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비혼주의자가 된 이유 중에는 아빠 영향도 있어.
마트에서 사 온 과일과 맥주를 마시며 나눈 대화가 오랫동안 가슴 한편에 남았다. 사실 대화라기보다는 다툼이었다. 대화는 일단 이해하기와 공감하기 그리고 경청하기가 수반되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이해도 못했고, 공감은 더욱 안 했다. 비혼주의자가 된 이유 중 하나가 부모의 이혼이라고? 경청은커녕 나는 몹시 화가 났다. 대화로 시작된 자리가 다툼이 되어가며 자연스럽게 동등한 입장은 사라졌다. 나는 아빠라는, 어른이라는 위치를 교묘하게 드러내며 나의 억지스러운 주장만 되풀이했다. 미안했다. 차이를 인정하고, 의견을 존중하지 못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나는 딸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제대로 못 한 것 같다.
'처음 살아본 인생이라서 서툰 건데, 그래서 안쓰러운 건데, 그래서 실수 좀 해도 되는 건데....'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나온 대사다. 내가 아버지가 처음인 것처럼, 너 역시 자식이 처음인데, 못난 아빠는 너의 말에 바보 같이, 불같이, 부끄럽게도 화를 냈어. 정말 미안했다. 허리 굽혀 정중하게 사과한다. “부모가 이렇게까지 무책임할 수 있어?”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 역시 아버지에게 그런 소리를 했다. 하지만 내가 아버지가 되어보니 부모도 사람이고, 실수하고, 아프고, 슬프고, 방황하고, 넘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힘들 때 돌아가신 부모님을 원망했던 적도 있었다. 우리 집이 조금 더 넉넉했다면 나의 삶이 바뀌었을 것 같다는 어리석은 생각도 했다. 아마 어리광 부리고, 투정 부리고, 이유 없이 매달려도 이해해 주는 부모님이 그리웠던 것 같다.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을..., 미안하다, 나는 모르고 싶었다. 너보다는 나만 보였다. 네 행동의 이유를 알면서도, 이해하면서도 나는 그때 불같이 화를 냈다. 미안하다.
나는 22살에 아빠가 되었어. 너도 22살을 지나왔잖아. 22살이 얼마나 어린 나이인 줄 알겠지. 너에게 22살은 대학생이었으며, 한창 공부할 때였지. 나에게 22살은 두 아이의 아빠고, 가장이었어. 네가 9월 8일에 태어나고, 난 9월 23일에 회사에 입사했어. 회사에 입사하기 전까지는 하루하루 일당을 주는 막노동 했어. 그때는 하루하루 먹고사는 게 급했거든. 네가 태어나고, 고민 끝에 안정적인 회사를 찾아 입사했지. 그때 첫 월급이 37만 원이었어. 일당을 받는 막노동의 수입보다 반이 줄었지. 그래서 나는 회사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어. 그래야 월세에서 전세로 옮길 때 빌린 돈도 갚고, 분유도 살 수 있었거든. 나는 좋은 아빠보다 책임 있는 가장이 먼저였지. 구차한 변명이라는 것 알아. 하지만 그때는 그랬어. 세비야에서 나에게 자전거를 타자고 했잖아. 나는 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너의 말에 당황했어. 보조 바퀴가 달린 자전거를 사 준 기억은 있는데, 너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준 기억이 없는 거야. 누가 너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줬을까? 미안함에 묻지도 못했어. 내가 참 나쁜 아빠였어.
너의 엄마도 고생 많이 했어. 나는 지금도 엄마를 미워하지는 않아. 둘 다 어린 나이에 힘든 시간을 같이 보냈으니까. 그랬으면서도 엄마, 아빠는 이혼했지. 이혼했을 때 엄마, 아빠 나이가 지금 너보다 조금 더 많은 사십이었어. 만약 엄마, 아빠가 그 당시 오십이 넘었다면 이혼을 쉽게 하지는 못했을 거야. 이혼을 결심할 때, 난 너희들이 초등학생도 아니고, 스무 살이면 상처가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이해해 줄 것으로 생각했어. 돌이켜보면 다 내 실수였어. 너무 쉽게, 안일하게 생각했어. 그리고 또 너들에게 농담처럼 했던 말이 있지. ‘너희들은 결혼하지 말고, 혼자 행복하게 살아, 꼭 결혼하고 싶으면 차라리 동거해라, 아이는 낳지 말아. 너희의 삶이 더 중요하다.’ 아빠의 뼈저린 경험담처럼 들렸을 거라는 생각 못 했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하는 삶도 재미있고, 아이가 주는 행복도 있는데 아빠가 지금 생각하니 경솔했어. 너에게 농담처럼 했던 말들이 너에게 영향을 준 것 같아 미안했어. 이것만은 분명해. 너는 분명 나에게 행복이었어. 그것만은 변치 않는 사실이고, 진실이야. 세상의 어떤 딸이 아빠와 단 둘이 해외여행을 하니? 내가 다 복 받은 거지.
부부관계에서 이혼은 엄마, 아빠의 관계가 변했을 뿐이야. 이혼했다고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 관계가 변한 것은 아니잖아. 하지만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겪는 너희들의 정신적 고통을 이해 못 했고, 너희들의 감정에 공감 못 했다는 것을 내가 너무 늦게 깨달았어. 그래서 더욱 미안하다. 할 말이 없어. 너희들이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어도 부모에게 언제나 투정 부릴 수 있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어. 너에게 아빠가 한 가지 약속할게. 이제 앞으로 언제든지 어린아이처럼 투정 부려도 돼. 내가 언제까지나, 살아있는 동안, 아니 죽어서도 너희의 투정을 기쁘게 받아 줄게. 아무튼 그날 밤, 화를 내서 미안했고, 너의 감정을 이해 못 하고, 공감하지 못하고, 경청하지 못한 것, 진심으로 사과하며 아빠가 앞으로 잘할게.
사랑한다. 나의 딸. 다시한번 사과할게.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