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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희웅 May 23. 2024

나에게 스페인이란?

 창을 든 돈키호테, 그의 애마 로시난테와 산쵸, 푸른 언덕 위에 기다란 팔을 가진 풍차가 있는 동화책을 읽었던 때가 있었다. 어른이 된 이후 돈키호테가 동화가 아닌 소설인 것을 알았다. 돈키호테는 1, 2권으로 구성된 굉장히 두꺼운 책이었다.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돈키호테를 읽었다. 내가 알고 있던 돈키호테는 없었다. 쓸쓸하게 홀로 죽어가는 돈키호테를 바라보며 나는 책을 덮었다.      


누가 미친 거요?

장차 이룩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하는 내가 미친 거요?

아니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만 보는 사람이 미친 거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돈키호테 중에서)


 그렇게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나에게 다시 스페인이 다가왔다. 바르셀로나의 또 다른 이름, 안토니 가우디였다.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버섯이 있고, 흘러내리는 줄기가 있고, 건물 위에 용이 있는 가우디의 건축을 보며 스페인을 동경했다. 꼭 가서 눈으로 보고 싶었다. 지중해를 낀 해변, 가톨릭과 이슬람, 유대교 문화가 섞인 독특한 문화유산, 따뜻한 기후, 다양한 음식 그리고 돈키호테, 피카소, 가우디가 있는 나라. 어느 순간 스페인은 나의 버킷리스트가 되었다. 퇴직 이후 인터넷과 유튜브를 뒤지며 계획을 세웠다. 한 달 정도 스페인의 구석구석을 보고 싶었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선배에게 스페인 이야기를 들었다. 가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순간 마음이 바빠지며, 덩달아 몸도 바빠졌다. 여행을 준비할수록 처음 계획을 세울 때의 자신만만은 어느새 저 멀리 달아났다. 스페인어는 고사하고, 영어도 한마디 못 하는 나에게 휴대폰 하나로 한 달간 여행을 한다? 계획이 구체화될 즘 나는 자신이 없어졌다. 어느새 두려움이, 끝없는 절망만이 나를 감싸 안았다. 자유여행을 포기하고, 패키지로 가야 하나? 그러면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볼 수 없을 텐데. 돈키호테는 어쩌나? 알람브라 궁전과 현빈의 기차역, 나른한 오후 햇살을 맞으며 광장에서 마시는 맥주 한 잔은 포기할 수 없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자유여행으로 다녀온 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빠 혼자서 자유여행은 불가능하다고 사료됩니다. 어르신답게 패키지를 추천합니다.”

“나는 헤밍웨이가 사랑한 론다의 다리를 보고 싶다. 헤밍웨이가 좋아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싶다. 작은 마을의 서점에서 읽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스페인어로 된 돈키호테를 한 권 사고 싶다. 피카소와 달리의 그림을 한 없이 바라보고 싶다. 나의 버킷리스트를 시끄러운 아저씨와 아줌마들과 사진만 찍는 패키지로 보낼 수는 없다. 파리똥도 똥이고, 브런치 작가도 작가다. 나는 작가의 감수성을 놓치고 싶지 않다. 방법이 없겠니?”

 “정 그렇다면 며칠만 시간을 주시지요.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윤 작가님.”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딸의 호출이 있었다. 딸의 직장 근처 삼계탕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닭 날개를 쪽쪽거리는 나에게 딸은 깜짝 놀랄만한 제안을 했다.

“내가 동행할게. 대신 한 달은 무리야. 길어야 보름. 스페인과 포르투갈 중 한 곳만 가자. 나는 스페인을 추천해. 어때?”

“회사에서 너의 존재감이 없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보름이나 휴가를 쓰면 너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고, 급기야 거리에 나앉을 듯싶은데 괜찮겠니?”

“걱정하지 마. 아빠 은퇴 기념으로 효도 여행을 간다고 하니까 부장님이 눈물을 글썽이더군. 직원들을 모아놓고 칭찬하셨어. 나는 공짜 여행을 갈 뿐인데, 아빠 덕분에 세상 제일 착한 딸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내가 시간을 내는 대신 모든 경비는 아버님께서 지불합니다. 저는 딸이 아닌 가이드로 동행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떻습니까? 마음에 드십니까?”

“나야 무조건 좋지.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 이렇게 된 이상 아빠와 딸의 스페인 여행기를 쓰는 거야. 어때?”

“글 쓰는 거 싫은데. 아빠는 작가니까 글 쓰는 게 부담 없겠지만, 나는 부담이 큰데.”

“부담되면 짧게 글을 써도 돼. 혹여 여행기를 출판하게 된다면 너도 작가가 되는 거야. 굉장하지?”

“그래도 부담이 되는데 고민해 볼게. 오늘부터 아빠는 스페인에서 하고 싶은 것을 적어서 줘. 내가 일정과 동선을 짜볼게.”     


 -. 프라도, 고고학 박물관, 레이나 소피아, 피카소 미술관등

-. 가우디 투어

-. 알람브라 궁전

-. 지역 서점 방문하기

-. 헤밍웨이 맛집(론다) 

-. 미술랭 맛집에서 식사하기 

-. 타파스 투어

-. 플라멩코 공연 관람

-. 투우 경기 관람

-. 스페인 이발소에서 이발하기

-. 스페인 여성과 이야기하기       

유튜브와 인터넷을 보며 찾아내고, 적어 내려가는 재미가 있었다. 딸은 추가되는 항목에 따라 일정을 수정하고, 예약했다. 언제나 방긋 웃으며, 불평 한마디 없는 가이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드디어 내일 출발이다. 나는 스페인으로 간다.     

“아빠, 수영복 챙겼어?”

“수영도 못하는데, 수영복을 왜 챙겨?”

“해변에 앉아만 있어도 좋아.”
 “해변 안 가. 우리나라도 삼면이 바다다. 해변은 넘치게 봤다.”

“누드 해변인데 안 갈 거야?”

“누드? 누드라면 당연히 가야지. 그런데 누드 해변이면 수영복도 필요 없는 거 아니야?”

“그럼 호텔에서부터 홀딱 벗고 갈래?”

“그렇구나. 수영복 챙길게.”       

마드리드 호프 집 벽에 그려진 그림. 포스터인지 무슨 그림인지, 내용도 알 수는 없지만 스페인 입성한 첫 날 숙소앞에서 마주한 이 그림은 강렬했다. 여기가 스페인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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