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 반]프로젝트9
By 이작
정민은 점심 때가 되어서야 겨우 일어났다. 어제 저녁 밥상에 반주를 조금 한다는 것이 과했다. 아니 어제만이 아니라 그제도, 한달 전에도 계속된 일상이다. 오늘이 며칠이더라. 물 한 컵을 거칠게 마시고 마루에 걸터 앉았다. 다섯살 난 아들은 반바지에 런닝셔츠 바람으로 마당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다.
“아침, 아니구나. 벌써 점심이네. 건이 배 안 고파?”
아빠를 보고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젓고는 머리를 무릎 사이에 파묻는다. 그늘도 없는 뙤약볕에서 맨날 보는 개미 구경이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아니 또래도 장난감도 없는 이 시골 구석에서 놀거리라는 게 개미 밖에 없는 건지도.
지난 겨울에 내려왔으니 벌써 반년인가. 어린 것이 눈치만 빤해서 엄마를 찾지 않는 것이 기특하고 안쓰러울 뿐이었다. 여름이라 땀도 많이 흘리는데, 런닝셔츠가 꼬질꼬질 한 것이 갈아 입힌 게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안경을 옆에 벗어 놓고, 손으로 얼굴을 몇번 쓸었다. 아야. 마른 세수를 하다가 어느 새 길어진 손톱에 코를 살짝 긁었다. 손톱깎이가 어디 있더라. 안경을 주워쓰며 손톱깎기를 찾는다. '다 쓰면 제자리!'라는 아내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 피식 웃는다. 라면 냄비 받침으로 써 국물자국이 밴 신문지를 펼치고 손톱깎이 손잡이를 꺾어 연다.
“건이 손톱 자를까?”
건이는 대답 대신 한 손으로 런닝셔츠를 가슴까지 올리더니 다른 손 손톱을 세워 배꼽을 깔짝 긁어본다.
“괜찮아. 아직 안 따가워.”
배꼽이 따가워야 자를 때가 되는 건가. 건이의 손톱 길이 검진법에 정민은 피식 웃고 말았다.
“아빠, 맹이 보고 올게요.”
맹이는 아랫집 할머니네 강아지다. 멍멍 안하고 맹맹 짖는다고 아들이 붙인 이름이다.
“밥 먹게 빨리 와!”
네 하는 대답은 벌써 대문 밖에서 들린다. 대답은 냉큼 해놓고도 맹이 할머니 네서 먹고 올게 뻔했다. 젊은 사람들이 없으니 아이들도 없는 동네. 오랜만에 동네에서 들리는 아이 소리에 마을 어르신들은 건이를 예뻐해줬고, 특히 맹이 할머니는 친구 없는 건이가 강아지랑 논다고 하루 종일 붙어있어도 싫은 내색 한 번 안하셨다.
손톱을 깎다 말고 다시 안경을 벗어 놓는다. 그제야 초점이 맞는다. 발톱도 길어졌다. 어느 덧 배가 나온 뒤로 발톱 깎기도 쉽지가 않다. 흐읍하고 큰 숨을 몰아 쉬고 배를 넣은 다음에야 몸을 접어야 발가락에 손톱깎이를 가져다 댈 수 있었고, 두어 개의 발톱을 깎는 동안 숨을 참아야 했다. 자조 섞인 얕은 코웃음이 나왔다. 아이고, 정민아, 다 됐구나. 다 됐어. 뱃살이 어느 새 이렇게 두터워졌나.
아내가 죽어도 밥은 넘어갔고, 살은 쪘다. 시골에서 아무 하는 일이 없는데도 때가 되면 배는 고팠다. 건이를 굶길 수는 없었으므로 밥을 차렸다. 채 가시지 않은 슬픔에, 낯선 집. 처음보는 반찬들. 먹지 않겠다는 건이를 먹이려고 먼저 숟가락을 떴다. 앞집 할머니가 놓고간 반찬은 맛있었고, 밥은 달았다. 밥 먹는 아빠를 가만히 쳐다보던 건이도 말없이 밥을 먹었다. 그렇게 아빠와 아들은 끼니 마다 두 공기씩은 비웠다.
장례식이 끝나고 돌아온 집. 아내 없는 빈 집을 견디기 힘들어 그길로 건이 손을 잡고 시골집으로 내려왔다. 처음에는 일주일 정도만 있다 갈까 싶었다. 그러다가 겨울만 나려던 것이 벌써 여름이 지나 가을이 코앞이었다. 혼자 남은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면서는 방치되었던 집이었다. 건이도 낳기 전이니, 폐가가 되었겠다 생각했지만 집은 의외로 정리가 되어있었다. 아마 앞집 할머니가 한번 씩 들여다 보았으리라.
가게는 매니저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매일 밤 당일 매출을 카톡으로 보고했고, 재료비나 큰 지출이 있을때는 정리해서 엑셀 파일을 보내왔다. 오늘 잠이 깬 것도 매니저의 카톡 소리 때문이었다. 아직 확인은 안했지만, 가게 오픈 전마다 보내오는, 이제 자기가 죽겠으니 제발 올라오라는 말일 것이다.
아야. 너무 바짝 깎은 발톱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아픈 김에 울어버리라 생각했지만, 울음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목에 무엇이 걸린 양 침 삼키기가 어려웠다. 바짝 깎여 드러난 피부에 핏기가 올라오자 손에 침을 묻혀 발톱에 발랐다. 슬펐다.
마루 위를 손으로 쓸면서 튕겨나간 손톱 발톱을 모았다. 발가락 사이의 때까지 사이사이 비벼대고, 발박수로 때를 털고, 손을 비벼 먼지를 털고, 손톱깎이를 바닥에 톡톡 찍어 남은 손톱을 떨어냈다. 펼쳐진 신문을 남북으로 반으로 툴툴 털면서 접고, 또 동서로 반으로 접어 손톱을 신문지 가운데 모았다. 문득 마루 안쪽에 있는 휴지통까지 가기가 귀찮아진 정민은 신문지를 마당 흙바닥에 휙 털었다.
그때 헛간 쪽에서 쥐새끼 한마리가 쑥 기어나왔다. 히익. 시골쥐라 크기도 하네. 정민은 쥐새끼에 눈을 고정한 채 한손으로 마루 밑을 더듬어 섬돌 위 신발 한 짝을 쥐었다. 그런데 이 쥐란 놈이 분명히 눈이 마주쳤는데도 슬금슬금 점점 가까이 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흙바닥의 손톱을 물더니, 뒷발을 딛고 서서 정민을 바라보았다. 쥐 눈이 저렇게 까맣고 큰 눈이었나. 쥐는 정민이 버린 손톱을 두 앞발로 잡고는 오독오독 먹기 시작했다.
정민의 입에서는 윽.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이 겁 없는 쥐새끼와 이 낯선 상황에 감히 신발을 던질 생각도 못하고 보고만 있었다.
쥐가 고개를 잠깐 숙이나 했더니, 고개를 천천히 들자, 덩치가 점점 커지더니, 점차 사람 모습으로 변했다.
“어 어어. 뭐야,이거?”
신음처럼 흘러나온 말이었지만 입 안에서만 맴돌았을 뿐 바깥으로 뱉어지지는 않았다. 정민 자신이 마당에 우뚝 서서 정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대문이 벌컥 열리고 정민의 고개도 확 돌아갔다. 건이였다.
“거, 건아 오지마! 오지마!”
대문을 붙잡고 그대로 놀란 듯 얼어붙어있던 건이가 울면서 뛰어 들어왔다.
“엄마, 엄마! 으아앙 엄마.”
어느 새 마당의 쥐, 아니 자기 모습으로 변한 쥐, 이제는 아내의 모습으로 변한 쥐가 건이를 안고, 건이는 그 품을 파고 들며, 엄마만 불러댔다. 건이를 떼어내려고 마당으로 내려섰지만 아내 얼굴을 한 쥐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오지말라는 듯, 괜찮다는 듯, 눈을 맞추고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그리웠던 아내의 미소였다. 목에 뜨거운 것이 올라오더니, 눈으로 흘렀다.
한참을 울다 지친 건이는 그대로 그것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아내 얼굴을 한 그것은 마루에 걸터 앉았고, 건이는 그것의 무릎을 베고 있다. 건이는 또 놓칠까 그것의 옷을 꽉 움켜쥔 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있던 정민도 슬며시 한쪽 마루에 앉았다. 아직도 신발을 들고 있었는지도 몰랐는지 슬그머니 내려놓은 정민은 괜시리 손만 비벼댔다.
“저…. 자, 자기는 아니지?”
그것이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그렇지. 진짜 아내가 여기 있을리가.
손톱 먹는 쥐가 착한 놈이었나, 나쁜 놈이었나. 그 전래동화 줄거리가 어떻게 되더라. 마음은 조금 진정되었는데 생각이 복잡해졌다. 왜 하필 내 앞에 나타나 아내 얼굴을 하고, 아들을 안고 있단 말인가. 영물인지 요물인지 모르겠지만, 잠든 건이 머리를 쓰다듬고 손 부채질을 해주는 모양이, 건이를 해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일단 건이가 깰 때까지는 우선 그냥 두자. 아이고 깨면 뭐라고 말해야 하나. 건이 깨면 점심은 차려줘야 하는데. 아, 차리는 김에 저것도 밥까지는 같이 먹여야 하나. 설마 손톱이 주식은 아니겠지. 정민은 건이 밥을 차려야겠다는 혼잣말을 굳이 들릴만큼 크게 뱉고는 부엌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