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꾸리 앗 딘 02
표지 사진 출처: 쿠르드 어린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자이툰 부대원 / 남도현, '이라크 파병됐던 자이툰 부대는 어디로 사라졌나', <중앙일보>, 2017-10-13
다시 한 달이 흘러 8월이 되자 드디어 더위가 한 풀 꺾였다. 그래봐야 여전히 한낮 기온이 50도를 넘나들었지만 6월 말에서 7월 초 더위가 절정에 달했을 무렵 55도 가까이 기온이 치솟던 믿기지 않은 더위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사람의 적응력은 정말 무서워서 기온이 54, 5도까지 오르다가 50도 정도로 떨어지니 살 것 같았다.
그즈음 현우가 정성을 쏟는 대상은 아홉 살 먹은 아랍계 소년 라만(Rahman)이었다. 라만은 약 한 달 전에 디프테리아(diphtheria)에 걸려 자이툰 병원에 실려 왔다. 디프테리아는 백신 접종으로 쉽게 예방할 수 있어 선진국에선 거의 사라졌지만 쿠르디스탄과 같은 빈곤 지역에선 백신 접종은 사치에 가까웠기에 면역력이 약한 어린이들 사이에서 흔하게 발생하는 질병이었다.
병원에 실려 올 당시 라만의 상태는 매우 위중해서 크룹(Croup)으로 인한 황소 목 현상이 심각해 오자마자 기관절개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디프테리아 환자는 보통 항생제를 투여해 집중 치료하면 3주 정도면 회복되지만 라만은 원체 건강과 면역력이 저하된 상태여서 입원 4주 차가 되어서야 겨우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라온 탓인지 라만은 아홉 살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작고 야위었다. 깡마른 몸매 때문에 더욱 커 보이는 해맑은 눈망울에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늘 미소 짓는 귀여운 사내아이였던 라만은 병원 내에서 인기를 독차지하는 특이한 환자였다.
현우 역시 병증에 시달리면서도 밝은 모습을 잃지 않는 라만이 귀여워 다른 환자들보다 훨씬 더 각별히 소년을 보살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병실을 찾아가 함께 놀아주고 의료진 몰래 초콜릿 등 간식을 가져다준 덕분에 라만은 현우를 삼촌처럼 믿고 따랐다.
그런 라만이 건강을 회복해 드디어 퇴원하고 집에 돌아갈 날이 되었다. 라만의 집은 아르빌 시내가 아닌 하울러 공항 너머 외진 벌판 지역에 있었다. 현우는 아쉬운 마음에 라만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호송 임무를 자청했다.
라만의 집까지 직접 가지 않고 하울러 공항 외곽의 미군 경계 초소 앞에서 만나 소년을 인계하기로 사전에 라만의 가족들과 협의했고 자동차를 타고 가면 그리 먼 거리도 아닌데다가 미군이 통제하고 있는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었기에 현우는 선탑자 없이 병원에서 같이 일하는 아랍어 통역 카심(Qāsim)과 동승해 단독으로 라만을 뒷좌석에 태우고 군용 지프를 몰고 만남의 장소로 출발했다. 카심은 드물게 쿠르드어와 아랍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고 영어까지 능통해 자이툰 병원에서 현우의 전담 통역으로 일하고 있는 쿠르드인이었다.
미군 경계 초소로 향해가는 내내 라만은 오랜만에 가족과 재회한다는 기대에 들떠 쉴 새 없이 웃고 떠들고 장난을 쳤다. 카심도 만찬가지로 기분이 좋은지 라맘의 장난에 흔쾌히 맞장구를 쳐주며 담소를 나누었다. 현우는 둘의 대화를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두 사람이 즐거워하니 따라서 기분이 유쾌해졌다.
3년 전 자이툰 부대 공병대가 새롭게 깔아 놓은 포장도로를 따라 20여 분을 달려 만남의 장소에 도착해 보니 미군 초소 좌측 전방 벌판에서 공병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지뢰 탐색 및 제거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아르빌 인근에서는 이란-이라크 전쟁 때 무분별하게 매설된 지뢰가 폭발하는 사고가 비일비재했다. 아마도 최근 비행장 인근에서 새로운 지뢰밭이 발견된 모양이었다.
현우가 도로를 벗어나 경계 초소 앞에 지프를 세우고 미군 초병에게 방문 목적을 설명하자 둘 중 선임으로 보이는 병사 한 명이 지뢰 제거 작업 중인 공병들을 가리키며 위험하니 작업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이를 가족에게 인계하라고 말했다.
현우가 주위를 둘러보니 오른편 먼발치에 라만의 가족이 먼저 와서 현우 일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꽤 여러 명이 몰려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온 가족이 모두 라만을 마중 나온 것 같았다.
현우는 지프를 몰아 경계 초소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라만의 가족이 서 있는 반대편 풀밭가로 옮겨갔다. 멀리 가족들의 모습을 발견한 라만은 지프가 멈추기도 전에 뒷좌석에서 일어서 가족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좋아했다.
차를 세운 현우는 지프에서 내려 뒷좌석의 라만을 번쩍 안아 올려 땅에 내리 놓고는 평소 소년이 무척이나 좋아하던 초콜릿 한 상자를 손에 쥐어주고 끌어안고 등을 두드려 주고는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냈다. 현우와의 이별이 아쉬운 듯 잠시 머뭇거리던 라만은 작별인사를 마치고는 서둘러 몸을 돌려 초원 너머에 서있는 가족들을 향해 달려갔다. 현우와 카심은 손을 흔들며 점점 멀어져 가는 라만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서 있었다.
<제 8 장 꾸리 앗 딘 03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