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꾸리 앗 딘 03
표지 사진 출처: 아르빌 근교의 자연환경, 열사(熱沙)의 땅 이라크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 아르빌 @ Trip.com
그런데 갑자기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라만이 가족들을 향해 초원을 달려가자 가족들 틈에 섞여 있던 목양견(牧羊犬)이 어린 주인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꼬리를 흔들며 무리에서 뛰쳐나와 라만을 향해 뛰어왔다. 개와 소년이 마주치기 직전 칠팔 미터 전방에서 느닷없이 폭발이 일어나 화염, 먼지와 함께 개가 하늘로 치솟았다. 목양견이 라만을 향해 달려오다 그만 땅에 몰래 매설돼 있던 지뢰를 밟아버린 것이다.
날카로운 폭발음과 후폭풍에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수그린 현우와 카심은 곧 다시 일어나 라만의 상태를 살폈다. 폭발로 인한 흙먼지가 가라앉자 멀리서 뒤로 벌렁 나자빠졌던 라만이 엉거주춤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비록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기는 했어도 무사한 듯 보였다.
폭발에 놀라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라만은 곧 공포에 질려 울부짖으며 현우 일행이 서 있은 곳으로 되돌아 달려오기 시작했다. 20여 미터 떨어져 있던 경계 초소에 있던 미군 초병들은 폭발에 놀라 경계 태세를 갖추고는 점점 가까워 오는 라만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Stop, stop there, don't come this way!"
미군들은 라만이 뛰어오다 혹시라도 미처 탐지하지 못한 지뢰를 밟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영어를 알아들을 리 없는 라만은 겁에 질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뛰어왔다. 미군은 라만이 멈추지 않자 급기야 소년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처음엔 공중에 위협사격을 하다 라만이 계속해서 달려오자 마침내 조준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현우는 총을 쏘는 미군들을 향해 황급히 외쳤다.
"Don't shoot, bastards! He is just a little kid."
하지만 미군들은 현우의 외침을 못 들었는지 계속해서 총을 쏘아댔다. 다급해진 현우는 저도 모르게 어깨에 메고 있던 K-2 자동소총을 겨눠 미군들을 향해 총을 쏘려고 했다. 그때 현우의 머릿속엔 오직 라만을 구해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놀란 카심이 현우에게 달려들어 재빨리 총구를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렸다. 결국 현우가 쏜 총은 미군들이 아닌 공중으로 발사되고 말았다. 때마침 현우에 눈에 라만이 결국 미군이 쏜 총에 맞아 나동그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분노에 사로잡혀 이성이 마비된 현우는 카심을 밀쳐내고 다시 총구를 미군들을 향해 조준했다.
“안 돼, 이 새끼들아! 아직 어린아이란 말이야, 쏘지 말라고!”
옆으로 밀려났던 카심이 재차 현우를 제지하려고 달려들었다.
"Don't do that, Sgt. Nam! They're our side, US soldiers."
격분해 미군에게 총을 쏘려는 현우와 이를 뜯어말리려는 카심 사이에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현우의 총이 뜻하지 않게 격발 되었고 카심은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어느새 카심의 가슴팍에는 시뻘건 선혈이 배어 나왔다. 뜻 밖에 사고에 현우는 어쩔 줄을 몰라 그대로 그 자리에서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그 순간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린 것처럼 현우의 지각과 사고 능력 역시 그대로 마비되어 버렸다. 한동안 멍하니 땅바닥에 쓰러진 카심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미군들이 다가와 현우의 K-2 소총을 빼앗고 현우를 체포했다. 그 이후 현우는 망아상태(忘我狀態)에 빠져 자신을 둘러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물론 사고 이후론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현우는 일단 미군 헌병대에 구금되었다가 얼마 후 자이툰 부대 헌병대로 이감되었다. 헌병대에서 심문을 받는 도중에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와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단 두 종류의 대답으로 일관했다. 의도적으로 면피성 발언을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떻게 된 일인지 본인조차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호통을 치고 닦달해도 현우로부터 의미 있는 답변을 이끌어 내지 못하자 헌병대에서도 심문을 중단하고 현우를 그냥 영창에 가두어 두었다.
<제 8 장 꾸리 앗 딘 04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