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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폐 Dec 12. 2023

죽을 뻔하다 살아난 은행나무 이야기

산골 일기


얼마 전 그가 이사를 온 집 앞에는 나이가 제법 많아 보이는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다.


은행나무는 요 몇 달이 마치 몇 년 아니 몇십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널뛰기하는 심정으로 마음 졸이는 나날들이었다.

은행나무는 오래전 짝 없이 이 집 마당에 심겼다. 왜, 무슨 마음으로 거기에 심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약으로 쓰려고 구한 은행 가운데 한 알이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려 용케 살아남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맨 처음 이 집을 짓고 살았던 이는 이 집을 떠난 지 벌써 십 년도 더 훌쩍 넘었다.

그 뒤 옆마을 어딘가에서 살던 노부부가 이사를 왔다.

은행나무 옆으로 장미 나무 자두나무 앵두나무 사과나무 엄나무들이 줄지어 심겼다. 부지런한 노부부는 그 앞에 줄콩과 강냉이를 심기도 했다.


여느 곳보다 짧은 가을을 맞는 산골이다 보니 노란 은행잎도 빨리 떨어졌다. 노란 은행잎이 나무를 스치는 바람에 맥없이 우수수 떨어질 때면 노부부는 부지런히 쓸어 담아 텃밭이나 꽃밭으로 던졌다. 그리고 한 번씩 중얼거렸다.

"에잇, 잘라 버려야지. 은행도 열지 않는 것이 낙엽쓰레기만 떨쿠니...,"


은행나무는 듣기 싫었지만 '늙고 힘들어서 잔소리하는가 보다'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부쩍 심해졌고 중장비를 다루는 옆집 남자에게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시간 날 때 이 나무 좀 잘라줘~"

할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따지고 보니 그때부터 부쩍 자주 그랬던 듯하다.




옆집 남자는 늘 바빴다. 남자의 중장비기계와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큰 차에 장비를 싣고 나가면 장비 없이 며칠 몇 달씩 사람만 들어오거나 같이 들어왔다가도 곧 나가면서 늘 집에 없었다.

이제나저제나 은행나무를 밑동까지 싹둑 잘라주기를 기다리던 할아버지는 올가을이 지내도록 잘라줄 기미가 없어 보이자 급기야는 면사무소에 민원을 넣었다.  


접수를 받은 면사무소 직원들이 장비를 들고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가슴 졸이던 날들이 지나 초겨울에 들어섰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 산골은 가을이 짧다. 저 아랫녘은 가을이라도 여기는 초겨울이다. 다른 곳보다 겨울이 빨리 오고 늦게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은행잎은 진즉 다 떨어졌고 할아버지는 부지런히 쓸어 담아 텃밭과 다른 나무 밑에다 버렸다. 기력이 쇠약해진 할아버지는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더 힘들게 하는 이 나무를 '언제나 자르러 올까' 기다리다 세상을 떠났다.

장비일 하는 옆집 남자는 할아버지 소원을 못 들어드린 것 같아 미안했다.


할아버지 사망신고가 끝나면 집을 사서 수리한 뒤, 팔기 전에 은행나무는 물론이고 그 옆으로 너저분하게 울타리 쳐진 나무들도 죄다 잘라버려야지 다짐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집이 팔렸다. 아직 복덕방에 내놓기 전인데 마음에 든다고 계약 하자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은행나무로써는 천만다행, 이제는 잘려 죽을 일이 없어졌다.

새로 이사 들어오는 이는 물론이고 그와 함께 왔던 이, 그리고 그를 찾아오는 이들 모두 집 앞에 은행나무가 있어 너무 좋다고들 하니까 말이다.


옆집 남자가 새로 이사 온 그에게 말했다.

"이 나무 잘라 달라면 잘라 줄게요."

"아니, 왜요? 절대 자르지 마세요."


옆집 남자가 말했다.

"이 은행나무가 살라는 팔잔가 봐요. 내가 바쁘지만 않았으면 벌써 싹둑 잘렸을 거요. 내가 못 해주니까 노친네가 면사무소에 말했는가 본데 나오기 전에 가셨으니..., 만약 누가 이사 오지 않으면 겨울에 일 없을 때 싹둑 자르고 저 옆도 싹 밀어버리려고 했거든요."




은행나무는 이제 안심이다. 새로 들어온 이는 절대 자르지 않겠다 한 건 물론이고 잎 하나 없는 앙상한 나무를 창문으로 내다보며 흐뭇해하고 있으니 말이다.


씽씽 부는 바람이 푸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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