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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Oct 13. 2023

응급실에서

그날의 기록 #6-1

9월은 1년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달이다. 가을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난 사계절 중 가을이 가장 좋다. 빨갛게 노랗게 물든 낙엽이 좋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선선함이 좋고, 가을 특유의 차분한 그 분위기와 가을의 색들이 좋다.

또 9월엔 내 생일이 있고, 추석이 있고,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이 있다.


이렇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을이 왔는데, 9월이 됐는데, 내 서른 번째 생일인데, 난 암 환자라니.





항암을 하면서 항암제를 맞을 때만 병원에 입원한다면 운이 정말 좋은 거다. 많은 환자들이 항암 중에 여러 가지 이유로 응급실을 수시로 드나든다.



작용 부작용

그리고 생일맞이


나는 8월 말에 4차 항암을 하고 와서 다시 일주일간 거의 누워서 생활을 하고, 점차 회복을 했다.

항암을 맞고 약 일주일에서 10일간은 상당히 무기력하고, 약물이 사악하게도 내가 영양 섭취하는 걸 차단하려는지 먹을 때 가슴 조임과 압박감이 있다. 누군가 내 가슴, 갈비뼈 부근에 코르셋을 끼우고 뒤에서 사정없이 끈을 잡아당기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코르셋은 최신식이라 크기에 상관없이 조이는 만큼 줄어든다. 내 숨통을 끊고 싶은가 보다. 아니면 못 먹게 해서 굶겨 죽이고 싶은가 보다.

그래,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해보자. 전엔 이 압박감이 갈비뼈가 서로 붙어 으스러질 것 같을 정도로 심해 힘들었는데, 이제 이 정도는 양반이다. 견딜만하지만 견뎌야 하고 싶지 않다.



항암을 할 때마다 항상 같은 부작용이 나타나는 게 아니고, 횟수에 따라 그때그때 다른 부작용들이 나타날 수 있다. 이번에 새로 경험한 부작용으로는 손발 저림이 있다. 손보다는 발끝이 특히 찌릿찌릿하고, 무감각하다. 이상하게도 집 안에서 걷기 운동을 하다 보면 점점 더 발바닥에 감각이 없다.

내 발이 맞나?

발목과 무릎도 가끔 아프다. 뼈가 저린 건지, 막 진동하는 것 같은, 미세한 뼈 조각들이 분해되는 듯한 통증이 있다. 그럼 엄마 아빠가 주물러준다. 다행히 조금만 지나면 없어진다. 이 정돈 뭐, 별거 아니다. 가끔이 아니고 자주면 별거일 뻔했다. 휴~


그리고 이 시림이 있다. 밥을 먹을 때 냉장고에서 꺼낸 반찬들이 너무 차갑고, 따뜻한 국을 떠먹고 실온의 반찬을 먹으려 해도 그마저 차가워 이가 엄청 시리다. 이가 시려서 따뜻한 것과 조금이라도 차갑거나 실온인 음식을 번갈아 가며 먹지 못한다. 왜 이렇게 이가 갑자기 시려졌는지 모르겠는데, 이제는 몸의 모든 부위를 공격하다 못해 남은 구강까지 침략하려 하나보다. 그렇지만 이건 그냥 조금 불편한 정도니까.


변비는 이미 6월부터 달고 살고 있고, 항암 후에 특히 더 심해지는데, 변비약을 먹으면 배가 아파서 이제는 며칠만 먹다가 만다. 어쩔 수 없이 약을 먹었는데 장이 움직이며 (운동시켜지며) 발생하는 복통으로 화장실에서 하루 반나절을 고생하곤 했다. 그래서 이젠 웬만하면 안 먹는다. 한 번에 순풍순풍? 시원하게 볼일을 보던 그때가 먼 옛날 같다.



이제는 수술 후유증이 전에 비해 많이 좋아져서 다행히 하루 중 상태가 괜찮은 시간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항암 2차, 3차 때 시달렸던 극심한 구토도 없어졌다. 살 것 같았다. 구토가 없으니 점점 음식 섭취에 대한 불안감도 줄어들고 있었다. 배도 덜 아프고, 관련 불편감도 줄었다.

'아, 이렇게 점차 나아지나 보다.'


살 만했다. 구토가 없으니 먹는 양도 조금씩 더 늘려갔다. 소화는 아직 수월하게 되지 않아 먹고 나면 아빠나 엄마가 등을 쓸어 주었지만, 구토를 안 하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었다. 

회복을 꽤 하고 가족과 함께 행복한 생일을 보냈다. 동생들과 친구들에게 선물도 받았고, 맛있게 저녁을 먹었고, 더 이상 속삭임이 아닌 정상적인 목소리로 떠들었다. 이날 컨디션이 어떨지,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걱정도 했지만, 암 환자로 맞이하는 나의 첫 생일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가족이 없었다면 난 어떻게 버텼을까.



izi - 응급실

(복수야, 제발 날 그만 떠나줘)


근데 안타깝게도 살 만하고 컨디션이 괜찮은 건 여기까지였다.

생일 바로 다음날 난 응급실에 복수천자를 하러 갔고, 그래,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복수를 얼마나 뺐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배액관을 이미 달고 있는 상태에서, 그 주변 부위에 또 주사로 배에 구멍을 뚫어 복강 내 찬 복수를 빼냈다. 배액관을 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수가 제대로 배액이 되지 않아 며칠 동안 또 많이 찬 상태였다. 이상하게 매일 식염수로 관을 소독하는데도 그런다. 병원에서 이걸 PCD라고 부르는데, 이 PCD 재시술(관이 꽂힌 위치를 바꾸는 것)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시술을 담당하는 교수님의 얼굴도 두 번, 세 번 보니 참 익숙하고 이젠 친근하기까지 하다.

이 교수님도 자꾸 되돌아오는 날 알까? 그럴 일은 전무하다. 환자가 얼마나 많은데!



천자를 하고 집에 온 다음날.

아침을 먹고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는데, 복통이 시작됐다. 근데 이건 지금까지와는 다른 류의 복통이었다.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하고 참고 버티는데, 너무너무너무 미친 듯이 아팠다. 아파서 엉엉 울음이 나왔다. 몸을 가눌 수 없었다.

휴일이라 집에 계시던 아빠가 병원에 가자며 119를 불렀다. 이렇게 난 난생처음으로 삐용삐용 구급차에 실려갈 뻔했지만, 웃프게도 구급차에게 거절 아닌 거절을 당했다. 난 경기도에서 서울로 병원을 다니는데, 구급요원들이 집에 와서 하는 말이, 병원이 멀고 (약 40분 거리), 차도 막혀서 구급차로 가도 빨리 가지 못한단다. 그냥 자차를 타고 가는 거랑 별반 다를 게 없고, 승차감도 그렇고 자차가 오히려 더 편할 거라는 거다. (이거, 맞는 거야?) 일단 급하니까 알겠다 하고 난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하루 만에 다시 응급실에 도착했다.


응급실 앞에 도착해서 엄마 아빠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에 앉아 접수하러 가는데 갑자기 구토가 나왔다. 아침 먹은 게 다 나왔다.

'헐.. 뭐지? 다시 시작인가? 안돼...'

내 옷도 그렇고 휠체어까지 아주 난리가 났다. 내가 했지만 더럽고 역겹다.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그 뒤처리를 해야 하는 사람에게 너무 미안했다.


119를 타고 와도 CPR이 필요한 게 아니면, 당장 죽는 게 아니면 응급실에서는 기다려야 한다 (대형 대학병원의 경우). 집에서보단 좀 나아졌지만 그래도 배가 아파 미칠 것 같은 지경인데 내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휠체어에서 거의 울다시피 끙끙대며 대기하다가 드디어 들어갔다. 근데 응급실에 들어간다고 바로 다 해결되는 게 아니다. 또다시 기다림의 연속이다.


응급의학과 주치의가 와서 이런저런 질문들을 하고 배를 여기저기 만져보고 눌러본다.


"언제부터 아프셨어요?"  

"배 좀 눌러볼 테니까 어디가 제일 아픈지 얘기해 주세요."

"손을 뗄 때도 아픈지 보세요."...


누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손을 갖다 대기만 해도 아프다.


일단은 각종 검사를 하게 된다. 기본적으로는 혈액검사, 소변검사, 엑스레이 정도. 그리고 결과에 따라 어떤 또 다른 검사를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은 금식이다.



헬게이트의 재개장

The reopening of never ever-wanted Hellgate


이날 응급병동에서 아빠가 보호자로 있었고, 밤을 지새웠다.

나는 구토가 다시 시작돼 계속해서 구토를 해댔고, 그러다 나올 게 없어서 노란 위액이 나오기 시작했다.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앉아있기도 힘들지만, 상체를 지탱할 힘이 부족하지만, 누워있지도 못한다. 누우면, 뒤로 좀 기대면, 구토가 나온다. 조금만 편하게 있고 싶어도 자세의 변화에 따라 속이 울렁거리고 구역질이 난다. 눈코입이 다 빠질 것 같고, 위가 쓰려서 다 타버릴 것 같다.


먹는 거 하나 없이 하루 종일, 밤새 위액만 계속 토해내니 없는 힘도 다 빠진다. 정말 너무 힘들다. '힘들다'라는 말로 다 담지 못한다. 나 참, '이제 좀 살만하다' 했더니 다시 이렇게 악몽이 시작된다. 헬게이트가 열렸다. 전엔 그래도 조금이라도 먹고, 마시고 토해서 구토물이라도 있었는데 이번엔 정말 그냥 노란 위액뿐이다.



그 와중에 혈액검사는 또 몇 번이나 하는지, 한 다섯 번은 와서 뽑아간 것 같다. (검사 종류가 여러 가지였고 종류마다 필요한 양이 다르다.) 한 번은 간호사 두 명이 한 번에 와서 각각 다른 혈관에서 채혈을 했다. 이때는 아빠가 참다 참다못해 간호사들에게 한마디 했다.


"아니, 무슨 피검사를 이렇게 많이 해요 자꾸! 이번에 해서 안되면 더 이상 찌르지 마요!"


애는 기운 하나 없이 힘겨워하는데, 안 그래도 찌를 혈관이 없어서 매번 간호사들이 애를 먹는데, (겨우 찾아서 주사를 찔렀는데 피가 잘 안 나와 그냥 뺄 수밖에 없으면, 다른 혈관을 찾아 다시 찔러야 한다.), 피도 부족한데, 자꾸 피만 뽑아가니, 화가 날 만도 하다. 아빠 입장에선 그래도 많이 참은 거다. 결과는 아직 하나도 듣지도 못하고, 양 팔엔 주사 자국이 가득한데, 자꾸 와서 피만 뽑아가니, 이건 환자를 돕는 건지 해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지경이다.

하지만 필요하다니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간호사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주치의가 어떤 검사를 지시하면 그에 따를 뿐이다. 그리고 그 검사들을 환자의 상태와 증상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고 수단일 뿐이다.

난 이제 발에 정맥주사를 맞고 있었다.



자고 싶었지만 잘 자지는 못했다. 몇 분씩, 한두 시간씩 자다 깨다를 반복했고, 깰 때마다 옆에 아빠가 앉아 계신 게 보였다.

아빠는 밤을 꼬박 새웠다. 밥도 한 끼 못 드셨다. 너무 배고플 텐데, 졸릴 텐데, 피곤할 텐데. 죄송했다. 근데 아빠는 하나도 안 졸렸다고 했다. 내 상태가 너무 안 좋으니, 긴장하고 있으니, 지켜보느라 졸리지가 않더란다.


밤에는 응급실 내 또 다른 구역으로 옮겨졌고, 자다가도 구토를 하던 나는 이 안에 누구라도, 간호사든, 인턴이든, 다른 환자 주치의든 누구든, 어떻게 해서라도 이 위액 구토를 멈춰줬으면 했다. 그것만 간절하게 바랐다. 하룻밤이 그렇게 꼬박 흐르고, 다시 아침이 되어 불이 환하게 켜지고 바쁘게 지나다니는 간호사들을 보며, 내 이 고통을, 심각성을, 힘듦을, 조금이라도 알아주기를, 관심 가져주기를, 해결해 주기를.

하지만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건 증상이 완화될 수 있도록 (완화되길 바라며) 약물을 처방받아 투여해 주는 것뿐이다. 계속해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건 오로지 나고, 나 혼자서 나 자신과 싸워야 한다.



아프고 나서 그렇게 처음으로 밤새 아빠와 응급실에 있었는데, 아빠가 울먹거리며 그런다.

"아빠가 대신 아파주지 못해 미안해..."


그럼 그 말을 듣고 난 또 눈물이 난다. 아빠의 진심과 아픔이 느껴진다.

근데 내가 너무 아프고 죽을 것 같이 힘들 땐, 진짜 그래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는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나눠가질 수 있다면. 환자는 자신이 없다. 하기 싫다. 아프지만 않다면 다른 건 다 좋다. ...


이날 응급실에서 보낸 24시간은 일주일같이 길었고, 그 고통의 순간순간이 내 기억 속에 각인되었고, 무엇보다도 '내리사랑'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아빠가 '아, 이게 내리사랑이구나' 깨닫게 해 줬다.


부모가 아니라면, 내가 아빠에게, 엄마에게 지금까지 받은 간호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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