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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Jul 28. 2022

꿈을 좇는 유럽에 칼끝을 겨눈 러시아

장밋빛 이상과 핏빛 현실 사이의 잔인한 괴리를 알려준 천연가스

  매년 여름이 될 때마다 몇십 년 만의 최고기온, 혹은 기록적인 폭우, 폭염과 같은 뉴스 헤드라인을 접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시대다. 구체적인 숫자들을 보고 우리와 같은 일반인도 위협을 느끼고 있는데, 그 문제를 다루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환경 및 기후 전문가들이 체감하는 위험 수위는 아마도 훨씬 높을 것이다. 과거로부터 데이터를 접해온 사람이라면 미래로 뻗어나가는 데이터의 흐름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새 시대의 화두로 자리 잡은 탄소중립은 선택이 아닌 필수로 여겨지고 있다. 제조업에 적용되는 환경 관련 규제의 강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고, 각국 정부의 적극적인 홍보 속에 탄소 감축에 대한 시민들의 의식 수준도 많이 올라온 상황이다. 이미 산업이 성숙한 유럽 선진국들은 일찌감치 다음 세대의 테마에 친환경을 포함시켜, 탄소 배출의 원흉인 화석연료의 사용을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다.


  깨끗한 환경과 영속적인 발전의 교점은 분명 모두가 바라는 목표다. 친환경을 위해 먼저 에너지원 전환을 시도한 국가들이 큰돈을 투자해 신재생에너지의 발전 단가를 지속적으로 낮추고 있었고, 그러한 기세대로라면 가까운 미래에 종착역에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2022년 겨울 동유럽에서 총성과 포성이 들리기 시작한 뒤, 6개월 만에 친환경 선도국인 독일도 화력발전과 원전 복구 버튼에 손을 올리려 하고 있다.


  꿈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진정한 꿈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며, 궁극적인 성공을 이루기 위해 때로는 패배와 고통이 따른다. 하지만 유럽, 그리고 세계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광경은 우리가 목표한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생각보다도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러시아의 칼날은 물리적으로는 이웃 우크라이나에만 향했지만, 결국 피를 흘리는 것은 세계 모든 사람들이다.


 


탄소중립 사회를 위해서는 역시 재생에너지와 수소가 중요함을 강조하며, 2020년 7월 에너지 시스템 통합전략과 수소전략을 각각 발표했다. 또 2020년 12월 열린 EU 정상회의에서는 2030년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1990년 대비 55%로, 재생에너지 보급목표를 33.7%로 상향하기로 했다.
(백문석 外 6명 著 『2050 수소에너지(e북)』, RAONBOOK, 챕터 '해외 주요국의 탄소중립 정책' 중에서)


  각국 정부가 경제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목표는 경제성장이다. 경제성장은 경제 규모의 확대를 의미하며, 갈수록 커지는 소비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생산을 해내야 한다. 그리고 경제의 덩치가 커질수록 더 많은 양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는 기존의 에너지를 더 많이 사용하거나 더 효율적인 에너지원을 개발해야 한다는 말과도 같다. 에너지 비용이 커지면 경제에 가해지는 부담이 커져 장기 경제성장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각국 수장들이 에너지원 교체라는 중대한 도전을 감행한 것은 그만큼 기후 변화가 불러올 변화가 파괴적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화석연료 사용을 계속 늘려 미래에 감당할 수 없는 환경 비용을 부담하는 것보다, 지금 거금을 들이더라도 새로운 청정 에너지원을 도입하여 향후 떠안게 될 비용을 줄여나가자는 판단이 선 것이다. 미래를 위해 지금 더 많은 짐을 짊어지자는 일종의 메시지였다.


  탄소 감축이 비교적 쉬운 산업 구조를 가진 유럽에서 탄소중립을 선도하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공해가 매우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중국과 인도도 탄소중립 목표연도를 제시하며 흐름에 동참했다.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며 탄소중립이 가장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 중국이 2060 탄소중립을 선언하자, 우리나라를 포함한 다른 국가들도 '넷 제로'라는 미션에 동참했다.


  2020년을 전후로 자동차 산업을 뒤흔든 전기차 붐은, 세계의 도로를 가득 메운 내연기관차를 전기차로 바꾸는 것으로 탄소 배출량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발상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정부 차원의 규제 이외에도 시장 원리로 탄소 배출량을 감축하기 위해, 탄소 배출권 거래제라는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고안되었다. 그동안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않던 부정적 외부비용을 실질적 비용으로 부과되도록 만든 것이다.



미국의 석탄 산업이 쇠락한 근본적인 이유도 셰일 붐 때문이다. … 미국에서 천연가스는 석탄보다 20% 싸다. 게다가 천연가스는 석탄보다 오염물질을 훨씬 덜 만들어낸다. 2016년에 이미 발전믹스에서 천연가스가 석탄을 추월했다. 경제성과 미래가치에서 석탄이 천연가스를 이길 수 없다.
(이종현 著 『에너지 빅뱅(e북)』, 프리이코노미북스, 챕터 '미국이 바꾸는 세계 에너지 지도' 중에서)

 

  전 세계가 호기롭게 탄소중립 목표를 내세우며 각자의 방식으로 탄소 배출량 감축에 나섰다. 하지만 에너지 대전환을 이룰 만큼의 여건을 갖지 못한 상황에서 각국은 교착 상태에 직면했다. 화석연료를 다루는 영역에 새롭게 규제가 부과되며 기업의 생산단가에 상승 압박이 가해졌고, 화력발전의 비중을 급격하게 줄이기에는 그것을 대체할 신재생 에너지의 발전량 증가 속도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연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신재생 발전은 환경 여건에 크게 좌우되므로 에너지 포집에 유리한 곳에서만 유효하다는 약점이 있다. 또한, 안정적인 생산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데다 넓은 부지를 활용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근본적으로 에너지 밀도를 극대화하기 어렵다. 수소를 이용한 방식도 기술적인 한계로 인해 에너지 효율 문제를 극복하기까지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부딪힌 나라들을 위해서 대전환 시기를 맞이하기 전까지 징검다리 역할을 해줄 수 있으면서도 환경적 부담이 적은 에너지원이 필요했다. 당장 모든 것을 바꾸는 것은 무리였으며,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을 해야 했다. 구미 국가들이 임시 파트너로 선택한 것은 천연가스였다. 이미 파이프라인이 깔려 있어 추가 비용을 감당할 필요가 없었으며, 석유와 석탄에 비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낮은 연료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2010년대에 발생한 '셰일 혁명'으로 자국의 천연가스 소비량을 충족시키고도 남을 만큼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추었기에 다른 선택을 할 이유가 없었다. 셰일 붐 이후 세계적으로 저유가 현상이 지속되어 유럽 측에서도 천연가스를 거부할 까닭은 없었다. 일단 화력발전을 어느 정도 활용해야 하는 상황에서 석탄보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적으면서도 저렴해진 천연가스만큼 매력적인 대체 자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으로 보내는 미국산 LNG는 mmbtu당 6.3달러로 러시아가 독일에 공급하는 파이프라인 가스 가격 4.9달러보다 상당히 높다. 러시아는 낮은 가격을 활용해 유럽에서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공급가격을 인하하는 한편 유연한 경매 시스템도 도입하고 있다. '을'인 구매자를 장기계약으로 단단히 묶어 놓던 과거 관행과는 확연히 다른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위의 책, 챕터 '여전한 에너지 강국 러시아의 도전과 응전' 중에서)


  유럽의 상황을 주시하던 러시아는 자신의 입지를 크게 키우며 국제 판도를 뒤집을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저유가 시대가 도래하면서 미국이 남는 천연가스를 LNG 형태로 유럽에 수출하여 서방 국가들 간에 에너지 밀월이 이뤄질 가능성이 커졌다. 이때 러시아는 이전에 비해 천연가스 공급에 저자세로 나서며 최대 고객의 환심을 샀다. 계약 구조를 유럽 본토 국가들에 유리한 방향으로 바꿔준 것이다.


  LNG는 액화 과정과 물류 수송 비용으로 인해 파이프라인으로 보내는 가스에 비해 가격에서 매력이 떨어진다. 이 점을 강조한 러시아는 유럽에서 입김이 가장 센 독일에 접근했다. 에너지 사용량이 유럽에서 가장 많은 데다 정권이 신재생 에너지 전환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일은 러시아 측의 제안을 받아들여 발트해를 통과하는 노르트스트림-2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표면적으로는 시장 논리에 맞추어, 자원 부국 러시아가 시대 전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하는 유럽이 감당할 비용 부담을 줄여주는 판도였다. 그러나 자국에 대한 유럽 본토의 의존도가 높다는 것을 확인한 러시아는 물밑 작업도 조용히 진행하고 있었다. 과거로부터 여러 차례 마찰을 빚어 러시아에 반감을 가진 우크라이나와 폴란드를 거치지 않는 가스관인 노르트스트림-2와 사우스스트림을 계획한 것은 중요한 복선이었다.



이란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알-아사드 정권은 이제 반격을 시작했다. 푸틴의 중재가 있었지만 여전히 처리되지 않고 남은 화학 무기들이 있다는 사실도 분명해졌다. … 미국의 동맹군이었던 쿠르드족이 물러난 시리아 영토에 터키는 일종의 완충 지역인 '안전지대'를 구축했고, 푸틴은 이 지역을 "안전하게" 지키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러시아군을 보낸다.
(대니얼 예긴 著 『뉴 맵(NEW MAP)』, 리더스북, p.355)


  시리아 대통령 알 아사드는 2010년경 카타르에서 출발해 사우디아라비아와 시리아, 터키를 거쳐 유럽으로 이어지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공사 제안을 거절해 수니파 진영의 공분을 산 바 있다. 이 프로젝트가 실현되면 유럽 본토 국가들이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천연가스 공급처를 카타르로 옮길 수 있었다. 소련 시절부터 연이 있었던 시리아는 러시아의 편을 들어주며 가스관 신설 제안을 거부한 것이었다.


  러시아로서는 시리아의 정권이 유지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푸틴이 러시아군을 파견해 '아랍의 봄'으로 시아파 정권이 붕괴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아사드 정권의 유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시아파 성향의 아사드를 도와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으로 이어지는 시아파 라인을 완성하고, 자신이 그 우두머리로 우뚝 서 중동의 패자로 등극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던 이란 역시 푸틴에 동조해 정권 전복을 막았다.


  아랍의 봄 이후 찾아온 내전이 시리아만큼 길어진 곳이 리비아였다. 리비아는 아프리카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천연가스 매장량을 자랑하는 나라다. 하지만 내전으로 인해 원유와 천연가스를 생산할 시설이 오랫동안 제 구실을 하지 못하며, 리비아의 천연가스 수출이 기존의 절반에도 못 미치게 되었다. 유럽의 중요한 부수 공급처이자 긴급 가스 조달 통로 역할을 할 수 있는 리비아도 좀처럼 안정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로써 러시아는 유럽 압박 전략에 대한 잠재적 위협을 모두 해결한 셈이 되었다. 유럽 본토는 미국산, 카타르산 LNG에 비해 저렴한 러시아 가스에 기대고 있었고, 잠재적 경쟁자인 카타르산과 사우디아라비아산 천연가스의 파이프라인 조달은 시리아 정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무마했다.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대체할 만한 대규모 공급처가 마땅치 않은 것을 확인한 푸틴은, 본격적인 작전을 시작할 명분이 생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러시아는 크리미아 반도를 점령하기 위해 구태의연한 선전선동전술인 "소수민족 보호"를 이미 써먹었다. …러시아는 상당히 러시아 화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 크리미아 반도에서 자기가 써먹은 전략을 반복하는 수순을 밟는다. 그 다음에는 진짜 한판 붙게 된다. 친 유럽 성향인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과 한판 붙고, …(이하 생략)
(피터 자이한 著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 김앤김북스, p.271)


  크렘린 궁 속 사람들이 팬데믹으로 세상이 한바탕 소란을 겪을 것까지 예측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원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러시아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창궐 직후 발생한 유가 급락으로 큰 데미지를 받았으나, 세계 정상들이 합심한 적극적인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으로 유가가 급격하게 반등하며 숨을 고를 시간을 벌었다.


  오히려 팬데믹은 러시아에 찬스를 주었다. 팬데믹으로 세상 곳곳을 이어주던 유무형의 네트워크의 힘이 약해지며 각국의 연대에 그림자가 드리웠기 때문이다. 유럽 본토 국가들은 하나 같이 러시아의 존재감을 실감했지만, 이런 상황에 대해 각국이 내놓은 처방은 서로 그 결이 달랐다. 각국의 정치·경제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러시아를 대하는 온도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푸틴이 원하는 판이 드디어 완벽에 가깝게 설계되었다.


  그는 NATO와 우크라이나가 밀착하여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하는 작금의 상황을 좌시할 수 없으며, 우크라이나 동부에 거주하는 자국민들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을 세워 전쟁을 개시했다. 국가총동원령이 발효되고, 순식간에 대규모의 지상군이 국경을 넘어 우크라이나로 진격했다. 유럽에서 전면전이 일어나진 않을 것이라는 일각의 예상을 완전히 깨버린 것이었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가 얼마 못 버티고 함락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은 빗나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망명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끝까지 수도를 지키며 항전하는 군대와 전쟁에 휘말린 국민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푸틴이 유리하게 깔아 둔 판에서 우크라이나는 결국 잃는 것이 더 많은 싸움을 하게 되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한다면 과연 미국은
러시아와의 군사적 마찰을 감수할 것인가?
(이코노미스트  『2022 세계대전망(e북)』 중에서)

 

 전장이 된 우크라이나는 이미 반년 동안 진행된 전쟁으로 올해 경제성장률은 -30% 혹은 그 이상의 감소폭이 될 것이 유력하다. 엄청난 규모의 인적·물적 피해만큼이나 치명적인 것은, 비정한 국제 정세의 흐름 속에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뭉쳐 서방이 우크라이나와 함께 러시아를 금방 격퇴할 것이라는 기대가 깨졌다는 점이다.


  천연가스를 정교하게 무기화한 러시아 앞에서 유럽 본토의 국가들은 가스 공급 차단 위협에 전전긍긍하면서 당장 올 겨울을 어떻게 보낼지 골몰하는 처지에 놓였다. 치솟는 생활 물가는 시민들의 주머니를 압박했고, 시민들의 목소리가 다시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각국 정부는 눈앞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기존 목표와 상충하는 옵션인 석탄 화력 발전에 손을 대기에 이르렀다. 생존 앞에 다른 문제가 후순위로 밀려난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세계 원자재와 곡물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그런 만큼 우크라이나 사태와 이어진 대 러시아 경제제재는 에너지와 식량, 국제금융시장 전반에 커다란 충격을 준다. … 글로벌 금융위기와 팬데믹 위기를 겪으면서 기존의 국제질서와 거버넌스에 심각한 균열이 일어나면서 국제 교역망, 에너지 안보, 국제금융시장 모두 이전보다 훨씬 불안정해졌다.
(김용범 著 『격변과 균형(e북)』, 창비, 챕터 '현실이 된 주요국 간 전쟁 위험' 중에서)

  

  러시아는 석유와 천연가스뿐 아니라 밀의 핵심 수출국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의 전반적인 산업 생산이 멈춰버린 상황에서 러시아가 이전보다 더 큰 장악력을 갖게 되었다. 우크라이나가 백기 투항을 선언하는 것만큼 우려스러운 것은, 전쟁이 겨울까지 길어져 세계 식량 공급 문제가 더욱 심화하고 가스밸브가 잠겨 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것이다. 둘 중 하나만 현실이 되어도 러시아는 이 싸움의 승자로 기록될 것이다.


  미국과 유럽이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후유증인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고, 서민층에 경제적으로 가장 부담을 주는 것은 유류비와 식비의 상승이다. 푸틴은 식량과 천연가스를 틀어쥐고 있는 러시아가 마음을 먹는다면, 서방의 물가에 불이 붙고 단합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라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러시아가 전쟁을 지연시킬수록 유럽 본토 국가들은 코너에 몰린 채로 협상을 해야 할 것이다.


  전쟁을 벌이면 자국의 물가상승률도 크게 오를 것이며, 러시아가 각종 제재를 당할 것은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푸틴은 공격을 결행했다. 승리한다면 지정학적 이점과 정치·경제적 영향력의 향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며, 결국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 자국이 치러야 할 대가를 상쇄할 수 있다고 보았기에 나온 결정이었을 것이다. 자국 이기주의가 힘과 야망 결합한 결과는 이번에도 참극을 피해 가지 못했다.


  잔혹한 전쟁이 전개되는 시나리오는 다양하다. 그러나 유동성 과다와 공급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다가 전쟁의 파급 효과까지 감당해야 하는 3중고에 놓인 세계인들에게 호의적인 시나리오는 역사의 선택을 받기 어려워 보인다. 세계 경제가 해야 할 일을 미뤄온 잘못, 그리고 각국 정치가 이기주의와 근시안적 목표를 선택한 것에 대한 대가를 우리의 지갑과 통장으로 치르게 되는 비극이 가까운 미래로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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