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살에 그는 정확히 정리해고를 당했다. 유력 언론사의 유망한 경제부 기자였던 그는 후임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IMF가 터졌고, 둘 중 한 명이 회사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제 네 살 밖에 되지 않은 늦둥이 아들이 있는 그가 해고 통보를 받았고 막막하고도 한없이 차가운 공기를 향해 문을 덜컥 열어야만 했다. 그렇게 그의 인생에 가장 쓰디쓴 순간이 바로 눈앞에 놓여있었다.
그 길로 그는 출판 영업에 나섰다. 기업의 영업 선물로 쓸 수 있는 여행 잡지를 세일즈 했고 성과도 좋았다. 매체 광고 영업에도 거침없었다. 차디찬 공기의 세상에 마주했던 그때 당시 몇 천만 원이 다였던 그의 통장엔 조금씩 종잣돈이 모였고, 그 무렵 공부 잘하는 늦둥이 아들은 뜻밖에 제주 영어교육도시 입성을 원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의 아내가 원했다. 피아니스트인 그녀의 교육관은 누구보다 똑 부러졌고 제대로 아이의 미래를 열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그 가족은 전혀 연고가 없는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그 황량한 곳으로 떠났고 부산의 아파트를 처분해 그곳의 첫 번째 아파트를 매입했다. 그렇게 그의 첫 번째 제주 부동산 투자가 시작되었다. 국제학교에서 두각을 드러낸 아들은 음악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 사이는 그는 부산과 제주를 오가며 부지런히 사업을 이어갔고 주식 투자에도 진심을 다했다.
제주영어교육도시 풍경
아파트에 살면서 부부는 늘 아쉬운 마음이 컸다. 제주에서 살면서까지 이런 사각 틀의 집에 살아야 하나 고심이 깊었다. 그러던 중 당시엔 설립도 되지 않았던 지금의 영국계 학교 바로 맞은편 주택 부지를 매수했다. 단독 주택을 지을 넉넉한 평수의 부지에 언젠가는 집을 지으리라 꿈을 가졌다. 황량했던 영어교육도시의 초반은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투자가 가능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비용으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고, 또 그 사이 그곳과 인접한 상가 부지를 저렴하게 매입하게 되었다.
아들은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늘 상위권을 유지했다. 단독 주택 부지에 꿈에 그리던 주택을 짓게 되었고 부부는 진심을 다해 ‘팔 집’이 아니라 ‘살 집’을 만들었다. 정원엔 꽃과 나무가, 집 안은 아늑함이 가득한 모던한 공간으로. 아파트를 처분하고 단독 주택 건축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드디어 입주하던 날, 부부는 감격해 울었다. 그해 우리 가족도 제주 주택 처분과 여행 차 제주를 가게 되었고 그 집을 방문했다. 이분, 제주 안 왔으면 어쩔 뻔했을지, 아들에게, 아내에게 평생 고마워해야겠다 싶었다.
단독주택 시공 과정 모습
그의 단독주택 정원의 실제 풍경
그리고 그를 해고해준 회사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여전히 기자 생활을 하며 아등바등 혼미한 하루하루를 보낸다면 지금과 같은 제주 살이를 꿈이나 꿀 수 있었을까. 매일 때꺼리를 찾느라, 마감 시간에 허덕이느라, 정신없이 취재 현장을 쫓아다니느라 그의 인생은 매 순간 방전되는 나날이지 않았을까. 이 부부의 둘도 없는 은인은 어느 날 갑자기 해고를 해준 회사, 그리고 보물 같은 아들인 거다.
그의 아들은 어느새 영국의 명문대학교에 입학했고 코로나 시국에 입대해 얼마 전 전역했다. 곧 다시 영국으로 가 학업을 이어갈 예정이다. 이제 이 부부는 다시 더 행복한 꿈을 꾼다. 상가 부지에 지어 올릴 새로운 신축의 꿈을 말이다. 진정한 갓물주로 영어교육도시 상가의 랜드마크로 말이다.
그의 아들이 졸업한 고등학교와 현재 재학 중인 영국의 명문대학교
오늘 그에게서 반가운, 아니 탈탈 멘탈이 털리는 연락이 왔다. 5년 전 내가 처분했던 제주영어교육도시 1차 분양 택지에 처음으로 듀플렉스 하우스(땅콩집)를 지어 연세를 받다 처분했던 주택의 현재 연세 시세를 굳이 알려주는 연락이었다. 한 집 당 연세 1800만 원이었던 그곳이 이제는 가뿐히 3천만 원이 되었다는 것. 아직 가지고 있었더라면 두 집으로 연세 6천만 원이 가능하다는 얘기. 주변 아파트들의 연세는 4천만 원에 육박한다는 것. 그리고 그의 단독주택의 경우 연세 6천만 원이 가능하다는 것. 다시 돌아보지 말자 했지만 오늘 다시 대정읍의 토지를 서둘러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제는 넘사벽이 되어버린 그곳을 말이다.
해고해 주어서 고마운 삶을 살고 있는 그를 보며, 한편으로는 그 당시 얼마나 착잡한 아픔이었을지를 떠올린다. 그래서 우리는 직장 생활을 하며 더 치열하게 준비해야 한다. 주말의 달콤한 늦잠도 좋지만, 맛집 투어도, 신상 카페 방문도 빼먹어선 안 되지만 가끔은 가까운 미래의 내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었으면 한다. 자연스럽게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당장 떠오르게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