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자
드립 주전자의 손잡이가 부러졌다. 익숙한 물건과 뜻하지 않게 이별할 시간이라는 사실이 서먹하다.
주전자는 전기포트가 없어진 후 나에게 따뜻한 물을 제공하기 위해 인덕션에서 수시로 뜨겁게 달궈졌다. 부엌 용품 중에서 어쩌면 내 손때가 제일 많이 묻은 존재다. 아침에 잠에서 깨면 주전자에 물을 담아 데워서 마시기 때문에 나의 아침을 여는 동반자다. 냉온정수기를 사용하면 편할 텐데 굳이 정수만 되는 정수기를 쓰면서 수시로 물을 데우고 있다는 말도 주변에서 듣지만 나는 주전자에 담긴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좋다. 느리게 걷고 느리게 호흡하는 게 편한 것처럼 물이 서서히 데워지기를 기다리는 일이 좋다.
주전자는 스테인리스의 광택을 세월의 손때로 치장했다. 날마다 인덕션 주변에만 있어서 기름도 튀어서인지 수세미로 닦아도 예전의 광택은 나지 않는다. 나이 들수록 내 머리카락이 검은색과 하얀색이 섞이듯이 주전자도 세월의 더깨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며칠 전 저녁 준비를 하다가 주전자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주전자에 남아 있던 물이 바닥에 쏟아지고 검은 손잡이가 댕강 부러졌다. 표고버섯이 팬에 눌어붙지 않도록 볶고 찌개에 두부를 넣어야 하는 순간에.
나무주걱으로 표고버섯을 뒤집고 찌개에 두부를 넣고 인덕션의 온도를 낮추고 베란다에 널려 있는 마른걸레를 가져다가 물기를 닦았다. 급하게 정리하고 나서 주전자의 손잡이를 붙잡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실수로 놓쳤는데 손잡이가 댕강 부러지다니 무슨 일인가 얼떨떨했다. 처음으로 주전자를 바닥에 떨어뜨린 것 같은데 내 팔 힘이 너무 셌나? 팔꿈치와 손가락이 아프면서 병뚜껑을 따기가 힘들어서 고무장갑을 끼곤 하는데 엄살인가?
며칠 동안 손잡이 부러진 주전자를 사용했다. 아침에 커피를 핸드드립 하려면 장갑을 끼고 남아 있는 손잡이를 엉거주춤 잡아서 물을 따르곤 했다. 있어야 할 부분이 없어서 허전하고 불편하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얄쌍스러운 주전자를 주문했다. 손잡이도 스테인리스라서 혹시 떨어뜨리더라도 안전하겠다 싶다. 새 주전자가 도착했을 때 오일로 닦아서 혹시나 남아 있을 수 있는 연마제를 제거했다. 그런데 물을 끓이려 인덕션에 올렸더니 불이 켜지지 않는다.
스테인리스 재질이고 브랜드 있는 주전자니까 당연히 인덕션에서 사용 가능하리라 생각한 나의 오산이다. 미리 확인하지 않고 닦아버린 탓에 반품할 수도 없다. 오래 사용할 물건이니까 비용이 좀 들어도 예쁜 주전자로 사겠다고 말하면서 중요한 걸 확인하지 않은 나의 태도에 헛웃음이 난다. 중고마켓에 다시 파는 방법도 있다는데 한 번도 해보지 않아서 엄두가 나지 않는다. 쇼핑센터에 가서 마음에 드는 주전자를 고르고 싶었지만 온라인 시대에 맞춰 살아보려고 시도했다가 큰코다쳤다.
덕분에 인덕션 주변에 나와 있는 부엌 세간살이가 늘었다. 물을 끓이기 위해 작은 냄비를 꺼냈다. 커피를 내릴 때는 작은 냄비에 물을 끓여서 새로 산 주전자에 담는다. 손잡이 부러진 주전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온전하게 대체물건을 준비하지 못해서인지 선뜻 치우지 못하고 있다. 나에게 자주 이용당하면서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다고, 이제 헤어지는 마당에서라도 자기를 좀 봐달라고 하는 것 같다. 그동안 내가 세월의 더께 앉는 주전자와 얼마나 편리하게 지냈는지 알겠다. 익숙해서 고마운 줄 모르다가 손잡이가 부러져서 이별할 시간이 되어서야 주전자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손잡이 부러진 주전자야 그동안 고마웠다. 네 할 일을 잘 해냈으니 잘 가렴.”
물을 데우기 위한 어정쩡한 동거를 끝내야 할 시간이다. 손잡이가 부러져서 사용하기 불편해진 주전자를 재활용 수거장으로 보내야 할지, 다른 용도가 있을지 생각한다. 어쩌면 조그만 화초를 심는 용도로 써도 될 듯하다. 인덕션에서 사용 가능한 주전자를 새로 사야 할지, 좀 불편해도 냄비에 물 끓여서 옮기며 지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더 지내보고 선택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