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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희웅 Jun 24. 2024

세비야의 이발사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희극 오페라를 꼽으라면 역시 조아키노 로시니(1792-1868)의 세비야의 이발사가 1순위이다. 내가 하는 말은 아니고, 지식백과에 나온 말이다. 지식백과를 떠나서 내가 본 몇 안 되는 오페라 중 하나가 세비야의 이발사였다.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 나는 세비야에서 이발을 하려고 했다. 오페라와 이발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연결이지만, 나는 오페라의 감동을 세비야의 이발사에게서 느끼고 싶었다. 그런데 어제 지나가다 발견한 이발소 간판을 검색하니 세상에나 1908년도에 이발소 문을 열었다고 한다. 그러면 116년이나 된, 이발소라는 이야기였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확인한 내용이다.     


1908년 바실리오 바예호 아바드(Basilio Vallejo Abad)가 설립한 이 미용실은 산타 이사벨 거리(Calle Santa Isabel)에 있으며 아토차에 도착하는 여행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Ramón y CajalGregorio Marañón이 이곳을 통과했습니다.      


Ramón y Cajal과 Gregorio Marañón은 검색해 본 결과, 유명한 의사와 왕립학자였다. 허름한 이발소가 이렇게 대단한 곳이라니, 이발은 세비야에서 Vallejo Hairdresser로 자연스럽게 변경되었다.

“예약을 안 했는데 괜찮을까?”

“어쩔 수 없지. 일단 가 보자.”


 ‘울라’를 외치며 이발소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나이가 지긋하신 몇 분이 커피를 마시며 담소 중이었다. 나는 머리를 만지며, 이발 의자를 바라봤다. 밝은 미소로 다가온 이발사는 나를 의자에 앉혔다. 이발사는 자연스럽게 내 머리를 만지며, 분무기로 머리를 감기듯 푹 젖을 때까지 물을 뿌렸다. 그리고 나에게 스페인어로 말을 걸었다.

“이발사가 나에게 말을 걸어,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

“기다려 봐, 구글님께서 해결해 주실 거야.”

딸은 구글 번역기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나를 제외한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박장대소했다.

“딸, 무슨 일이야?”

“머리를 어떻게 해드릴까요? 해서, 내가 스페인에서 제일 잘 나가는 50대 남자 머리로 해달라고 했는데 이렇게들 다 웃네. 나는 그냥 따라 웃었어.”

번역이 잘못됐는지, 아니면 ‘스페인에서 제일 잘 나가는 50대 남자 머리’라는 말이 재미가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발소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딸은 번역기로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는 젖은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눈을 껌벅이며, 불안한 시선으로 이발사를 바라봤다. 물론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미소 또한 보냈다. 50년 경력의 이발사는 건조한 얼굴로 빗질과 가위질로만 거침없이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바닥에는 젖은 머리카락이 겹겹이 쌓이고 있었다.

“딸, 머리를 너무 많이 자르고 있어. 어떻게 해 봐.”

“벌써 잘린 머리카락을 어떻게 해. 불안해도 그냥 맡겨 봐. 그런데 위에서 보니까 아빠 속에 머리가 없네. 거의 대머리야.”
 “머리카락이 얇아서 속이 보이는 거야. 결코 대머리는 아니거든.”

“아빠, 이발소 분위기가 레트로야. 너무, 멋있어.”

“옛날 생각난다. 아빠, 어릴 적에 이런 이발소에서 머리를 잘랐거든. 의자며, 가위며, 면도칼이며, 세상에 면도칼 날을 세우는 가죽 혁대도 옛날 그대로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동네에 오래된 이발소가 있었다. 일요일 오후에 모자를 눌러쓰고 이발소에 들어갔다. 이발도 하기 전에 머리 먼저 감았다. 이발사는 모자 때문에 머리가 눌러져서 정확한 머리모양이 안 보인다며 머리를 감기는 내내 야단을 쳤다. 이발의자에 앉아 머리를 말리고 나서야 이발을 시작했다. 보통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으면, 기계로 후다닥 길어야 십 분이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삼십 분째 가위질만 했다. 이발은 가위로 해야지 기계를 쓰면, 머리카락이 상한다며 그래서 이발사에게는 가위가 생명이라고 했다. 면도 역시 가죽 혁대에 쓱싹쓱싹 날을 세운 면도칼로 했다. 미용실에서 십 분이면 되는 이발을 이발소에서 한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 젊은 남자들은 머리를 깎으러 이발소가 아닌 미용실로 갔다.


 이곳 역시 비슷했다. 이발하러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었다. 오래된 이발의자에 앉아 있으니, 옛날 생각이 저절로 났다. 아버지 손을 잡고 처음 간 이발소. 키가 작아 이발 의자 손잡이에 가로질러 판자를 올려놓고, 그 위에 앉아 이발했던 기억.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 머리를 짧게 잘랐던 기억. 군대에 입소하기 전 짧게 잘랐던 기억. 추억에 잠겨 바라본 거울에는 짧은 머리의 낯선 중년 남자가 있었다.

“아빠, 생각보다 짧은 머리가 어울려. 괜찮아. 좋아.”

불안한 나의 눈빛을 본 딸의 적절한 위로였다. 드라이어를 마친 후의 모습이 딸의 말대로 괜찮아 보였다. 나는 이발사에게 엄지 척하며 ‘그라시아스’를 외쳤다. 이발사는 당연하다는 듯이 웃었다. 같이 사진을 한 장 찍고, 이발소를 구경했다. 향수 가득한 물건들을 보며, 이발사에게 건강히 지내시라는 말과 배꼽 인사를 했다.     


“아빠, 마음에 들어?”

“이발해주신 어르신이 보기 좋았어. 50년 경력이면 70살은 됐겠지?”
 “그 언저리겠지. 그런 게 마음에 쓰이는 걸 보면 아빠도 늙었나 봐.”

“그런가? 스페인에서 이발까지 하고, 이번 여행 마음에 든다. 다음은 어디입니까?.”

"다음은 어제 본 아기자기한 서점으로 갑니다."



이발의자와 거울
오래된 이발기구들
손때 가득한 이발기구
한산한 이발소. 문옆 자리에 내가 앉아 있었다.
머리 속이 보이기는 하네.
부자연스러운 미소와 나이드신 이발사
이전 09화 길 가다 돈 주운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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