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포천 골목에, 프랑스서점을 열기까지-
그녀가 나에게 갑작스럽게 상가 매물을 보러가자고 한 것은 23년 9월 5일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의 책방 자리에 계약금을 지불한 것은 9월 10일.
'책방리브레리'라는 이름으로 굴포천 골목에 책방을 연 날은 두 달 후인 11월 25일.
인생에 '사업'이라는 것은 상상도 한 적 없던 나에게 참으로 순식간에 일어난 삶의 변화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상가를 보고 온 그 날부터, 언니는 매일 매일 나를 설득했습니다. 우리는 가정도 일도 전부 챙기고 성공하게 될거라며 달콤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불어넣었습니다. 본인이 너무 즉흥적인 성격이라 미안하다는 사과도 잊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책방을 꼭 나와 함께 하고싶다고요. 나는 폭풍같은 고민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무렵 내가 친구들이나 남편에게 입버릇 처럼 했던 말은, '나 이거 안할건데, 하지는 않을건데,'였습니다.
맞아요. 내 마음속에서는 이미, 언니와 함께 책방을 꾸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온전히 내 손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어놓을 수 있는 공간이라니요. 나 또한 너무나 오래 갈망해왔으니까요.
이런걸, 운명이라고 할까요?
사실 나는 그동안 언니의 삶의 방식에 작은 동경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나와는 정말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바다를 싫어합니다. 정확하게는 물을 무서워합니다. 바다에서 불쑥불쑥 등장하는 검은 생명체들, (개멸구인지 게딱지인지 나는 아직도 그것들의 이름이 헷갈립니다.) 나는 그런 것들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언니와 적당히 존댓말을 쓰며 가끔 술친구로 지내던, 어느 주말에 언니는 해수욕장에 간다며, 망고를 데리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아이 하나 둘, 키우는 요즈음의 엄마들 사이에서 아이 넷을 데리고 해수욕장을 가는데 남의집 딸까지 데려가겠다는 사람은, 정말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자연을 접하고 뛰어노는 것이 최고의 교육이라고 믿지만 그것을 함께 해줄 수 있는 재질의 엄마는 아니었습니다. 민폐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덥썩 물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요? 게다가 아이넷이 어우러져 있는 그 환경은 돈 주고도 경험하지 못할, 귀한 경험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그 여름 우리 딸은 몇번이고 그 집 해수욕장 일정에 함께 했습니다. 나도 두어번 따라가 보았는데, 그때 고작 두돌이나 되었을 막내는, 시커먼 돌 사이에 돗자리를 깔고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면 '누나'를 외쳤습니다. 그 돌바닥에도 내가 싫어하는 시커면 개멸구들이 마구 지나가고있었음은 물론이고요.
나는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통해서 내가 하기 어렵지만 너무나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달까요? 나 혼자라면 하지 않았을, 하지만 그 집 아이 넷과 우리집 두마리가 어우러진 복잡하고 시끄러운 즐거운 여정이었습니다.
우리는 여름 제주 여행도 함께 했습니다. 언니네는 매년 일주일 정도 배를 타고 제주도에 간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제주에 머무르는 일정에 맞추어 짧은 2박3일을 함께 했습니다. 아이들은 하루종일 (말 그대로 하루 종일) 바다에 있었습니다. 나는 목이 타고 커피가 간절해, 그 집 첫째에게 '빙수먹으러가지 않을래?' 라고 꾀었습니다. 아이는 좋다고 대답했지만, 프랑스인 아빠에게 돌아온 대답은"놉! 아직 4시밖에 되지않았어!"였습니다.
나는 별 수없이 바다에서 꼬박 하루를 보냈습니다. 해가 저물도록 우리는 그렇게 여름을 불태우고있었습니다.
책방을 함께하자고 이야기했을때, 그녀가 나를 설득한 또 하나의 치트키는, 책방 앞 공원이었습니다.
말했다시피 그녀는 자연을 몹시나 좋아했고, 우리가 책방을 지키는 사이 바로 앞 공원과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을거라는 멋진 계획이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에게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할 수 있는 근무 환경만큼 매력적인 것이 또 있을까요? 게다가 책과 공원이 있는 공간이라니요. 나는 어느새 스르르 설득당하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동업을 만류했습니다.
관계가 깨지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가을, 우리는 그렇게 '책방리브레리'의 동업자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