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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Jul 31. 2022

연방준비은행의 미션 임파서블

어떤 길을 가든 피는 흘려야 한다

  경제 문외한이라도 누구나 '공짜 점심은 없다'라는 격언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선택을 통해 얻는 것이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어떤 형태로든 치러진다. 얻는 것이 작은 일상의 사소한 선택에서는 그다지 큰 고민거리가 되지 않지만, 인생을 거는 승부처럼 스케일이 커질수록 사람은 그에 따라 거대해지는 리스크를 본능적으로 두려워한다.


  선택에 따른 과실은 달콤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단맛에 빠져 리스크를 과소평가하거나, 대가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는 과오를 저지르기도 한다. 누리고 싶은 것만 누리고 대가를 치르는 시점을 계속 유예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지불 시일을 계속 미루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억지로 만기일을 미루는 행위는 언젠가 비용에 막대한 이자가 붙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객관적인 시선에서만 본다면 세상살이에 실책이란 것이 없어야 하겠지만, 우리는 어딜 가든 그 반대의 모습이 태연하게 펼쳐지고 있는 세상을 보고 산다. 막대한 정보와 권한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저지른 착오가 누적되어 모든 사람들의 삶이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선택의 결과로 누군가는 자신이 가진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희생해야 할 것인가?




미국은 2009년 이후 7~8년간 양적완화로 2조 5천억 달러를 풀었다. 그런데 팬데믹 선언이 이뤄진 2020년 3월 이후 8주 만에 이 8년 동안 푼 만큼의 양적완화가 이뤄졌다.
… 임금 상승은 인플레이션 압력을 더욱 가중시킨다. … 최근 미국의 상황은 높은 인플레이션에 따른 임금 상승 압력 외에도 고용시장 자체 요인으로 인한 임금 인상 요인이 겹쳐 있는 상황이다.
(김용범 著 『격변과 균형(e북)』, 창비, 챕터 '인플레이션의 등장' 중에서)


  돈을 뿌려 억지로 일으킨 경제가 부작용을 호소했다. 빠르게 반등하기 시작한 금융시장으로 유동성이 몰리면서 자산시장 과열이 일어난 반면, 팬데믹으로 인한 생산 차질을 극복하지 못한 실물경제는 공급 병목 현상이 해결되기도 전에 소비가 부양되어 엇박자가 났다. 밖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서비스보다 소비재, 내구재에 더 많은 돈을 쓰기 시작했지만, 그들의 주문량을 공장이 따라가지 못했다.


  팬데믹이 노동 시장에 가한 충격도 불타는 물가에 기름을 부었다. 미국에서는 팬데믹 쇼크 직후 급격한 고용 축소로 실업수당 청구 건수가 이전에 비해 10배 이상 늘어났다. 바이든 정권은 실업자들의 살림살이를 우려해 후한 실업수당을 지급했지만, 의도와는 달리 이들 중 상당수가 수당을 받고 노동시장에 돌아가지 않았다. 결국 급격한 수요 반등이 일어났음에도 업계에서 구인난이 생겨 시장 임금이 상승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팬데믹과 세계 각국의 알력으로 인한 공급망의 차질 문제, 그리고 통화량의 과도한 팽창으로 인해 강력한 물가 상승 압박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임금 상승 압력이 가해진 결과는 가히 치명적이었다. 2021년 5월 미국에서는 무려 13년 만에 물가상승률 5%가 기록된 데 이어, 하반기에는 그 수치가 7%에 이르렀다. 자산시장 물가와 밥상 물가가 동시에 폭등하는 아수라장이 펼쳐진 것이다.



연준은 최근 몇 달 동안의 가격 압박이 일시적이며 세계의 경직된 공급망을 반영한 것이라는 아이디어에 힘을 싣고 있다. 많은 분석가가 이에 동의하며 글로벌 경제가 계속 개방되면서 2022년에는 인플레이션율이 3%로 둔화할 것으로 기대한다.
(이코노미스트 『2022 세계대전망(e북)』, 한국경제신문, 챕터 '반등, 그 이후에 일어날 일' 중에서)


  모든 요인이 물가 상승을 압박하고 있는 난국에 직면하여, 연방준비은행(이하 연준)은 일단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시장에 사인을 보냈다. 심각한 수준으로 부풀어 오른 기대 인플레이션을 잠재우기 위해서 파월 연준 이장은 '시장의 물가 상승이 일시적'이라는 평을 몇 번이고 내놓았으며, 유동성의 부피를 줄이는 테이퍼링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불길은 그 정도의 대책으로 진압될 리가 없었다. 각국의 방역 대책 수준과 외교적인 대립에 의한 공급망 훼손은 누가 어떻게 손을 댄다고 해서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는 범위에 있지 않았다. 또한, 실업수당으로 인해 왜곡이 발생한 노동시장과 정부의 대대적인 부양책으로 인한 전반적인 물가 상승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의 정책 기조를 완전히 뒤집어야 했다. 연준에 주어진 옵션은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금리를 조절하고 시중 유동성을 거둬들이는 출구전략을 더 미룰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그동안 쌓여온 무제한적 통화 완화의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니 연준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무려 10년짜리 청구서를 손에 들게 된 제롬 파월 연준 의장에게 거대한 딜레마가 주어졌다. 물가를 잡기 위해 경제주체들이 지고 있는 채무 리스크를 감당할 것인가, 아니면 물가 상승을 용인하더라도 경기 충격을 피할 것인가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2022년 초에 연임 여부가 걸려 있던 파월은 경기 침체를 유발할 우려가 큰 전자를 선택하길 주저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도 재정정책의 경기 부양 효과를 무디게 할 수 있는 긴축적인 통화정책에 섣불리 동의하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리더들은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물가 안정과 경기 순항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었다. 미국 정부와 연준은 시장 상황을 좀 더 두고 보기로 하며 긴축의 칼을 잠시 내려놓았다.



일반적으로 부채 사이클 정점 초기에는 단기 금리의 상승으로 장단기 금리 차(장단기 금리 차는 장기간 자금을 빌려준 대가로 받는 추가 금리를 의미)가 좁혀지거나 거의 없어져 대출을 내주려는 유인이 크게 줄어들게 되면서 현금을 보유하려는 유인이 상대적으로 커진다. … 중앙은행이 계속해서 금리를 인상하고 신용을 축소하는 동안, 경기 침체의 씨앗은 곳곳에 흩뿌려진다.
(레이 달리오 著 『레이 달리오의 금융 위기 템플릿(e북)』, 한빛비즈, 챕터 '전형적인 대형 부채 사이클' 중에서)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2022년이 되어서 오히려 더욱 불타올랐다.  2022년 상반기 미국의 CPI는 모두 7%를 웃돌았고, 심지어 6월에는 9%를 초과하면서 시장에 쇼크를 불러일으켰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이후 원자재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생산자의 이윤이 훼손되고 소비자가 감당해야 할 비용은 커져만 갔다. 연준이 결단을 내릴 타이밍을 놓쳐, 더 불리한 타이밍에 긴축을 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닥치고 말았다.


  금융시장의 거래자들은 이러한 변수들의 동향을 재빨리 알아채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융시장이 주도하는 비정상적인 경기 팽창이 한계점에 다다랐으며, 경제 곳곳에 퍼진 부채 문제가 예사롭지 않다는 인식을 가진 이들이 이전보다 채권에 높은 금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이들이 시장에서 빠져나가며 미국 증시도 고점을 찍고 서서히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시중의 장단기 금리가 역전되었다는 것은 단기 자금 조달이 이전보다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뜻한다. 레버리지를 통한 자산 매입의 부담이 커지게 되므로 이는 자산 수요와 자산 가격에 하방 압력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자산 시장의 위축은 실물 경제의 위축을 연쇄적으로 유발하기 쉽다. 즉, 장단기 금리 차가 마이너스로 돌아서면 얼마 가지 않아 경기 침체가 발생할 우려가 크다.


  세계 강국들 사이에 존재하는 알력과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다툼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러시아는 유럽을 천연가스로 협박하고 있다. 녹색 전환이라는 시대적 과제는 그 과도기에서 강력한 비용 인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고, 각국 정부는 임금이 인플레이션을 자극하는 난관에 직면했다. 그러나 연준은 출구전략을 미룰 수 없다는 것을 자인하고, 불황이 올 것임을 직감하면서도 금리를 올려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주당 순이익 EPS과 배당이 약 2배 증가하는 동안, 다우지수는 5배 이상 상승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이 기간에 나온 높은 수익률은 기업의 내재가치 상승이 아니라, 주로 투자자와 투기꾼의 태도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기간의 주가 상승은 '자가발전형 상승'이라 부를 수 있다.
(벤저민 그레이엄 著 『현명한 투자자(e북)』, 국일증권경제연구소, 챕터 '투자와 투기' 중에서)


  『현명한 투자자』는 무려 50년 전에 쓰인 책이지만, 위 글귀는 마치 최근까지 우리가 지켜본 광경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역사 속에서 매번 반복된 시장 심리는 늘 그렇듯이 똑같이 반복되었고, 중앙은행들이 10년 동안 살포한 유동성은 거품의 크기를 불려놓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큰 거품을 제어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연준은 경기 연착륙과 물가 안정을 다 잡는다는 불가해한 목표 앞에 괴로워하게 되었다.


  최근 파월이 2개월 연속 0.75%p의 금리 인상을 선언했다. 41년 만에 닥친 9%의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기 위해 뒤늦게 본격적인 싸움에 착수한 것이다. 2분기 미국의 경제성장률이 -0.9%로 발표되어 경기가 둔화를 넘어 침체에 들어갔음이 분명해졌음에도, 연준이 다음 FOMC에서 금리 인상을 다시 발표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그들이 이미 행동으로는 연착륙이란 목표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물가 안정에 전력투구한다고 해도 물가가 잡힐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다수의 물가 압박 요인이 있는 상황에서 물가상승률을 '바람직한' 수준으로 하향시키기 위해서는 강력한 수요 억제와 긴축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극심한 경기 침체로 이어질 것이 뻔하다. 반대로 그 옵션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세계인은 유동성 중독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물가가 자신의 구매력을 침식하는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경제는 지정학과 정치적 이해관계, 불안정한 군중 심리에 둘러싸여 사면초가의 지경에 놓였다. 유동성 과잉, 탈세계화 기조와 포퓰리즘 색채의 정치가 불러온 고비용 사회는, 연준이 무슨 길을 걸어도 모두가 피를 흘려야 하는 파국으로 우리를 내몰았다. 금융경제, 자산시장, 실물경제의 연쇄 침체 시나리오가 코앞에 다가온 지금, 경제의 일기예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두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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