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달, 새로운 날
11월이다. 낙엽이 물들고, 낙엽이 진다.
봄, 여름, 가을을 지나 겨울이 시작되고 있다. 아직은 가을이라 말하고 싶은 11월 1일이다. 며칠 지나면 가을이라는 말을 하기가 어색하겠지만 창문 밖 느티나무는 노란 잎을 하늘거리고 있고 대왕참나무는 붉은 잎으로 치장했다.
가을을 보내기 아쉬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인지 매년 길 한쪽에 낙엽을 모은다. 산책할 때 바스락거리는 낙엽 쌓인 길에서 내 발을 멈추곤 한다. 새로 탄생하기 위해 낙엽을 다 떨구고 맨몸이 되는 나무와 자신이 떠날 때임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죽음을 선택하는 낙엽 앞에서 애도한다. 봄에 나무에서 새순이 나올 때면 추운 겨울을 견디고 생명이 고개를 드는 모습에 경이롭다. 여름이면 나무에 무성한 나뭇잎이 와글와글 모여서 축제를 연다. 가을이면 꽃처럼 예쁜 색깔로 나뭇잎이 물들고 이맘때 11월 초가 되면 나무는 미련 없이 그 예쁜 나뭇잎을 벗어던진다. 태어나고 자라서 결실을 맺고 나면 가차 없이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다.
어떤 나무는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무럭무럭 자라기도 하고 어떤 나무는 반음지에서 볼품이 별로 없다. 그래도 사계절의 순환을 겪으며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다. 음지에서 더 잘 자라는 나무도 있다. 환경 탓을 할 줄 모르는 나무들은 성인(聖人) 같다.
며칠 전 경주 계림을 거닐었다. 신라 건국 당시부터 있었다니까 천년이 훌쩍 넘은 숲이다. 나무를 베지 않아 옛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나의 하얘지는 머리카락을 굳이 감출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중년의 내 나이도 경주 계림의 나무들 입장에서 살펴보면 새파랗게 젊디 젊은 존재일 뿐이다. 1803년(순조 3)에 세워진 비도 있으니 계림은 오랜 세월을 지나며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겪은 숲이다. 고목은 겪으며 살아온 흔적이 온몸에 남아 있어서 구부러지고 휘고 비틀렸다. 그런데 고목의 그 모습이 근사하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귀 기울여 듣고 싶다.
경주 계림의 나무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기록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숲으로 여겨졌을 거다. 하지만 사람이 보존하고 싶다고 해서 모든 생명이 보존되지는 않는다. 계림에 첫발을 디딘 나무 중에 초반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사라지기도 하고 아름드리로 성장해서 사람들의 눈길을 받다가 얼마 못 가서 사라진 나무도 있을 거다. 눈에 보기도 별로이고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도 별로라며 주목받지 못한 나무도 있을 거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계림에 발붙이고 사는 나무는 비틀리면 비틀리는 대로 생명을 이었고 어느새 세월을 겪으며 살아온 흔적이 사람들 눈에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내 방 창문 너머에는 3년 전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무들이 있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새로운 터전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 개중에는 반은 죽고 반은 살아있는 나무도 있다. 뿌리가 뽑히고 새로운 나무로 심기도 했다. 경주 계림의 고목 같은 멋은 아니지만 내 방 창문 너머로 저 나무들을 볼 수 있어서 감사하다. 새로운 달, 새로운 날 11월을 나무들과 만날 수 있어서 좋다. 쓸쓸한 듯 고요해지는 11월이다.
어린이집 원생과 선생님이 산책하는 모습이 보인다. 아이들이 낙엽 위를 뛰어다니며 꺄르륵거린다. 웃는 소리가 맑다.
세상에는 바라보기만 해도 미소 짓게 되는 아기도 있고 빛나는 젊은이도 있지만 깊숙이 패인 주름을 지혜로 채우는 노인도 있다. 어떤 나무도 어떤 사람도 자기만의 고유성을 가지고 주변과 더불어 산다. 내가 살아내는 일상이 아름답기를 바라지만 별거 아닌 일에도 숱하게 걸려 넘어지기를 반복한다. 넘어졌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 시간이 걸려서 애를 먹기도 한다. 그냥 그런대로 나이테를 그리고 있다.
12월 말이 되면 여기저기서 한 해를 마무리한다고 하는데 들떠있는 느낌이다. 아마도 새해를 맞이하기 때문인가 보다. 하지만 11월은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뒤돌아보게 된다. 20~30대에는 11월이 쓸쓸했다. 뭔가 해놓은 것 없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40대 중반부터는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사건 사고를 겪은 것에 감사하게 된다. 겪을 때는 힘에 부쳤지만 11월에 뒤돌아보면 그래도 그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내가 뭔가를 해서가 아니라 시간이 해결했다는 느낌이다. 일어날 일, 일어나면 안 될 일을 내가 계획할 수 없다. 나무들이 사계절을 순환하듯이 나는 나의 일상을 겪을 뿐이다. 비워지고 가벼워지는 11월이다.
주) 경주계림(慶州鷄林) : 사적 제19호. 첨성대(瞻星臺)와 월성(月城) 또는 신월성(新月城) 사이에 있는 숲으로 왕버들·느티나무·단풍나무 등의 고목(古木)이 울창하게 서 있는, 신라 건국 당시부터 있던 곳이다. 시림(始林)이라 부르다가 김씨(金氏)의 시조(始祖) 김알지(金閼智)가 태어난 이후부터 계림(鷄林)이라 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경주계림(慶州鷄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