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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반 Mar 23. 2024

우울의 단면(2)

사는 게 숙제인 여자

 거실로 나왔다. 커튼을 달지 않은 거실의 창은 대낮의 햇빛을 온전히 받아내고 있었고 컴컴한 방에서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시신경이 한 번에 들어오는 빛을 받아들이지 못해 순간 눈앞이 까맸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잠시 몸을 비틀거렸다. 거실 바닥이 솟는 것처럼 울렁이고, 빙그르르 도는 어지럼증이 쓱 훑고 지나갔다. 거실 깊숙이 들어온 햇빛이 달군 자리에 몸을 다시 뉘었다. 해가 좋은 날 마당에 고추를 널어 말리듯 몸을 바싹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몸뚱이에 햇빛을 쬐면 축축한 마음도 바삭거려지지 않을까 싶었다. 거실 창을 향해 몸을 모로 돌렸다. 창가에 둔 화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세심하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실내에서 알아서 잘 자라는 수종들로만 두었다. 그 중―다른 식물의 이름도 모르지만―이름이 뭔지 모르겠는 식물이 새잎을 펼쳐낼 듯 줄기와 줄기 사이에서 잎끝을 살짝 오므린 채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집에서 나를 제외하고 살아있는 생명체라곤 저 식물들이 전부일 것이다. 분갈이하는 법도 잘 몰라 대충 심어 두었는데도 곧잘 뿌리를 내려 생명력 있게 자라났다. 나와는 다르게. 손을 뻗어 어루만졌다. 연둣빛 여린 잎의 감촉이 부드럽고 촉촉했다. 뭉툭한 내 손이 이제 막 기지개를 켠 아이에게 생채기를 낼 거 같아, 만지기를 멈췄다.

 불현듯 연희가 엄청난 일이 생긴 것처럼 얼굴의 근육을 한껏 움직여 가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키우는 몬스테라가 밤사이에 새잎을 냈어. 아침에 그걸 발견했는데 기분이 날아갈 듯 좋더라. 나한테 엄청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막 흥분됐어.’

 이런저런 사정으로 여러 직장을 옮겨 다니던 시기에 연희를 만났다. 서른 초반, 사회에서 만난 친구인데 연희와는 깨복쟁이 때부터 알았던 것처럼 허물없이 가까워졌다. 말끝마다 따라붙는 특유의 간드러진 웃음과 비음이 적당히 섞인 연희의 말투는 모두에게 기분 좋은 에너지를 전달했다. 상대의 말에 귀 기울여 공감할 줄 알았으며 어설픈 충고 따위를 늘어놓지 않는 선을 지킬 줄도 알았다. 그 작은 몸에서 어떻게 그렇게 큰 힘을 내지 싶을 정도로 연희는 강단이 있었다. 항상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연희가 내심 부러웠다. 그에 반해 나는 늘 걱정이 많았다. 나중에는 무엇을 걱정하는 건지도 모른 채 늘 힘이 들었다. 연희의 집은 수원에 있었는데 같이 다니던 회사를 내가 먼저 그만두고 연희도 몇 달 뒤, 집이 있는 수원 쪽으로 회사를 옮기게 되면서 만남도, 연락도 자연스레 멀어졌다. 뚫린 철길을 따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짧은 배차 간격으로 사람을 실어 나르는 전철에 몸을 싣기만 하면 쉽게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손에 항상 들려 있는 핸드폰을 사용하면 신호음 몇 번에 상대의 안부를 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각자 버거운 삶을 살아내느라 그 짧은 여유를 내지 못하고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전화 너머에서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엄청 대단한 일이 생긴 것처럼 말하는 연희가, 난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어떤 생각의 범위를 가져야 그게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이 될 수 있는 건지 한동안 의문이 들었다. 언제 한번 만나자는 상투적인 말을 끝으로 그 통화를 마무리했던 게 벌써 1년이 지났다.


[우울의 단면 3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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