해 아이보리와 남색도 남겨두었다.  


40대에 접어든 만큼 반짝이는 유행을 좇는 것보다 보기에도 좋고 활동하기에도 편안한 옷차림이 어울린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유행에 민감한 스타일을 선택할 경우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을 주지 않으면 자칫 촌스러워 보일 나이가 된 것이다.


다 버릴 만큼의 용기는 없었지만, 충동구매했던 것, 움직임이 불편한 옷, 체형을 고려하지 않은 옷, 유행에 민감한 옷, 문양이 화려한 옷, 색감이 어울리지 않는 옷은 차례차례 비워냈다. 특히 한 때 옷장을 호령했던 샤랄라 스커트와 현란한 원피스들에게는 진한 이별을 고했다.


비움한 옷들 (극히 일부임..빙산의 일각..)
비움한 옷들 (극히 일부임..빙산의 일각..)

어느 날은 아쉬움을 담아 옷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전하기도 했다.

(1) 검정 플리츠 바지에게
시원하고 촤르르한 느낌은 늘 좋았지만, 고무줄 바지임에도 불구하고 늘 배가 쪼이고 불편했어요. 게다가 기장도 길어서 걷다 보면 신발로 바짓단을 밟기도 했죠. 입을수록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고, 손에서 멀어졌습니다. 안타깝지만 이제 더 이상 입지 않게 될 것 같아요.

(2) 남색 땡땡이 블라우스에게
시원하고 기분 좋은 소재는 언제 입어도 산뜻한 기분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귀엽고 깜찍한 디자인은 이제 내 나이에 맞지 않는 것 같아요. 같이 입을 바지나 스커트도 없어서 아무래도 이제 안녕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3) 그레이 코트에게
처음에는 포근한 소재와 디자인 모두 마음에 들었지만, 몇 번 입지 않았는데 보풀이 나더라고요. 입을 때마다 보풀을 떼느라 고생을 좀 했습니다. 이제는 고생할 만큼 설레지 않아요.

(4) 진회식 원피스에게
네크라인이 유니크하고 세련되서 한때 정말 애정했어요. 그런데 함께한 세월이 어느덧 7년이네요. 사용감도 많아지고 기장도 짧아서 앞으로는 찾지 않을 것 같아요. 그동안 나와 함께해줘서 고마워요. 수고 많았습니다.

(5) 남색 + 분홍 원피스에게
휴가철에 정말 유용하게 잘 입었어요. 여행지에서 주로 입었기 때문인지 이 옷을 입을 때마다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답니다. 더 좋은 소재의 비슷한 옷들이 많아서 더 이상은 찾지 않을 것 같아요. 너무 좋은 추억과 사진들 고마워요.


그제야 옷걸이 하나에 옷 한 개가 걸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갈길은 멀지만 옷 찾기가 한결 수월해져 외출 준비가 가뿐해졌다.


남겨진 옷들로 캡슐 옷장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직접 조합해 본 돌려입기
직접 조합해본 돌려입기


이리저리 조합하다 보니 생각보다 경우의 수가 많이 나왔다. 막상 입으려는 옷을 찾지 못하던 폭발기엔 옷장에 옷 잡아먹는 귀신이라도 사는 건가 싶었는데, 신통방통하게 경우의 수가 늘어나니 이젠 옷을 만들어내는 역할로 새롭게 포지셔닝한 건가 싶기도 했다.


옷 선택의 시간이 줄었음은 물론, 돌려 입기와 재탕 입기로 정이 들어버린 모양인지 새 옷이 아닌 현재의 옷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움트기 시작했다. 쇼퍼홀릭이었던 과거의 내가 알면 놀라자빠질 만큼 구매 욕구가 사라졌다.




퇴사를 앞두고 티셔츠 5벌 만을 입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바뀐 상황에 맞춰 단출한 차림으로 사는 연습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직장인과 백수 사이의 선을 긋는 선언쯤이려나?


올여름에 입었던 5벌의 화이트 티셔츠

소득을 포기하고 시간의 자유를 선택한 만큼, 소비에 대한 통제력이 필요했고, 의식주 중에서는 "의"가 변수 없이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카테고리였다. 지난 1년간 옷 쇼핑을 끊어보면서 생각보다 많은 옷이 필요하지 않음을 깨달은 터였다. 분수에 맞는 지출 구조는 안정적인 가계 운영에도 도움이 될 것이 자명하니, 풍요로움 대신 소박한 삶에 만족할 수 있는지 실험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도미니크 로로의 [심플하게 산다]에 힌트를 얻어 옷차림에서 단순함을 우선시한다면 "삶의 모든 과잉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도 포함되었다.


컬러를 통일함으로써 단순함을 극대화했고, 고민할 것도 없이 선택은 화이트였다.


이로써 잡스나 주커버그를 코스프레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ㅎㅎ). 쿨톤에 왜소한 체구 탓에 밝고 선명한 화이트가 더 잘 어울리는 데다 깔끔한 맛도 있었으니까(라고 굳이 변명 중).


조금씩 길이나 품이 다르고 두께 차이는 있어도  비슷비슷한 옷들이었기에 출근할 때는 아무 옷이나 골라 들면 되었다. 스커트나 원피스 역시 그중에 손 가는 대로 집어 입었다. 


옷을 선택하는 데에 필요한 시간은 "제로"에 가까워졌다.


옷이 너무 많아서 고민을 거듭하다가 지각할 뻔한 위기에 처했던 시절과는 차원이 다른 간결함이 있었다. 이것들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하니(아니 아예 생각할 필요가 없어짐) 에너지와 시간도 절약되었다.


의외로 매일 같은 스타일의 내가 궁상스러워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만의 시그니처 룩이 생기는 것 같아 자신감이 생겼다.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고 편안해 보이는 옷들로만 돌려 입었기에, 매일 아침마다 체형이 잘 커버되었는지 세련되어 보이는지를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선택하지 않을 자유를 통해 물질로부터의 해방되는 기분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퇴사 이후에도 여름의 끝자락까지 화이트 티셔츠 5벌로만 지냈다. 9월의 막바지인 지금도 그 위에 얇은 가디건이나 점퍼만 걸치고 다닌다.


그리고 내년 봄까지 3 계절 동안 기분을 좋게 하고 평온을 가져다주는 옷들만 남기고 모두 비워낼 계획이다.                   


쓸모없는 옷들을 모두 거두어 낼 때 즈음, 빽빽한 옷들을 바라볼 때마다 들었던 죄책감, 이 옷을 다 입을 수는 있을까라는 부담감, 관리되지 않은 옷을 마주할 때의 실망감, 꽉 들어찬 옷장을 볼 때마다 느끼는 갑갑함들이 말끔히 사라지기를 바라본다.


여백이 탄생한 옷장에는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아름다움, 평온, 그리고 낭만"이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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