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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Sep 26. 2023

난소암 수술

그날의 기록 #2

난소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하면서, 앞으로 나의 여정을 기록하겠다는 나의 다짐은, 가혹한 현실 앞에서 처참히 무너져버렸다.

한동안은 나의 투병 생활에 대해 생각할 여력도 없었고, 내 생각과 감정을 기록하기 위해 노트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심지어 핸드폰을 계속 붙잡고 엄지손가락을 바삐 움직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찼다. 생존을 위한 고독하고 치열한 싸움 말고는, 다른 일은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에겐 마치 10년처럼 느껴졌던 4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10월이 되어서야 난 다시 글을 쓸 수 있었다.




6월 2일 첫 글 이후 처음으로 다시 글쓰기를 클릭했다.

난소암 진단에 대한 글을 쓴 이후 모든 게 너무 정신없이 흘러갔고, 6월, 7월, 8월에는 노트북을 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힘들었고 고통스러웠다. 내가 다시 첫 글을 읽어도 '이땐 정말 뭣도 모르고 순진하게 이랬었구나...' 할 정도로 무너지는 순간도 많았다.


그렇지만 첫 글을 쓰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는 게, 그 글을 몇 번이고 혼자 읽으며 그때를 기억하고, 그때의 마음가짐을 되새기며 그만큼 긍정적이었던 나 자신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감사한 점들을 다시 상기시켜 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벌써 10월이 되었다. 지금은 많이 호전된 상태이고, 9월부터는 앉아서 노트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컨디션이 올라왔다. 기록은 그 순간순간 하는 게 가장 정확하고 좋겠지만, 다시 기억을 더듬어 지금까지의 그리고 앞으로의 내 투병생활을 나누기 위해 나는 다시 글쓰기를 시작한다.




난소암 수술


나는 수술을 위해 수술 하루 전 산부인과 병동에 입원했다. 간호사실에서 간호사선생님의 수술 전후 관련 설명을 듣고 키와 몸무게를 재고 병실로 들어왔다. 전날 좀 무섭고 긴장되긴 했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수면마취할 거니까. 난 그냥 자면 된다. 수술 들어가는 시간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했다. 그전에 잡혀있는 수술이 예정보다 얼마나 일찍 끝나느냐, 아니면 늦어지느냐에 따라 예정보다 조금 더 일찍 들어갈 수도 있고 더 늦게 들어갈 수도 있다. 난 두 번째 수술, 오전 11시쯤으로 잡혀있었다.


다음날이 되었다. 그리고 수술실로 옮겨 갈 시간이 되었다.

아직 멀쩡하지만 휠체어를 타고 이송요원님과 엄마, 아빠와 같이 산부인과 수술실이 있는 3층으로 내려갔다.


이때부터 실감이 나기 시작한 걸까? 전날 밤까지, 당일 아침까지 괜찮았던, 생각보다 의연했던 나인데,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무서웠다. 수술실 앞에 다다라 아무렇지 않다는 듯 부모님께 웃어 보이고, 아빠와는 하이파이브를 하고 들어갔다. 대기실 안에는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 나처럼 휠체어를 타고 대기하고 계신 할아버지뻘 두 분이 계셨다. 근데 그분들을 모두 앞질러 내가 제일 앞으로 가 섰다.

내 휠체어를 밀어 맨 앞에 대기시킨 간호사는, 마취과 선생님이 와서 설명해 주시기 전까지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무서웠다. 수술대기실 안은 정신없이 돌아갔고, 내 또래로 보이는 간호사들과 의사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아, 정말 엉엉 울고 싶었다. 참으려고 애썼지만 자꾸만 눈물이 났다. 누군가 볼까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을 감췄다. 이 순간까지 그렇게 겁먹지 않았었는데, 이때는 정말 너무 무서웠다.


억지로 꾹꾹 울음을 참고, 눈물을 닦고 기다렸고, 곧 대기실 유리문이 열리고 그 안 여러 개의 수술실 중 하나로 들어갔다. 수술실 안은 뭔가 냉장고 같았다. 온통 하얀 넓디넓은 방 안에 수술대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다. 마치 한겨울의 눈이 부시게 하얀 눈밭 속 같다. 난 지시대로 휠체어에서 일어나 수술대에 누웠다. 그들은 수술 준비에 정신이 없지만, 난 해일처럼 날 휩쓰는 긴장감과 무력감에 정신이 없다. 자의적으로 의식을 잃고 내 육체를 전적으로 타인들에게 맡기는데에서 오는 그런 불편하고 두려운 무력감.


'젊은 의사들, 간호사들, 수련생, 모두 나와 비슷한 또래일 텐데. 그들은 자기 또래의 환자가 암수술을 받으러 온 걸 보고 안타까워할까? 동정심을 느낄까? 더 정성을 기울여줄까?... 그랬으면 좋겠다...'

곧 마취담당의가 들어와 마취제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잠이 들었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

...

...

...

!

눈을 떴고, 정신이 들었다.

앞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파란 옷을 입은 사람들 대여섯 명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가까이에서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환자분, 성함이 뭐예요?"

"(웅얼웅얼) ooo이요.."

(의식 체크를 위해 그 외 개인정보 몇 가지를 물어보셨다.)

"오늘이 며칠인지 알아요?"

"...... (오늘이 며칠이지..? 여긴 어디지? 무슨 일이지?)"

"지금은 6월 5일 (수술 다음날) 오전 oo시이고, 여기는 중환자실이에요."


그 뒤엔 뭐라고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간호사선생님이 뭐라고 상황 설명을 해줬는데 이제 막 의식이 들어서 귀에 잘 안 들어왔다. 대답을 하려 해도 목이 완전히 잠겨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데다가, 입에 인공호흡기를 꽂고 있었다.

"이제 인공호흡기를 뺄 거예요. 수술 전에 교육받으신 대로 호흡 열심히 하세요. 주무시면 안 돼요~"

그리고 입안 가득 물고 있던 호흡기가 빠졌다. 호흡하기 어렵진 않았지만 너무너무 추웠다. 마치 냉동고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내  내부의 한기에 온몸을 덜덜덜 떨었다.

 

왜 중환자실에 있는지 몰랐다. 몽롱하고 정신이 없었지만, 그 와중에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부모님 생각이 났다.

'엄마 아빠는 내가 여기에 있는 걸 아시나..? 걱정하실 텐데... 간호사선생님한테 나 여기 있는 거 엄마 아빠한테 전해달라고 얘기해야 되는데...' 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중환자실이라고? 왜 여기 있는 거지..? 설마 뭔가 잘못된 건가..?'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특히 부모님께 나 여기 있다고 너무 알리고 싶었지만, 말이 안 나왔다. 날 담당하시는 중환자실 간호사선생님은 발에 불이 나도록 바쁘게 돌아다니며 일하시는데, 너무 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크게 나오질 않아 부를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의 소리: 선생님!!!!! 선생님!!!! 여기요!!!!! 저 너무 추워요 ㅠㅠ!!!!! 간호사님!!!! 저 엄마한테 연락 좀 해주세요!!!! 아 선생님 저 너무 추워요 ㅠㅠ!!!! 제발 저 좀 봐주세요!!!!ㅠㅠ)


오들오들 떨면서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저 밖으로 엄마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엄마다!!!!!!!!!

정말 이때의 심정은... 태어나서 엄마를 만났을 때 다음으로 엄마가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있을까 싶다. 엄마를 본 순간, 엄마를 만난 순간 그냥 모든 게 안심이 됐다. '엄마'란 존재의 엄청난 무게감을 제대로 느꼈던 순간이었다.

내 쓸데없었던 걱정과는 다르게, 당연히 병원에서, 그리고 담당 중환자실 간호사선생님도 나의 상황과 위치를 부모님께 다 전달한 상태였다. 내가 수술 후 중환자실에서 하루를 보냈기 때문에, 이미 입원했던 병동의 짐은 싹 뺀 상태였고, 다른 빈자리로 재입원을 해야 했다.


중환자실에서의 기억은 별로 없다. 그냥 굉장히 추웠고, 잠들기 않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같이 중환자실에 있는 다른 환자들을 보면서, '저 아저씨는 멀쩡해 보이는데 왜 여기 있지..?', 유리문 밖으로 보이는 의사들도 구경하고... '대단한 사람들...' 그리고 날 담당하는 간호사선생님이 나보다도 어려 보였는데, 정말 친절했다. 엄마에게도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걱정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해 주며 내 상황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해주셨다고 한다. 정말 감사하다.


알고 보니, 수술 후, 수술이 워낙 컸다 보니, 내 상태를 지속적으로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중환자실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나는 수술 다음날 저녁이 다 되어서 병실로 다시 옮겨왔다. 진통제를 계속 맞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잠이 쏟아져서 옮겨온 것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중환자실 침대에서 병실 침대로 옮길 때 최선을 다해 내 몸뚱이를 조금씩 들썩들썩하기 위해 잠깐 정신을 다시 차렸었다.




그날의 이야기


나중에야 당시 수술날의 상황을 부모님께 듣게 되었다.

난 수술실에 들어갔고, 부모님은 그 밖 대기실에서 계속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셨다. 그런데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수술실 앞 모니터에 나오는 이름들이 하나씩 없어져도, 나보다 늦게 들어간 사람들이 수술이 끝나고 나와도, 내 이름만 계속해서 미동도 없이 화면에 <수술 중>이라고 떠있었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오후 12시가 안 돼서 들어간 나는 저녁 8시 반이 넘어서야 나와 바로 중환자실로 이동됐다. 이때 난 아직 의식이 전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 기억이 없지만, 수술이 다 끝나고 나오는 나를 보며 아빠는 눈물을 터뜨리셨고 엄마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셨다고 했다. 큰 이모도 나중에 오셨는데, 난 오신지도 몰랐지만 큰 이모도 날 보고 엉엉 우셨다고 했다. 나는 부모가 되어본 적이 없어서 그 마음을 100%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지, 얼마나 그 기다리는 시간이 고통스러웠을지 조금 짐작은 된다. 이런 경험을 하게 해 드려 죄송하다.



수술이 끝나기 전, 담당 교수님이 잠깐 나오셔서 보호자를 만나는데, 수술을 어떻게 했고 수술이 어떻게 됐는지 말씀해 주신다. 아빠는 맨 먼저 "생명엔 지장이 없는 건가요?" 물으셨고, 교수님께서는 괜찮다고, 수술은 잘 됐다고 답하셨다.


나는 당연히 개복수술이었고, 난소로부터 시작된 암덩어리가 복강 내 대장, 비장, 간, 복막, 림프절에 전이되어 있는 상태였다. 다행히 대장에는 외부에만 붙어있었고, 또 전체적으로 작은 알갱이들이 여기저기 퍼져있는 게 아니라 큰 덩어리 형태로 붙어있어서 떼어내기 좋은 상태였다고 하셨다.

그렇게 수술을 통해 난소, 난관, 자궁을 완전히 제거했고, 대장은 암이 붙어있는 부분(직장의 어느 부분)을 절제하고 다시 이어 붙였고(?), 비장은 완전제거, 간은 전이된 부분을 모두 절제했다. 보기에 암으로 의심되는 것들은 모두 다 제거했다고 하셨다. 굉장히 큰 수술이었다고 말씀하셨고, 쉽게 말해 수술 세 번 할 거를 한 번에 했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하셨다.


( 수술 후 두 달쯤 뒤에 외래에서 교수님이 말씀하시길, 내가 부인과에서 가장 큰 수술이었다고, 60대였으면 못 버텼을 거라고, 젊어서 그래도 이 정도 잘 버티고 있는 거라고 말씀하셨다. 수술 후 두 달이 지나도 너무 힘들어하고 이런저런 끊임없는 증상들에 답답해하는 나와 엄마에게, 내가 얼마나 큰 대수술을 한 건지 깨우쳐주며 그만큼 얼마나 회복이 힘들고 더딜 수 있는지, 시간이 걸리는 게 당연한 거라고 말하고 싶으셨던 거다. )



여기서, 난 수술 전에 난소와 자궁을 모두 제거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고, 수술 후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 하나 더 늘게 되었다.

난 젊은 미혼 여성이지만 이제 아이를 가질 수 없다. 

하지만 이땐 이 사실을 머릿속에서 프로세스 할 여유가 전혀 없었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실에 불과했다. 나중에 상태가 조금이나마 호전되고 나서, 이미 끝난 사실이라 바로 받아들였다. 아직 결혼이나 출산에 대해선 딱히 생각해보지 않았었지만, 괜히 아쉬웠다. '날 닮은 딸이나 아들을 낳을 수 없다니...' 조금 슬펐다. '나에겐 애를 가질지 말지 선택의 여지조차 없다니...'

그렇지만 나중에 만약 애를 원한다면 입양도 있고, 다른 옵션들을 고려해도 되고, 또 원하지 않는다면 그냥 없이 잘 살면 된다. 혼자든 둘이든.

내가 암환자라는 사실보단 이게 더 받아들이기 쉬웠다. 아마 훨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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