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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by 송나영

한강의 수상이 멋지다! 참으로 열심히 글을 써 온 그네 인생에 걸맞은 보상답다. 한강의 글은 힘들다. 온 정성을 다해 쓴 글 같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쉽지 않다. 많은 생각과 많은 고민의 흔적이 엿보인다. 그녀의 문장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생각이 담겨 있는 문장인지 술술 읽을 수가 없다.

한강의 '검은 사슴'을 읽고 나와는 결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공감할 수 없었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내 기억에 인상이 남지 않았다. 책을 다 읽었지만 무슨 내용이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에 남는 건 제목밖에 없다. 이청준 작가의 글도 나는 잘 이해할 수가 없다. 다양한 작품을 많이 썼지만 도무지 공감이 가지 않았다. '눈길'이라는 작품에서도 아들을 보내고 돌아오는 엄마의 마음도 잘 모르겠다. 굳이 왜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한강의 작품을 읽다 보면 오에 겐자브로의 글이 떠오른다. 문장이 무겁다. 문장이 길어서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이 주는 생각의 깊이가 너무 깊다. 이야기꾼이 아니다. 그들은 철학자들인 거 같다. 심오한 철학의 심연을 헤엄치다 보면 머리가 멍해지기 일쑤였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문장에 걸려서 마음에 잘 와닿지 않았다.

노벨문학상을 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수상작품들을 보면 대체로 무거운 글을 참 좋아하는 거 같다. 내가 읽었던 몇 안 되는 노벨문학상 작품들은 대부분 문장이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수를 놓은 듯한 작품들이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의 서사는 노벨문학상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닌 거 같다. 두 번이나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지만 카뮈가 수상을 했다. 알베르 카뮈의 작품에 나의 이십 대는 푹 빠져있었지만 진정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마음으로 충분히 느껴본 적은 없다. 카뮈의 작품을 거의 다 읽었지만 지금까지 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없다. 차라리 샤르트르의 글이 더 분명하게 뭔 말인지 느끼곤 했다. 카뮈의 글에, 그 당시 나는 그의 문장에 취했던 거 같다. 그냥 있어 보이는 문장이랄까? 책 읽기의 허영에 잔뜩 젖어 있을 때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르면서 생각에 골몰하게 만드는 책들을 좋아했다.

사춘기 시절에 헤르만 헤세에 홀딱 빠져서 읽었던 '데미안'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척 좋아했던 건 분명한데 무슨 이야기였는지 기억에 없다. 좋아했던 것만 기억날 뿐이다. 카뮈가 그랬고 헤세가 그랬고 오에 겐자브로가 그랬다. 그들의 책을 읽은 게 분명한데 어느 것 하나 인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이나 '그리스인 조르바'는 머릿속에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등장인물들의 인상이 선명하게 내 인상에 남아 있다. 이야기꾼들이 만들어 낸 인물들은 머릿속에서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숨을 쉰다. 그들의 이야기도 분명히 살아있다. 왜 노벨문학상은 이야기꾼들의 소설에 상을 주지 않을까? '그리스인 조르바'나 황석영의 작품이나 조정래의 글처럼 맛깔나게 잘 담근 이야기들은 왜 노벨문학상에서 밀릴까? 우리나라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진심으로 기쁘긴 하지만 의문이 들었다. 술술 읽히는, 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서사가 가진 힘이 센 작품들은 왜 생각에 깊이 빠진 글에 밀리는 걸까? 참으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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