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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Oct 10. 2023

내 소중한 알부민 주머니

그날의 기록 #5

앞으로 얼마나 찬란한 인생을 살려고 이런 시련이 나에게 찾아왔을까.

앞으로 얼마나 멋있는 인생을 살려고 이런 고통을 내가 이겨내야 할까.

난 단지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인데.





이번 여름엔 더웠던 적이 없다. 사람들이 반팔 반바지를 입고 뙤약볕에 땀을 줄줄 흘려도 난 덥지가 않다. 집에서 가족들이 나 때문에 더위와 습기를 참는다. 참다 참다 무더위에, 끝이 안 보이는 장마로 인한 습기에 못 이겨 결국 에어컨을 틀면, 난 옷을 한 겹 더 입는다. 30도가 넘는 한여름인데, 모두가 더운데, 난 혼자 춥다.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내 경우에는 이렇다.

항암약물치료를 받는 당일은 난 멀쩡하다. 약을 맞을 때 왠지 모르게 피곤하고 좀 졸린 게 다다. 그래서 그냥 낮잠을 잔다. 항암제를 맞으면서 병동을 걷는 사람들이 난 좀 신기하다. 그리고 퇴원을 하고 집에 와서 그다음 날까지도 난 멀쩡하다. 아직 약이 온몸으로 퍼지는 중인가 보다. 아직 몸이 어리둥절한가 보다.


그리고 그다음 날 (항암제 투여 후 이틀 뒤)부터 부작용이 시작된다.

일단 기력이 없다. 힘이 쭈욱 빠진다. 정상세포들이 약물의 공격을 받아 정신을 못 차리고 발버둥 친다. 어떻게든 버텨보겠다고, 살아남겠다고 발악한다.

약물은 자비가 없다. 힘이 없는 나는 앉아있는 것도 힘들어서 자꾸 누우려 하고 자꾸 잔다. 식욕이 하나도 없지만 먹어야 하기 때문에 억지로 먹는다. 근데 먹으면 바로 누울 수가 없기 때문에 (소화가 안될까 봐, 음식이 역류할까 봐) '열심히', '최선을 다해' 적어도 30분은 앉아서 버티려고 한다.

보통 일주일 정도 먹고 자고의 생활을 반복한다. 걷기 운동은 거의 못한다.



이번에는, 8월에는 저번 달과 다르게 항암을 하고 이틀이 지나서도 구토를 하지 않았다. 너!무! 기뻤다.

보통 퇴원을 할 때 약을 큰 봉지 한가득 챙겨 오는데, 매일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한 가지도 아니고 대여섯 가지 약을 복용하는 게,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황에서 보통 일이 아니다. 이때는 알약이 크면 삼키기도 힘들어서, 이 대여섯 가지 약들을 적당한 사이즈에 맞게 나눠 두세 번에 걸쳐 먹는다. 이 중에 울렁거림 약과 속 쓰림 약이 있는데, 이번엔 각각 종류도 두 가지씩 받아왔다. 얘네들은 부작용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 항암치료 후 일주일간 복용하고, 그 후엔 증상이 있을 때마다 복용한다. 이번엔 스테로이드도 알약으로 받아왔는데, 이건 5일 간만 복용한다. 그보다 더 오래 먹는 건 안 좋다.


얘네들 덕분인지 그 후 3~4일 정도까지 구토가 전혀 없다가 이번에 새로 받은 울렁거림 약과 스테로이드 약이 끊김과 동시에 다시 구토가 시작됐다. 오 마이갓. 다시 지옥의 문이 열렸다. Welcome back to Hell...



항암치료를 하고 퇴원을 할 때 혹시 몰라서 일주일 뒤 외래를 미리 잡아놨다. 그때 병원에서 다시 떨어진 울렁거림 약을 더 받아왔고 다시 복용을 시작했지만, 이젠 약효가 없는 듯했다.

항암약물이 내가 복용하는 온갖 부작용 방지 약들을 덮치고 승리를 선언했다.

엄마가 매일, 매끼 정성껏 차려주는 밥을 열심히 먹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다시 입 밖으로 쏟아냈다. 언제 구토를 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먹을 때마다 생각한다. '먹어서 뭐 해, 어차피 다시 다 나올 텐데... 아, 제발 내려가라...' 끼니를 먹고 구토를 할지 안 할지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복불복이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저번 달 정도는 아니었다. 구토하는 횟수가 확실히 저번 달보다는 줄었다. 최악을 이미 경험했으니 '이 정도인 게 어디야' 싶으면서도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다.

그렇지만 나 자신에게 계속해서 주문을 외운다. < 앞으로 계속 더 괜찮아질 거야, 더 나아질 거야. > 이 주문을 열심히 믿으려고 한다. 그래야 진짜 그렇게 될 것만 같다.




가끔 아빠와 집 앞으로 운동을 나갔다. 거의 집에만 있지만, 바람도 좀 쐴 겸 컨디션이 좀 괜찮으면 외출을 한다. 그래봤자 집 바로 앞, 아파트 단지 안이지만... 집 앞을 돌며 20-30분 정도 천천히 걷는다. 걷는 게 굉장히 어색하다. 엄마 아빠가 볼 땐 괜찮다고 하지만 내 느낌에 걸음걸이가 이상한 것 같다. 근육도 다 빠지고 많이 걷지 못해서 그럴 거다. 이렇게 걷기 운동을 하고 들어오면 이제 에너지를 다 소모해서 앉거나 누워서 쉰다. 그래도, 미션 완료!



아프고 나서부터 식욕이 있었던 적이 없다. 그냥 먹어야 하니까 먹었다. 예전에 가끔 마른 사람들이 그냥 살기 위해 먹는다고 했던 게 이런 거구나, 살면서 처음 알았다. 나에게 원래 먹는 건 행복이었고 즐거움이었다. 이제는 나에게 모든 음식이 '생존을 위한 필수 영양소'일 뿐이었다.



나의 투병생활은 기이하다. 원래 다 그런지, 다른 환우분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꽤 멀쩡히 괜찮다가도 정말 갑자기 컨디션이 급격히 떨어진다. 심하면 힘듦에 몸부림친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다. 몸을 가누기 너무 힘들다. 신경 하나하나, 세포 하나하나가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것 같다. 나의 소중한 면역군대가 최선을 다해 싸우지만, 이미 성벽은 무너졌다. 벼랑 끝에 서있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 내가 흔들린다. 어떻게든 온 무게를 실어 땅에 붙어있으려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컨디션이 오락가락한다. 그저 하루에 내 상태가 괜찮은 시간이 더 늘어나기만을 바라고 바란다.



PCD


저번 달에 퇴원하기 전에 왼쪽 아랫배에 배액관을 꽂는 시술(PCD)을 받았다.

6월에 수술을 하고 나서 시간이 흘러도 계속해서 복강 내에 복수가 차서 자주 복수천자(주삿바늘을 이용해 복강 내 축척된 과량의 체액을 빼내는 것)를 했었다. 3L씩 뺐었는데, 그것보다 더 많이 있었지만 복수도 몸속의 수분이고 단백질이기 때문에 한 번에 다 빼면 안 된단다. 쇼크가 올 수도 있다나? 그래서 한 번에 뺄 수 있는 양은 최대 3L였다.

빼고 나면 항상 알부민(수용성 단백질)을 맞았다. 알부민은 정상수치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무튼 근데 복수가 너무 빨리, 많이 차서 아예 배액관을 달고 매일 일정량 빼기로 했고, 하루에 뺄 수 있는 양을 1.5L로 정해줬다. 나는 그냥 나오는 만큼 다 빼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게 답답했다. 한 번은 뱃속이 너무 답답해 내 멋대로 배액관을 열었다가 간호사 선생님께 혼이 났다.ㅋ

며칠간 하루에 1.5L씩 빼다가 서서히 줄어든다. 이러나저러나 실로 엄청난 양이다. 윗옷을 걷고 거울을 볼 때마다 앙상한 팔다리와 심히 대조되는 배만 불룩 나온 나의 모습을 보며 E.T. 와 동질감을 느꼈다.

나의 친구 E.T... ☞☜



배에 복수가 많이 차면 정말 힘들어진다.

임신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임신했을 때 배가 많이 나오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배가 너무 불러와서 가만히 앉아있기도 힘들어지고, 배가 항상 불러있어서 잘 먹질 못한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소화도 잘 안되고 항상 매시 불편하다. 그리고 호흡이 힘겨워진다. 특히 조금이라도 음식이 들어가면 더 숨쉬기 힘들어져서 먹는 걸 멈추고 천천히 심호흡을 해야 한다. 잘 먹어야 하는데 잘 먹질 못하니 충분한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하고, 에너지가 부족해 운동도 더 못하고, 그만큼 항암 부작용에 더 취약해지고, 복부팽만이 심해서 존재 자체가 불편하다. 다시 악순환이다.


항암을 계속하면서 점차 양이 준다고 하는데 언제쯤 이놈의 복수로부터 자유로워질지 모르겠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다. 난소암과 복수는 아주 절친인 듯하고, 교수님 왈 수술이 컸던 만큼 복막과 장기들을 많이 건드려서 상처가 많아서, 또 절제를 많이 해서 그 빈 공간을 채우는 일종의 몸의 보상심리일 수 있고, 복막의 흡수 기능이 많이 떨어져서 몸속 체액이 계속해서 쌓이는 걸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보통 약 50ml의 유출액을 복강 내 가지고 있다.) 어쨌든 결국 몸이 정상이 아니라 그렇다.



이 배액관 때문에 추가로 생활에 불편함이 생겼다. 복수가 이 관을 통해 나와서 배액 주머니로 쌓이는데, 500ml가 다 되어가면 이걸 비워주고 정확한 양을 기록한다. 관 소독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하고, 배에 관 삽입 부분의 소독은 이틀에 한번 한다.


24/7 이 관을 배에 꽂고 있고, 달고 다닌다. 관이 연결된 주머니도 나와 한 몸이 되어야 하는데, 집에서는 폴대가 없으니까 종아리에 묶던지, 뭐 어떻게 배 아래로 위치해야 한다. 그래서 아빠가 옷걸이로 이 주머니를 걸 수 있는 막대(?)를 만들어 줬다. 내가 손으로 들었을 때 딱 내 발목 정도까지 오는 맞춤형 서비스였다. 움직일 때마다 배액 주머니를 걸어놓은 이걸 들고 다녔다. 난 이 주머니를 '내 소중한 알부민 주머니'라고 불렀다. 엄마가 빵 터졌다.


어차피 나갈 일은 가끔 집 앞에서 걷는 것과 병원에 갈 때뿐이지만, 외출할 때도 이 임시 아빠표 맞춤제작 폴대를 들고나갔다. 항상 배액관과 배액 주머니와 한 몸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은 신경 쓰였다. 한눈에 환자로 비치는 게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봐도 어디 아픈가 보다 측은해하고 말겠지 뭐.

사람들은 생각보다 너에게 관심이 없으니까 괜찮다.



...

잠에 들었다가 깨면 11월이 되어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무더운 여름이지만, 자고 일어나면 겨울이 되어있었으면 좋겠다.


...

나만 아니면 된다.

나 대신 저 밖에 보이는 누구든, 거리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 누구든, 내 몸속 암을 가져갔으면 좋겠다. 그 사람이 아픈 건 상관없다. 나만 아니면 된다.


...

난 눈물을 흘리며 애원한다.

이 고통을, 이 힘듦을 조금만 나눠달라고. 옆에 있는 엄마에게, 동생에게 말한다. 10%만 가져가 달라고...




엄마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더 빨리 병원에 데려가지 않아서, 건강검진을 받게 하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다 엄마 잘못이라고. 너무 힘들어 죽을 것 같을 땐 순간적으로 이 말을 믿을 뻔했다. 

난 울음을 터뜨리며 말한다. 그런 소리 말라고.


어린애도 아니고 병원이야 혼자서 얼마든지 갈 수 있다. 물론 외국에서 생활하다가 한국에 들어와서 바로 건강검진을 받아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받으러 가지 않은 게 아쉽긴 하지만,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우연일 뿐이고 운이 안 좋았을 뿐이다.


이후로 난 주변 친구들에게 잔소리를 해댄다. 건강만큼 중요한 건 없다고, 무슨 상황에서든 건강을 무조건 최우선으로 생각하라고.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꼭 병원에 가보라고. 건강검진은 주기적으로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젊다고 방심하면 안 된다고. 건강 전도사가 되었다.




8월엔 거의 집에서 지내고, 응급실은 한 번밖에 안 갔다. 더 이상 배액이 안 돼서 응급실에 가서 배액관 위치를 바꿨다. 구토는 항암 후 2주가 지나면서 줄기 시작했고 몸이 조금 회복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주에 4차 항암을 했다.


점점 더 나아질 거라고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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