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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Sep 28. 2023

평생의 상처와 용기

그날의 기록 #3

나에겐 이제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있다.

내 배엔 가슴 사이부터 저 밑 중요 부위 가까이까지 칼자국이 있다. 스테이플러까지 집어져 있을 땐 무슨 로봇이 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아물었다. 이 상처는 앞으로 평생 이 시간을 나에게 상기시켜 줄 것이다.

이것도 버텼는데 못 버틸 게 뭐가 있냐고. 그 무얼 못 이겨내겠냐고.





후폭풍


수술은 예상보다 오래 걸렸지만 잘 끝났고, 중환자실에서 병실로 옮겨온 나는 거동을 못하는 상태였다. 배에는 수술 후 배속에 남은 피와 복수가 나오는 배액관을 오른쪽, 왼쪽 양쪽에 하나씩 꽂고 있었고, 소변줄과 대변줄을 달고, 그리고 두 다리에는 부종 예방을 위한 기계를 감싸고 있었다. (그래도 내 다리는 곧 코끼리 다리가 되었다.)


수술 후 난 일주일간 금식했다.

수술 전날 12시부터 금식하는 것까지 하면 열흘 정도 음식은커녕 물 한 모금 못 마셨다. 수술하고 나서 가스가 나올 때까진 음식을 섭취할 수 없다. 장이 운동을 한다는 신호가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근데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가스가 진짜 정말 너무할 정도로 안 나온다. 나도 금식에서 해방되기 위해 가스가 나오길 그렇게나 바랐는데, 온 가족이 제발 가스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할 정도로 바랐는데,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운동을 좀 해야 더 잘 나올 수 있는데 거동을 거의 못하다 보니, 주로 침대에만 있으니 아마 더 안 나온다. 당연히 배 안의 장기들도 아직 많이 혼란스러운 상태다. 정상적으로 작동을 못한다.

방귀가 나오면 미음부터 먹을 수 있다. 근데 이 미음이 진짜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고, 먹기도 싫고 잘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리고 죽이 나오고, 그다음으로 밥이 나온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변줄을 빼고, 소변줄을 빼고, 이게 얼마나 좋고 개운한지 모른다. 이제 보통 사람처럼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수 있다. 그 대신 소변을 잘 못 보면 다시 꽂아야 될 수도 있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받는다. 물도 잘 마시고 화장실도 잘 가야 한다. 근데 우린 참 간과하고 살았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게 얼마나 복이고 얼마나 중요한지. 투병생활을 하면서 이걸 정말 몇 번이고 뼈저리게 느꼈다.


조금씩 움직이기 위해 환자용 보행기에 의지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약 27-8년 전 배웠던 걷는 법을 다시 익히듯이, 병동 복도를 그렇게 조금씩 걷는다. 자세는 꼬부랑 할머니 그 자체이다. 배가 너어어어어무 당겨서 허리를 제대로 펼 수가 없다. 힘들고 아파서 하기 싫지만, 운동을 해야 더 빨리 회복한단다. 수술한 환자에게도 운동이 그렇게나 중요할 줄은 몰랐다. 엄마는 나에게 그렇게 하루 두세 번 밥을 먹고 나서 꼭, 10분 20분이라도 걷기를 시켰다.

근데 정말 신기하게도, 하루하루 그렇게 걷기를 조금씩 늘려가며 하다 보면, 굽었던 허리가 점차 펴지고, 보행기에 전적으로 의지하던 내 몸이, 부축받아야 했던 내 몸이, 서서히 자립해 '어느 정도' 혼자 서고 걷는 게 가능해진다. '우리 몸의 회복력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실감했다. 내 부모님도.




사실 6월을 어떻게 보냈는지 뚜렷하게 기억이 다 나진 않는다. 그냥 모든 게 고통이었고 모든 게 힘들었고 지쳤다. 진통제를 많이 맞았다. 마약성이든 아니든. 어떤 자세를 해도 항상 24시간 불편했다.

잘 자지 못했다. 편한 자세가 없었다. 이렇게 해도 아프고 저렇게 해도 아프다. 옆으로 돌아눕지 못한다. 허리가 아프다. 시간이 지나서 이제 옆으로 돌아누울 수 있지만 배가 아프다. 배에 가스도 잘 차고, 계속 빵빵하고 더부룩하고 배속이 항상 불편하다. 잠을 잘 설친다. 새벽에도 간호사가 혈압과 체온을 체크하러 오기 때문에 겨우 잠들었다가도 다시 깬다.

잘 자지 못했고, 잘 먹지 못했고, 잘 싸지 못했다. 매일매일 정맥주사를 맞았다. 이것저것 피검사에서 부족하게 나온 것들, 수액, 영양제 등등...




한 번은 옆에 들어온 환자가 나처럼 젊은 사람이었다. 새댁이었다. 그분 보호자인 어머니 얘기를 들어보니 그분은 출산을 계획하기 전에 산부인과를 찾았다가 난소에 혹을 발견해서 수술을 위해 입원한 거였다. 그분은 수술을 하고 며칠 안 있어 금방 퇴원을 했다. 금방 회복했고, 멀쩡해 보였다. 부러웠다. 단순 나쁘지 않은 혹이었고, 복강경 수술이었고, 한 이틀 삼일 만에 퇴원이 될 정도로 가벼웠다.

부러웠다. 나도 암이 아닌 그냥 혹이었다면... 더 빨리 1-2기 때 발견해서 간단하게 수술했다면...




하루는 보호자로 계속 상주하던 엄마가 잠깐 뭘 사러 가셨다. 혼자 병실 침대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그냥 너무 힘들었다. 힘들어서 울었다. 혼자 울고 있는데 간호사가 들어오더니 날 보고 놀라면서 왜 우냐고 안아줬다. 이 간호사는 나보다 한 살 언니였고, 정말 친절했다. 왜 우냐고 물어서 '그냥 힘들어서...'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말이 안 나왔다. 나중에 엄마가 돌아왔는데, 복도에서 그 간호사 언니가 걱정이 돼서 무슨 일 있냐고, 내가 울고 있었다고 그랬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엄마가 들어와 울었냐고 묻길래, 응, 그냥 힘들어서 울음이 나왔다고. 너무 힘들어서... 또 눈물이 났다. 엄마는 그런 날 보며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근데 이 이후로도 엄청나게 울었다. 감정 조절이 잘 안 되는 건지, 갱년기 증상인 건지..? (이제 생리를 안 하기 때문에 갱년기 증상이 있을 수 있음) 울보가 되어버렸다 ㅜㅜ)




근데 병원이라는 곳은 확실히 너를 호전시켜 주는 곳이다 (웬만하면).

한 번은 내 옆자리 언니의 보호자인 어머니가, 그분은 병원을 많이 다녀보신, 나와 엄마 같은 그 당시 초짜와는 반대로 마스터 레벨 급이셨다. 옆자리 언니는 30대 초중반이었는데 안타깝게도 항암치료가 모두 끝나고 약 2년간 아무렇지 않게, 여행도 다닐 정도로 잘 지내다가 전이/재발돼서 다시 입원한 상태였다. 같은 난소암이었다. 그 어머니가 우리 엄마한테 그러셨다. 그래도 병원에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고. 알아서 다 해준다고. 걱정할 거 없다고.

나중에, 나도 병원을 자주 다니게 되다 보니, 엄마가 점점 격하게 그 말에 공감하셨다. 엄마도 병원에 있으면 마음은 편하긴 하단다. 내가 집에서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불안하고 무섭지만, 병원에서는 알아서 해준다고...




첫 항암


수술 후 불과 2주 뒤에 난 첫 항암을 했다.

아직 수술 회복은 한참 남은 거 같았지만, 빨리하는 게 좋은가 보다. 첫 항암을 하고 4일 뒤에 퇴원을 했다. 이때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고 항암주사를 맞았고, 어떤 부작용이 나타날지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부작용과 함께 수술 후유증도 같이 이겨내야 했다.


1차 때는 내 생각에 부작용보다도 수술 후유증이 훨씬 더 컸던 것 같다. 내가 당시 핸드폰에 적어놓은 부작용으로는 가려움, 메스꺼움, 무기력함, 복통, 오한, 귀 막힘, 배 당김, 식욕부진, 복부팽만 등이 있다. 근데 이 중에 복통과 배 당김 등 배와 관련된 증상들은 수술과 더 관련이 있는 거였다고 생각된다. 가려움, 귀 막힘, 무기력함과 같은 부작용들은 수술 후유증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었다. 수술 후유증이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었다. 항암 약 때문에 더 그랬을 수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컨디션이 오락가락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와 아빠가 번갈아가며 내 배를 문질러줘야 했다. 거실에 라꾸라꾸 침대를 옮겨 주로 거기서 생활을 했고, 가만히 TV를 보는 것도 힘들었다. 계속해서 몸이 불편하고 배가 자꾸 아프니까. 1초도 편한 적이 없었다.



먹는 게 너무 힘들었다. 난생처음으로 끼니를 먹으려면 정말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먹어야 했다. 먹고 싶어도 음식이 안 들어간다. 아니, 먹고 싶지 않다. 먹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먹기 시작하면 숨이 가빠진다. 호흡이 빨라지고 숨쉬기가 힘들어진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른다. 아마 항암 부작용 + 수술 후유증이었을까? 소화시키는데도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근데 또 몸에 에너지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먹으려면, 살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장이 아직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배에 가스와 변이 가득 찬다. 배에 가스가 가득 차서 복통을 일으키는데, 진짜 엄청 아프다. 화장실을 한번 갈 때마다 전쟁이다. 배가 너무 아파서 운다. 어떤 날은 하루에도 화장실을 수없이 들락날락한다. 힘이 다 빠진다. 화장실 앞에서 지쳐 쓰러져 눕는다. 언제쯤 편히 변을 볼 수 있을까. 언제쯤 장이 정상으로 돌아올까.


머리카락이 우수수 빠지기 시작한다. 예상했던 거다. 항암 후 한 2주쯤 지났을 때부터 한 뭉치씩 빠지기 시작했는데, 집 안 여기저기 머리카락을 흘려 엄마는 치우는데 정신이 없다. 탈모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언젠간 밀어야 된다는 걸 알고 있었고, 머리는 다시 자란다. 골룸이 되기 전에 2차 항암을 하러 갔을 때 병원 미용실에서 머리를 밀었다.




부러웠다. 바로 옆에서 그냥 일상생활을 이어나가는 내 동생들이. 아무렇지 않게 출근하고, 외출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집 안을 돌아다니고, 편하게 앉아서 TV도 보고, 재밌는 장면에서 웃고, 먹고 싶은 걸 맘껏 먹고, 그냥 모든 일상적인 행동들을 아무 문제 없이 그대로 이어나갈 수 있는 게 부러웠다.


아프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평범한 일상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암 진단을 받고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이제 몸이 너무 힘들다 보니 멘털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거지? 내가 뭘 잘못했지?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살았는데, 착하게 살았는데,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지?


진단을 받고 난소암에 대해 알아보다가 유튜브에서 같은 젊은 난소암 환우분이 '왜 나일까?'라는 생각이 들 거라고 했다. (이때는 '엇 난 그런 생각 안 하는데? 역시 난 긍정적인가 봐!'라고 생각했었다..ㅎ) 근데 그건 이유가 없다고, 그냥 운 나쁘게 랜덤으로 걸린 거라고. 그렇게 말했다. 근데 그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냥 랜덤인 거다. 운이 좀 나빴다. 나는 가족 친척 중에 암에 걸렸던 분이 단 한 명도 없다. 가족력, 유전이 아니다. 그냥 진짜 뜬금없다. 어릴 때부터 크게 아픈 적도 없다. 식생활도 좋은 편이었고, 원체 건강한 체질이라는 소리를 들었었다. 랜덤이다. 운이 안 좋았다.




6월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른다. 나에겐 정말 길고도 긴 6월이었고, 평생 잊지 못할 6월이었다. 아마 부모님도 그럴 거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상상 이상이었고, 정말 지옥 같았다. 울기도 많이 울었다. 멘털이 많이 흔들렸다. 웃는 날이 없었다. 나보다 더 아픈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차라리 장애나 다른 병이 낫겠다는 위험하고 건강하지 못하고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했다.

항암을 끝낸 암환우분들, 완치되신 분들이 주로 하시는 말씀이 '다 지나가더라'라는 거였다. ...지나갈 거 같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래야 할까... 포기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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