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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희웅 Jun 17. 2024

여행은 체력이다.

 “계획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마드리드 왕궁 입장 시간이 지났습니다. 왕궁을 입장하려면 내일 다시 와야 합니다.”

“계획에 차질이 생긴 연유는 무엇입니까?”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서 시간 조절 못 했습니다. 가이드로서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아예 왕궁을 보지 못합니까?”

“밖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드리드 왕궁을 밖에서, 철창 너머로 구경했다.

“기억난다. 윤대통령이 차에서 내렸던 장소네. 왕궁 안에서 나토 환영 행사가 있었거든. 텔레비전에서 봤던 장소가 여기였구나.”

“별 걸 다 기억하십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거든. 이야기해 줄까?”

“전혀, 궁금하지 않습니다.”     

 2,800개의 방이 있다는 마드리드 왕궁을 밖에서 구경했다. 왕궁과 대성당 사이에는 아르메니아 광장이 있었다. 광장의 끝에 서면 전망대 수준의 광경을 볼 수 있는 테라스가 있었다. 그곳에 서면 캄포테 모로 (분수의 정원)라는 잘 가꾸어진 공원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9세기 이슬람교도가 마드리드를 방어하기 위해 세운 성채에 왕궁은 자리했다고 한다. 내려다보니 이곳이 성채가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파른 절벽 위에 왕궁은 자리했으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광활한 평야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드리드 광장 건너편에1844년에 조성된 오리엔테 광장으로 이동했다. 광장은 서쪽에 마드리드 왕궁, 동쪽에 왕립극장, 북쪽에 왕립 수도원이 있다. 나처럼 지친 관광객들은 그늘진 벤치에 가만히 앉아 바쁘게 눈만 돌리면 된다. 스페인 사람들도 산책으로 많이 나오는 광장이었다.

“아빠, 남남 커플이다.”
 “여기서 남남 커플 한두 명 봤니?”

“유모차를 끌고 있잖아. 아이도 있나 봐?”

“아이가 있어? 혹시 개 아닐까?”

“개모차는 우리나라에만 있어. 유럽은 개모차 없어.”

내 앞으로 지나가는 남남 커플의 유모차 안을 슬쩍 들여다봤다. 돌쯤 됐었을 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유모차를 끌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베이비, 큐티, 큐티.”

남자는 웃으며 ‘땡큐’ 했다. 남남 커플이 자연스럽게 손잡고 산책할 수 있는 나라, 그리고 아이까지 있다니, 그동안 말로듣던 모습을 직접 내 눈으로 봤다. 모두가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는 나에게는 부러운 광경이었다. 밝고, 선명한 아름다운 무지개가 그들의 앞길에 찬란히 비치길 기원한다.      


 “스페인은 저녁 시간이 8시부터입니다. 우리는 이제 저녁 먹으러 이동하겠습니다. 한 시간 정도 걸을 예정입니다. 그러면 8시쯤 도착할 것 같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제가 지금 이만 보를 넘게 걸었습니다. 솔직히 지쳤습니다. 저녁은 그냥 포기하고, 숙소로 이동하시죠?”

“식당이 숙소 근처입니다. 숙소까지 걸어가나, 밥 먹고 들어가나 비슷합니다.”     

 역시 나이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중간중간 초콜릿, 사탕, 커피도마셨지만, 기운이 떨어지는 속도에 역부족이었다. 터덜거리며 걷는 와중에 딸은 쇼핑센터 앞에 섰다.

“사람들이 프리마켓 쇼핑백을 많이 들고 다녔거든. 그런데 여기가 프리마켓이네. 구경이나 하고 가자.”
 “살 것도 없으면서 무슨 구경이야. 그냥 가자.”

“아빠가 걷다가 서점이 보이면 들어가 보는 것과 같아. 아빠도 책 안 사고, 그냥 나왔잖아.”

“그래, 미안하다. 들어가자.”

 프리마켓은 5층 건물이었다. 아웃렛 분위기와 대형 할인점 분위기가 어울려 있었다. 나름 저렴한 상품이 판매되고 있었다. 일요일 저녁 시간, 한국이나 스페인이나 사람들이 제일 많은 시간이었다. 사람들에 치이며 1층에서 5층까지, 다시 1층으로 매장과 계단을 오르내렸다. 나는 더욱 지쳐만 갔다. 설상가상 프리마켓을 나오니 비가 조금씩 오고 있었다. 딸은 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식당 거의 다 왔어요. 기운 내세요. 유럽은 이 정도 비는 우산 없이 다닙니다. 우리도 그냥 비를 맞으며 유러피아처럼 기분 좋게 걸어 봅시다.”     


 예약한 비누티스 식당은 멋있었다. 사람들도 많았다. 한국 연예인이 다녀간 이후로 한국 사람들의 '꿀 대구' 성지가 되었다. 우리는 꿀 대구와 맛조개를 시켰다. 옆 테이블을 보니 상그리아를 피처로 마시는 것이 아닌가? 주문을 받고 돌아서는 웨이터를 불러 세워 우리도 피처로 달라고 했다. 상그리아는 밍밍했고, 곁들인 꿀 대구는 달았고, 맛조개는 흐물거리고 짰다. 마음에 안 들어하는 나를 보며 딸은 다른 것을 주문하려 했다. 나는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힘들어서 그런지 무슨 맛인지 모르겠어. 그냥 가자.”

“누가 잠도 안 자고, 새벽부터 돌아다니래?”
 “내가 너무 들떠서 그랬어. 내일 오전 일정은 무조건 취소다. 너무 힘들다.”

“밖에 비가 많이 와. 조금 더 있다가 가자.”
 “비 맞으며 가자. 언제 스페인에서 비를 맞아 보겠니?”
 “그렇게 힘들어?”
 “삼만 보가 넘었다. 25킬로를 넘게 걸었어.”     

스페인의 둘째 날은 비를 맞으며, 삼만 보를 걷고, 저질 체력을 확인한 힘든 하루였다.


역시 여행은 체력이었다. 여행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떠나야 한다.



마드리드 왕궁
알무데나 대성당
광장 테라스에서 바라본 풍경
오리엔터 광장의 펠립4세 동상, 뒤는 마드리드 왕궁. 지친 표정이 역력하다.
프리마켓
비니투스, 안으로 들어가면 큰 홀이 나온다.
짜디짠 맛조개
달디단 꿀 대구
피처로 마신 상그리아
비에 젖은 마드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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